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이. 삐이이.”
백야가 흑미의 머리를 날개 끝으로 토닥였다.
흑미에게 수인족의 특성이 있어서인지 불사조인 백야와 서로 말이 통하는 모양이었다.
룬은 동물들의 대화를 지켜보다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죽이 잘 맞네.’
백야가 생각보다 흑미를 잘 이끌어주고 있었다.
병아리가 여우를 가르치는 기이한 모양새기는 했지만.
‘역시 먼저 태어난 녀석이 그래도 선배랍시고 챙기는 건가.’
어쨌든 사이좋게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룬은 두 녀석을 공평하게 한 번씩 쓰다듬어주며 일러두었다.
“얌전히 기다려. 금방 다녀올 테니까.”
흑미가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이내 다짐한 듯 씩씩하게 손을 흔들었다.
“네! 흑미 잘 기다리고 있을게요!”
“삐약!”
거기에 더해 페르디키온도 한 마디 거들었다.
“나도 보고 있으니 걱정 말고 다녀와라.”
“고마워, 형.”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룬은 크리스티나의 곁에 섰다.
이동마법을 시전하기 전, 크리스티나는 부드럽게 주의를 주었다.
“눈이 좀 부실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앞에 금빛이 넘실거렸다.
팟!
주문조차 없이 두 사람의 신형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
차르르륵!
“엇!”
도착하자마자 발 딛는 곳마다 황금과 미스릴로 된 동전들이 흘러내렸다.
서 있느니 차라리 헤엄을 치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겨우 중심을 잡은 룬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야?”
황금물결과 아름다운 보석으로 이루어진 황금의 산!
번쩍이는 금빛이 황금벌판 위에 풍성하게 흐르고 있었다.
룬이 묻는 말에 크리스티나가 허리에 한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음, 내 보물창고란다.”
골드 드래곤 레어의 보물창고!
금빛 위용에 할 말을 잊었던 룬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게 다 크리스티나의?”
천장까지 금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공간.
금화와 골드바는 물론, 고대의 희귀 금속 미스릴. 온갖 보석과 장신구, 축복이 깃든 검과 마도구 등.
하나하나 읊을 수도 없으리만치 다양한 물품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크리스티나가 관리하고 있지만 필시 이 보물들은 골드 드래곤들이 대대로 모았을 터.’
숨을 쉴 때 마다 금가루가 날릴 듯한 공간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조금 멋쩍은 듯 긴 금발을 쓸어 넘기며 웃었다.
“정리를 잘 안 하고 몇 천 년 동안 모아만 두었더니 조금 어수선해. 이해해 주렴.”
‘그게 문제가 아닌데.’
종류를 불문하고 여기저기에 쌓여있는 기물과 동전들.
개중에 그나마 저렴하다고 볼 수 있는 게 금화였다.
다만 그 양이 상당해서 걸을 때마다 발이 푹푹 파묻힐 정도였다.
그때, 크리스티나가 허리춤에서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받으렴.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
“?”
이 휘황찬란한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흔해빠진 가죽 주머니였다.
그녀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만.
“첫 외출 선물이란다. 이건 부피와 무게를 줄여주는 경량화 마법이 걸린 주머니야.”
“!”
룬은 냉큼 손을 뻗어 주머니를 받았다.
“꼭 필요한 물건이네. 고마워.”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페르디키온의 레어에는 주민들이 활발히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단다. 특히, 무구 제작에 특화된 곳이지. 괜찮은 물건이 있다면 구매해 봐도 좋으니 시장 구경도 해보렴.”
“응, 그럴게.”
“내가 미리 주머니에 적당히 담아두었어. 혹시 부족하다면 더 가져가렴.”
주머니를 살짝 열어본 룬은 고개를 저었다.
비록 크리스티나가 지닌 보물창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주머니를 다 털면 5층 여관 건물을 금과 보석으로 채울 수 있을 듯했다.
“이거면 충분해.”
사실은 차고 넘쳤다.
‘올 때 크리스티나의 답례품은 꼭 챙겨야겠어.’
동전이 가득 들어간 주머니는 소음 지우는 마법까지 걸렸는지,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 주머니야말로 황금보다 더 귀한 녀석이리라.
그때, 크리스티나가 비행 마법을 걸어주었다.
“걷기엔 불편할 거야. 날아서 가는 게 편하겠지.”
“고마워.”
룬은 크리스티나를 따라서 함께 날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데.’
이쯤 되니 보물섬 관광하는 기분이었다.
황금의 바다와 색색의 보석, 아티팩트 산호. 빛의 축복이 깃든 마도구.
이제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고대금화나 미스릴 동전. 타 종족의 선물.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기록하고 있는 유서 깊은 물건까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눈 감고 물건 하나만 주워가도 작은 성 정도는 우습게 사겠군.’
룬은 자신의 발아래에 대륙에서 가장 값비싼 보물이 몽땅 모여 있을 거라는 추측에 비늘 50개쯤은 걸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크리스티나가 드디어 원하는 장소에 도달한 듯 하강했다.
황금의 대지에서 유난히 동떨어진, 오색 빛깔 돌들이 한 구역을 차지하고 쌓여있었다.
작은 것은 주먹만 했고 큰 것은 얼굴 크기만 한 보석들.
바로 마력석이었다.
부의 향기가 아찔하게 넘실거리는 이곳에서 유난히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다양한 종류의 마력석으로 이루어진 작은 언덕 아래에 착지했다.
“자. 지금부터 마력 감응을 해 볼 거야.”
마력 감응.
마력석에 마력을 흘려 넣었을 때 보이는 변화에 따른 마력 구분법을 뜻했다.
‘원래 내 속성은 어둠일 터. 하지만 이번에 얻은 불의 인장 덕분에 화염 속성도 추가됐겠지.’
그제야 룬은 크리스티나의 뜻을 눈치챘다.
‘……마력 속성 확인이 목적이겠군.’
속성에는 호환 개념이 있다.
가령 어둠의 속성을 지녔다면 차가운 성질의 얼음, 물.
불의 속성을 지녔다면 빛 속성.
이와 같이 타고난 속성에 따라 상대적으로 익히기 쉬운 속성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를 갑작스레 확인하고자하는 이유야 뻔했다.
‘내가 불의 마력을 아무런 저항 없이 융합해버린 탓이겠지.’
크리스티나를 올려다본 룬이 모르는 척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면 돼?”
“여기 쌓여있는 마력석들에 마력을 흘려 넣어보렴.”
룬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무더기로 쌓여있는 마력석 전부에 마력을 주입해보라니.’
그야말로 드래곤이기에 떠올릴 수 있을 법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대범한 방법이었다.
어쨌든 룬 역시 드래곤이었기에 뜸 들이지 않고 바로 시행했다.
우웅!
크리스티나는 룬이 마력을 운용하는 모습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순도 높고 안정적인 마력이야.’
기초중의 기초인 마력의 운용.
그 흐름만 보아도 재능이 있는 자는 눈에 띄기 마련이다.
마력의 질과 양은 물론, 순환되는 흐름의 조화와 풍부함.
거기서 더욱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개개인의 능력은 모두 달라졌다.
‘단순히 재능의 영역? 아니야.’
그런데 저토록 완벽에 가까운 운용 능력이라니.
크리스티나는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꼭 오랜 시간 수련해 온 것처럼 탄탄함이 느껴져.’
드디어 색색의 마력석들이 공명음을 내며 빛을 밝히기 시작했다.
먼저 어둠의 마력석.
뒤를 이어 어둠과 호환되는 물 속성, 인장의 영향을 받은 불 속성.
마지막으로 빛 속성 마력석들도 함께 반짝였다. 불의 인장의 효과도 있겠으나, 크리스티나의 전승 마법이 강한 영향을 준 덕분이었다.
‘뭐, 예상대로군.’
룬이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마력을 거두려 할 때.
갑자기 불이 번져가듯 다른 마력석들까지 빛을 내기 시작했다.
“모든 속성? 어떻게 이런 일이……!”
크리스티나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심상치 않은 크리스티나의 반응에 룬도 덩달아 의아스러워졌다.
“그렇게나 놀랄 일이야?”
크리스티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잠시 침묵 후 크리스티나가 신중하게 운을 띄웠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는 살면서 이런 현상을 본 적이 없어. 그러니 무척 놀랄 일이라고 해야겠구나.”
‘드래곤 로드인 이샤의 힘을 목격한 이후로 이 정도로 놀라본 적이 없었는데.’
적당히 하급 마력석 몇 개가 반응하는 정도라면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이 장소에 있는 마력석들은 전부 최상급, 전설급의 마력석들이었다.
크리스티나는 경탄을 금치 못한 이유였다.
‘저 콧대 높은 마력석들이 제 주인이라도 만난 듯 호응하다니…….’
잠시 후 크리스티나가 손을 흔들자 룬의 마력에 반응한 마력석 중 일부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자, 주머니에 넣어가렴.”
“그래도 돼?”
“그럼. 처음부터 네 마력에 반응한 것들은 모두 주려 했단다.”
‘그 말은…… 여기 있는 마력석 전부 내 것이라는 뜻이잖아.’
룬은 총천연색으로 알록달록 빛나는 마력석 언덕을 바라보았다.
38화 레드 드래곤의 레어
‘전부 가져갈 수 있으면 좋았을걸.’
크리스티나가 선점해 준 마력석이 적은 건 아니었다.
언덕 째로 주머니에 넣을 수 없는 게 내심 아까웠을 뿐.
그 눈빛을 읽기라도 한 듯 크리스티나가 웃음기를 드러냈다.
“페르디키온의 레어에 다녀오는 동안, 다른 마력석은 네 방에 넣어둘게.”
“그래주면 고맙지.”
룬은 자신의 주머니를 꺼내 열었다.
“사양 않고 감사히 받을게.”
통 큰 그녀의 후원에 한 번 더 고마움을 전했다.
그러자 공중에 있던 마력석이 모두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좀 빵빵해진 느낌인데.’
안타깝게도 주머니 속 공간엔 한계가 있었다.
“참, 네가 모든 속성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은 당분간 비밀로 해 두는 게 좋겠구나.”
“왜?”
‘굳이 드러낼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감출 필요까지는 없다고 여겼던 룬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아직 어린 네가 그만한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탐낼 자들이 있기 때문이야.”
“탐을 내다니. 누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남이 가진 힘마저 손에 넣으려는 자들.”
“…….”
룬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권력을 이용해 제 뜻대로 남을 발아래에 두고 부리려는 자들.
자신보다 강자라면 허리를 굽히고 바닥을 기지만, 약자에게는 가혹한 자들.
혹은 자신은 약자이니 힘을 가진 자가 당연히 내놓아야 한다는 이들.
열거하자면 온갖 피곤한 놈들이 많았다.
“나중에 성체가 되었을 때라면 모를까, 어린 네게 그런 추악한 탐욕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 무엇보다 너는 충분히 강하단다. 모든 힘을 드러내지 않아도 원하는 일들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조곤조곤 말하는 크리스티나의 푸른 눈동자에 현기가 어려 있었다.
“게다가, 감춰둔 힘은 나중에 비장의 카드가 되기도 한단다.”
이는 아마도, 그녀 역시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몸소 깨우친 교훈이었을 터다.
“……가르쳐줘서 고마워. 유념할게.”
화려하고 달콤해 보이는 열매일수록 원하는 자들이 많은 법.
희소성이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그 사실을 아직은 모를, 어린 해츨링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크리스티나는 룬을 이 자리에 데려왔으리라.
그가 주머니를 잘 갈무리하는 모습을 지켜본 크리스티나는 다시 이동마법으로 장소를 옮겼다.
팟!
“어! 아우님. 다녀왔나?”
‘이건 무슨 상황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