소설리스트

33화 (33/242)

“맞아. 한데, 그건 왜 묻는 거니?”

“별건 아니고, 흑미가 종종 자유롭게 사냥하고 놀 만한 곳이 필요해서. 몬스터를 사냥해서 직접 재료를 얻어 보게 하면 어떨까 했어.”

“흐음……. 그래. 장미태생이라고는 해도, 마족과 수인의 속성이 있으니 생각만큼 순한 기질은 아니겠지.”

그러나 잠시 후 크리스티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안 돼. 간다면 룬, 너와 같이 가야 하잖니. 아직 해츨링인 너를 위험한 곳에 보낼 수는 없어.”

“……그래?”

룬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그는 토마호크 스테이크를 뼈째 물어뜯고 있는 흑미를 아련하게 돌아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영 미안한 기색이 된 크리스티나가 달래듯이 말했다.

“속상하겠지만 어쩔 수가 없구나. 다른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 볼게. 미안해.”

“응…….”

깨작.

룬은 고민에 빠진 듯 느리게 음식을 먹으며 때를 기다렸다.

책임감이 강한 크리스티나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한 성격을 가진 그녀였다.

‘원래 들어주기 힘든 걸 먼저 제안해서 거절하게 만든 다음, 가벼운 일을 내밀면 좀 더 쉽게 승낙하기 마련이지.’

양심의 가책을 이용한 방법이라 미안한 감은 있었지만, 과보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어색해진 분위기 탓에 난감한 표정을 짓는 크리스티나에게 룬이 슬쩍 찔렀다.

“그럼, 페르디키온 형의 레어는 어때?”

“페르디키온의 레어 말이니?”

“응.”

룬이 옅은 기대감이 어린 눈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페르디키온 형하고 ‘약속’했잖아? 불의 인장을 받으면, 형 레어에 가서 맛있는 음식 만들어 준다고.”

‘그리고 페르디키온의 레어에는…… 주민들만 출입이 허락되는 마력석 수급용 던전이 하나 있지.’

룬은 속으로 조용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진명을 건 맹약을 중시하는 일족인 드래곤 족.

비록 애들끼리 맛있는 거나 해먹자며 약속한 느낌이라 해도 크리스티나는 해츨링에게 약속 어기는 법을 가르칠 성정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즉시 거절하지 못했다.

‘고민스럽구나. 위험이 있는 곳이지만, 룬이 처음으로 ‘약속’한 일을 가벼이 꺾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심지어 페르디키온과 불의 일족들의 친목을 위해 도움을 주기 위한 일이라는 대의도 있었다.

그의 꿍꿍이를 모르는 크리스티나가 고민에 빠진 채 미간을 살짝 구겼다.

‘드래곤 족에게 있어 약속은 맹약을 지키는 연습이니…… 내 걱정을 이유로 약속을 지키겠다는 아이를 막아서는 안 되겠지.’

그렇지 않아도 페르디키온이 룬의 수면기가 끝나기를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그녀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페르디키온에게는 안 그래도 네가 깨어났다고 연락할 참이었단다.”

“고마워, 크리스티나.”

룬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폐광 던전.>

대륙에서 가장 질 좋은 어둠 속성의 마력석과 불의 마력석이 나오는 광석 던전이었다.

위험도가 낮은 던전 중 하나로, 일단 몬스터의 출현빈도가 적은 편에 속했다.

오죽하면 몬스터를 사냥해서 나오는 부산물이 아닌 광석을 캐러 간다는 장소일 정도였으니까.

‘페르디키온도 옛날에 그 레어를 몇 번이나 클리어했고. 실제로 보스를 제외하면 강한 놈들이 없다지.’

잡기 어렵고 강한 몬스터일수록 사체에서 나오는 부산물의 값이 올라가고 비싸게 팔렸다.

약한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물품은 흔해서 자연스럽게 가치가 떨어지게 마련.

즉 <폐광 던전>은 광석을 캐러 가는 광부 던전으로, 노다지 던전이었다.

룬은 전승 지식에 나열된 정보 중 일부를 떠올렸다.

‘폐광 던전은 진입자의 수준에 맞춰서 난이도가 설정되는 특수 던전.’

물론 던전은 던전인지라, 아무런 대비 없이 갈 수는 없었다.

던전의 주인인 페르디키온도 100살이 넘어서야 처음 도전했다는 곳.

고작 10년의 수면기를 지낸 룬이 가기에는 꽤 위험할 법했다.

‘하지만 방법이야 있지.’

파시야스의 교육이 스파르타식이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전승조차 받지 않았던 어린 시절 페르디키온이 깰 수 있었던 이유.

바로 던전을 깰 팀을 꾸려 가는 것이었다.

원래 혼자보다는, 적당한 팀플레이가 쉬운 법.

‘그 던전은 지금도 비슷한 전투력의 광부들이 모여서 함께 들어가지. 여차하면 페르디키온을 구슬려서 그 파티에 끼어들어가기만 하면 돼.’

어쩌면 페르디키온이 함께해 줄지도 몰랐다.

자신의 영역에 있는 던전이니 누구보다 많은 경험과 파훼법을 알고 있을 터.

‘게다가, 나한텐 그 약이 있어.’

룬은 비장의 물건을 떠올리고 씨익 미소 지었다.

“어쩐지 묘한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이래서 신수들이란. 쓸데없이 감이 좋아.’

속으로 혀를 찬 것과 달리 룬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대꾸했다.

“페르디키온 형 레어에 갈 생각하니까 기대돼서 그래.”

“흐으음…….”

크리스티나의 눈빛은 영 개운하지 않아 보였지만, 룬은 더 말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그는 크리스티나가 아주 약해지는 필살의 방법을 사용했다.

‘아직 통하겠지?’

룬이 해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평소엔 옅은 미소 정도나 간간이 짓던 해츨링인 룬 이클립스.

그랬던 그가 10년 만에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본 크리스티나가 뭉클한 감동에 빠졌다.

“형한테 얼른 연락 넣어주라. 빨리 가보고 싶어.”

“…….”

크리스티나의 눈빛은 어딘가 아련했다.

물론 룬이 의도한 바였다.

‘일족이라곤 없는 해츨링이 호형호제 하다 보니 우애가 돈독해졌을 수 있지. 안 그래?’

“우와아. 룬 님 얼굴이 햇살 같아요!”

‘아니. 이건 원하는 걸 얻기 위한 야망의 얼굴이야.’

룬은 흑미에게 속으로 대꾸하고는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르디키온이 오기 전에 검은 방에서 가져와야 할 물건 때문이었다.

‘저주 물품이라고 다 안 좋은 게 아니거든. 적재적소에 쓰기만 하면 이보다 더 기발한 놈이 없단 말이지.’

룬이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온갖 저주 걸린 물건들 중에서도 강력한 놈이었다.

일반적인 저주 물약이 아닌, 어둠의 일족인 블랙 드래곤의 저주 비약.

그걸 가지고 페르디키온의 레어에 가기만 하면, 던전을 클리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

히죽.

10년간 성장한 것은 영악한 두뇌일지도 몰랐다.

***

오랜만에 아침에 일어나 수련을 마친 룬에게 페르디키온이 찾아왔다.

“룬!”

“어, 왔어 형?”

외모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이목구미가 더 시원하고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의 웃는 얼굴이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밝아진 덕분이었다.

“기다렸다. 수면기에 들은 뒤로 10년 만인가?”

“응. 형은 잘 지냈어?”

“그래. 이래저래 신경 좀 쓰고 했더니 주변이 많이 달라졌지.”

어딘가 멋쩍은 눈으로 페르디키온이 제 머리를 긁적였다.

‘복장도 그때보다는 좀 편하게 입었네.’

목 끝까지 답답하게 쟁여 잠그던 겉옷과 셔츠 단추를 한 두 개씩 푼 것만으로도 훨씬 자유로워 보였다.

이제 페르디키온은 딱딱한 걸음걸이로 걷지 않았다.

팔 다리가 시원하게 뻗어 나오는 움직임을 기본으로, 가볍게 팔짱을 끼거나 테이블에 손을 얹는 등 달라진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다행이네. 잘됐다, 형.”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룬에게 페르디키온이 시원하게 웃었다.

“크리스티나 님께 들었다. 내 레어에 오기로 한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며.”

“응. 잊었을 리가 있겠어? 어제 수면기 끝나고 나오자마자 떠올랐는걸.”

“감동인데.”

그러면서 씩 웃는 얼굴이 꽤나 호감상이라 놀랠 정도였다.

‘엄청 달라졌네. 아무리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무려 몇 백 년간 고정되어 있던 성격이 고작 10년 만에 바뀌다니.

어쩌면 원래 이런 성격이었는데 그동안 눌려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묘한 감회에 젖어 페르디키온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리부터 마련해볼까. 내 아우에게 줄 선물을 가져왔으니.”

그 순간 강력한 불의 힘이 깃든 인장이 그의 손바닥 위로 떠올랐다.

36화 의형제

‘불의 인장!’

열기가 훅 번져 얼굴이 뜨거웠다.

불길을 휘감고 드러난 인장.

주변을 맴도는 불길은 생명을 가진 양 계속 움직였다.

언뜻 보이는 형태는 불을 품은 심장을 형상화한 모양새였다.

홀린 듯 시선을 잡아끄는 인장을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페르디키온이 주먹을 움켜쥐자, 불길은 그의 손 안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마음에 드나?”

묻는 어감엔 만족감이 실려 있었다.

“응. 굉장하다.”

룬은 순수하게 긍정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불의 일족 장로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힘을 담은, 불의 근원이 담긴 인장.

손안의 작은 요동침이 태산을 태운 화염을 앞에 둔 듯 위압감을 선사했다.

하지만 아직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불의 인장을 받기 위해 절차가 하나 더 필요했다.

룬은 크리스티나에게 미리 들어둔 장소로 페르디키온과 함께 이동했다.

“어서 오렴, 펠.”

“삐!”

크리스티나의 어깨 위에 앉아있던 백야가 페르디키온에게 날개를 펼쳐 보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붙어있는 흑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네. 연락 감사합니다, 크리스티나 님.”

페르디키온의 시선이 까만 귀를 쫑긋거리는 아이에게 향했다.

“저 녀석이 네가 수면기에 든 동안 생긴 권속인가?”

쭈뼛거리던 흑미는 작고 통통한 두 손을 꼬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흑미예요!”

어깨를 으쓱인 페르디키온이 대답했다.

“흑미? 이름이 신기하군. 난 룬의 형이다. 페르디키온이라고 불러.”

“룬 님의 형이요?”

아이의 경계심이 조금 수그러지며 신기한 눈으로 바뀌었다.

“룬 님이랑 친해요?”

“친하기만 할까? 둘도 없는 형제가 될 예정이지.”

“?”

룬이 의문 어린 시선을 던졌지만 페르디키온은 홀로 자랑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같은 서번트와는 비교할 수 없지.”

‘뭔 이상한 우월감을 느끼고 앉아있어.’

내심 헛웃음이 나오는 기분으로 보는데, 흑미가 분하다는 듯 페르디키온을 보더니 입을 삐쭉였다.

“아니에요. 흑미는 룬님 덕분에 태어난 걸요!”

“그래봐야 서번트지만.”

“히잉!”

‘유치해서 못 보겠네.’

페르디키온의 성정이 나아졌다고 성장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그래, 해츨링의 10년이란 게 그렇지.’

기껏해야 한숨 푹 자고 일어난 시간동안 괜찮은 성정으로 돌아온 것만도 대견했다.

다만 그는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고 둘을 적당히 중재했다.

“둘 다 나에게 좋은 녀석들이니까 진정해.”

“아니거든요. 흑미가 최고거든요.”

냉큼 룬의 손을 붙잡은 흑미가 메롱, 혀를 쏙 내밀었다.

“아, 그래? 이거 어쩌나. 난 오늘 룬에게 굉장한 걸 선물하러 온 건데.”

‘저거 재미 들렸구만.’

애가 애를 놀리고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슬슬 말려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마침 크리스티나가 나서 주었다.

“흑미야. 지금부터 룬을 도우려 하는데, 너도 힘을 보태주겠니?”

자신이 활약할 기회라 여겼는지 눈을 빛낸 흑미가 까만 여우꼬리를 살랑였다.

“내가 도우면 룬 님, 좋아요?”

“그래.”

“!”

룬의 대답에 주먹까지 야무지게 말아 쥔 흑미가 백야까지 끌고 크리스티나에게로 향했다.

“백야야! 이리 와 봐. 이거 하면 룬님이 좋아한대!”

“삐!”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