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242)

둘은 크리스티나가 적당한 할 일을 맡기자마자 열심히 몰입하기 시작했다.

살짝 돌아본 그녀는 룬과 페르디키온에게 눈짓했다.

‘고마워.’

룬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마법진 안으로 들어간 그들 주변으로 순식간에 빛의 결계가 깔렸다.

온화하고 밝은 기운.

마치 기분 좋은 햇살에 몸을 쬐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전승지식이 활성화 되어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골드 드래곤 장로의 빛의 결계>

: 골드 드래곤의 중심부의 힘을 빌려 만든 결계.

시전자의 능력치에 따라 부과 효과가 증가한다.

* 시전자 : 골드 드래곤의 장로 크리스티나

* 적용 효과 :

- 빛 속성 축복 계열.

- 아군의 치유와 보호. 저항력 상승.

- 재생능력 상승

- 불의 능력과의 상성 최상급

- 기민한 신체능력과 마력을 다루는 능력 비약적 상승

.

.

.

(중략)

시간이 흐를수록 떠오르는 정보량이 착실하게 늘어났다.

끝도 없이 늘어나는 목록을 보니 골드 드래곤 수장인 크리스티나의 힘이 실감되었다.

‘공격능력보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능력치가 붙는군.’

이런 그녀가 공격계열의 능력을 발휘하면 어떻게 될지.

탐이 나기도 하고 궁금해지기도 했다.

“자, 시작한다.”

“응.”

‘그건 그거고, 일단은 불의 인장부터 잘 흡수해야지.’

살짝 긴장이 되었다.

불의 인장을 받기 위해 굳이 이 장소까지 이동한 이유.

인장이 품고 있는 기운이 너무 강해 주변에 있는 물건은 물론, 대지까지 녹여버리기 때문이었다.

‘역시 크리스티나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게 탁월한 선택이었어.’

크리스티나의 힘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강했다.

심지어 수호와 빛을 다루는 능력에 특화된 골드 드래곤.

만약의 사태에 가장 대처력이 좋은 상대였다.

드디어 페르디키온의 눈에 붉은 빛이 돌기 시작했다.

이어, 들어 올린 오른손에 완전한 형태의 <불의 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오르는 심장은 사슬에 감겨있었다.

‘아까 잠깐 드러냈을 때조차 봉인된 형태였군.’

압도적인 열기에 살짝 질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 질림은 곧 탐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이쯤은 되어야지. 다른 녀석도 아닌, 레드 드래곤 수장의 후계가 직접 주는 인장인데.’

불이 가진 생명력을 응축해둔다면 이런 느낌일까.

스르르.

사슬이 풀렸다.

두쿵! 두쿵!

격렬하게 살아 숨 쉬는 불의 힘이 꿈틀거렸다.

“자. 이것이 네게 줄 불의 인장이다.”

“…….”

말없이 바라만 보는 그를 향해, 페르디키온이 제법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장을 받는다는 건 불의 일족이 된다는 뜻. 불의 형제끼리 배반하지 않고,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알고 있어.”

“네가 잠들어있는 동안 생각해봤다. 불의 인장을 그저 신뢰에 대한 보답으로 줘도 좋을지.”

당장이라도 움켜쥐고 삼키고픈 욕구를 참고, 룬은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난 십 년간, 레어를 다스리며 깨달았지. 내 레어 주민들처럼 너도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라고.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내가 장로로서 더욱 완벽해지기 위해서.”

페르디키온이 웃었다.

그 미소엔 예전의 모습이 녹아있었다. 뜨거운 심장과 차가운 이성을 우선시한 장로로서의 면모가.

“그래서, 그 인장에 나의 권능을 담았다. 그걸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의형제가 되는 거지.”

룬은 이전 생에서 이와 가장 비슷한 예시를 떠올렸다.

‘도원결의라고 했던가.’

생각해보면, 전생에서는 의형제는커녕 소소한 파벌조차 없던 이무기였다.

‘이 녀석이 바뀌었다면, 나 역시 그렇겠지.’

룬이 페르디키온의 성정을 변화시켰듯이, 룬 역시 영향을 받고 있었으리라.

늘 섬에서 혼자 살아왔던 그에게 이렇듯 새로운 경험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었다.

“나도 블랙 드래곤의 장로로서 성장하고, 강해질 생각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형.”

룬이 손을 뻗자 그의 손 안에 인장이 담겼다.

거칠게 날뛰는 생명력을 그대로 손에 쥔 듯한 기분.

그 묘한 고양감.

룬은 인장을 잡은 손을 움켜쥐었다.

후욱!

불길이 룬의 전신을 태울 듯 휘감았다.

‘뜨겁다.’

용암 속에 잠기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룬의 목 근처에 블랙 드래곤 해츨링의 비늘이 슬쩍 드러나며, 붉은 기운이 스몄다.

어둠의 기운으로 가득했던 그가 불의 인장을 완전히 삼켰다.

그의 머릿속의 정보가 갱신되며 문자가 나열되기 시작했다.

<불의 인장> (귀속)

- 레드 드래곤의 증표를 받아들여 생성됨.

- 효과:

* 몸이 불에 해를 당하지 않게 된다.

* 강한 열기를 버틸 수 있게 된다.

* 불 속성 친화력을 크게 올려준다.

※ 특이사항 : 불의 인장을 획득한 다른 대상을 살해했을 시 페널티 발생.

이름과 설명은 같았는데, 추가된 정보가 있었다.

* 불과 어둠이 결합되어 새로운 속성조합을 획득했다!

스륵.

룬의 붉은 눈에 어둠의 동공과 불의 인장의 표시가 번갈아 얽혔다.

아직 사용해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공기 중의 온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열감.

당장이라도 포효하고 싶어지는 강렬한 힘.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가, 새로운 힘이 완전히 자리를 잡자 천천히 가라앉았다.

‘됐다.’

룬은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빛의 결계가 서서히 잦아들며, 외부의 소리가 와르르 쏟아졌다.

“삐이이!”

“룬 님!”

“인기가 많네, 룬.”

백야와 흑미, 페르디키온이 차례대로 말했다.

크리스티나는 그들 뒤쪽에서 가볍게 한숨을 쉬며 어깨를 펴고 있었다.

“수고했어, 둘 다.”

“고마워, 크리스티나.”

기분 좋았던 룬이 먼저 그녀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어디 특별히 어색한 데는 없니?”

“전혀. 완벽하게 흡수했어.”

룬의 대답에 크리스티나도, 페르디키온도 의외라는 듯 눈을 뜨고 서로 마주보았다.

“완벽하게?”

“흐음……. 정말 괜찮은 거니?”

‘왜들 이러지?’

어리둥절해진 룬이 자신의 상태를 다시 확인하고 대꾸했다.

"원래 내 힘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데. 크리스티나의 결계 덕분 아니야?”

크리스티나가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결계가 다른 속성과의 거부감을 줄여주기는 하지만, 그걸 잘 받아들이게 하는 것과 네 안에 들어온 힘을 자력으로 다스리는 건 다른 이야기야.”

어떻게 하면 아직 어린 해츨링인 룬이 잘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크리스티나가 말을 이었다.

“불의 기운은 파괴력이 강한 힘. 고요한 침묵의 어둠을 지닌 네게 낯선 힘이지. 타 종족의 힘을 ‘흡수’한 후에는 보통 이질감을 느끼게 된단다.”

‘이질감?’

룬은 그녀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전혀 모르겠는데.”

이질감은커녕 당장 제 힘처럼 익숙하게 흐르고 있었다.

“신기하네. 네게 이 말을 몇 번이나 하게 되는지 모르겠어.”

희한해하는 크리스티나와 달리 페르디키온은 제 팔짱을 끼고는, ‘역시 내 아우로군!’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룬은 말없이 볼을 긁적였다.

크리스티나가 짚은 문제가 왜 발생하지 않았는지 깨달은 탓이었다.

‘거의 평생을 했었지. 요동치는 기운을 다스리는 수련.’

다름 아닌 이무기 시절, 승천하기 위한 999년간의 수련이 빛을 발한 셈이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했던가.

어떤 기운이라도 제 것으로 융화시키는 힘!

전생에서는 승천하기도 전에 죽는 바람에 소용없어진 감각이었다.

그것이 해츨링으로 태어난 이번 삶에 도달해서야 개화한 셈이다.

‘그렇다면, 다른 드래곤들의 인장을 얻게 되면 그 힘까지 내가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는 손을 제 얼굴로 가져갔다.

지금 그의 표정은 어린 해츨링의 것이라기엔 너무 속물적이었다.

‘침착해.’

다행히도 크리스티나와 페르디키온은 저들끼리 대화에 심취해있었다.

그 사이 탐욕으로 물든 제 표정을 감추기 위해, 그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37화 예상대로군

심호흡을 한 룬은 슬쩍 크리스티나와 페르디키온을 살폈다.

바로 가도 괜찮겠다는 페르디키온과, 좀 더 몸을 추스르고 가야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크리스티나.

둘은 레드 드래곤 레어로 떠날 일정에 대해 한창 의논 중이었다.

“불의 인장을 얻으면 안정기가 필요할 줄 알았단다. 그래서 떠날 채비를 하지 않았는데…….”

“룬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증거겠죠. 바로 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다행이다. 다들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있어서.’

지금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대로 얼굴을 들기엔, 지나치게 계산적인 눈빛이었으니까.

아무리 좋게 봐준다 해도 도저히 어린 해츨링답지 않은 얼굴일 게 틀림없었다.

‘어떤 힘이든 지금처럼 융합시킬 수만 있다면.’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속성의 마력도 전부 내가 쥘 수 있다는 말이군.’

필요한 건 힘을 담을 그릇, 즉 제대로 된 신체를 갖추는 시간뿐이었다.

거기에 전승받은 정보들을 이용하면 다양한 힘의 출처를 알아내기 쉬울 터.

‘재미있네.’

자꾸 탐욕스러워지려는 표정을 최대한 억제하던 룬은 끝내 한쪽 입 꼬리만 올려 웃었다.

“룬!”

“응?”

때마침 페르디키온의 부름이 들려왔다.

덕분에 상념에서 벗어난 룬이 다시 순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네 의견이 중요한 것 같아서 불렀다. 지금 바로 출발할지, 아니면 만약을 위해 여기 남아서 몸 상태를 확인할지 말이야.”

“지금 가도 괜찮아.”

그 말에 페르디키온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우님. 굳이 늦출 필요 없지.”

그러자 지켜보던 크리스티나는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대신, 잠시만 시간을 내 주렴.”

“무슨 일인데?”

룬의 물음에 크리스티나가 호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첫 외출인데 가기 전에 나도 보호자로서 챙겨줘야지.”

“흑미도! 흑미도 갈래요!”

“삐!”

손을 번쩍 든 흑미와 날개를 흔드는 백야에게 크리스티나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룬이 괜찮다면 레어에 함께 갈 수 있을거란다. 하지만 잠시 여기에서 기다려주렴.”

“여기서요?”

“그래. 그렇지, 손님인 페르디키온과 자리를 지켜주겠니?”

그러면서 눈짓하자, 하얗게 빛나는 정령이 백야와 흑미 사이에 자리 잡았다.

[ㅇㅅㅇ/]

“그래, 라이. 아이들을 부탁해.”

크리스티나의 부탁에 라이가 빛을 깜빡였다.

입술이 부루퉁 튀어나온 흑미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흑미는 룬님이랑 같이 가고 싶었는데…….”

“삐잇.”

그 순간 백야가 흑미의 까만 귀 사이로 날아올라 머리 위에 퐁, 하고 자리 잡았다.

“삐-! 삐삐. 삐약.”

“힝.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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