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242)

페르디키온이 팔짱을 끼고 태연히 흑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흑미와 그 옆에 있던 백야의 얼굴에는 그을음이 살짝 묻어 있었다.

제 코의 검댕을 팔로 슥슥 비비던 흑미가 활짝 웃으며 팔을 벌리고 룬에게 달려왔다.

“룬 님!”

“삐?”

“……얼굴들은 왜 그러냐.”

룬은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달려드는 흑미를 받아주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흑미가 룬의 목을 꼭 끌어안은 덕분에 포기해야했지만.

“펠. 무슨 일이니? 타는 냄새가 나는구나.”

크리스티나의 질문에 페르디키온이 팔짱을 풀었다.

“불의 마력을 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자 뒤에서 룬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이 녀석들한테?’

백야는 불사조의 새끼니 이해가 갔다.

하지만 흑미에게 불 속성 친화력이 있다는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네가 불의 인장을 흡수한 직후, 저 서번트 녀석에게서 미약하게나마 불의 기운이 느껴지더군.”

페르디키온의 설명을 들으며 룬은 흑미를 곁눈질했다.

그 순간, 흑미의 귀가 뒤로 접혔다가 펴지며 페르디키온을 손가락으로 척 가리켰다.

“맨티코어!”

‘맨티코어면…… 전갈 꼬리를 휘두르는 대형 몬스터?’

워낙 포악하고 강력한 개체라 알려져 있는 몬스터였다.

그런 흉포한 몬스터를 페르디키온에게 비교한 흑미가 흥! 하더니 중얼거렸다.

“나빠요!”

“…….”

‘욕한 거였냐.’

페르디키온이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픽 웃었다.

“아직 미숙한 서번트라 해도 가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해서, 아우님을 위해 약간 가르쳐놨을 뿐이야.”

‘역시 페르디키온. 어린애라도 가차 없군.’

룬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도와주려고 했다는 건 고마워. 그래도 어쨌든 내 권속이니까 나한테 먼저 말하고 했어야지.”

“동의는 그 녀석에게 직접 구했었다.”

“흑미에게 직접?”

이건 또 무슨 소리냐고 돌아보자, 흑미가 입술을 부하게 내밀었다.

“룬 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에요.”

한마디로, 페르디키온은 흑미에게 생긴 불의 마력을 잘 다룰 수 있도록 가르쳐주었지만 다소 거친 방법을 쓴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 최소한의 동의는 구했다는 말.

양쪽의 생각을 모두 알게 된 룬은 빠르게 정리했다.

“형, 내가 만일 형의 레어 주민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면 형에게 허락을 먼저 구할 거야. 특히, 그 대상이 어려서 사리분별이 약한 경우라면 더욱.”

페르디키온은 팔짱을 끼고 딱딱한 얼굴로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곧 나름대로 수긍한 건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은 뜻이 있다한들 분별력이 약한 존재에게 의사를 확인한다는 점에선 배려가 부족했군.”

‘호오. 십 년 동안 녀석도 꽤 다듬어진 모양이군.’

페르디키온이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굽혀준 덕분에 얘기가 잘 통했다.

룬은 그의 배려에 대한 감사를 덧붙였다.

“응. 그래도 따로 신경 써 준 부분은 굉장히 고맙게 생각해.”

“흠. 알면 됐다.”

‘페르디키온 녀석은 이거면 됐고.’

뿌듯함을 숨기지 못하는 단순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흑미.”

“네!”

당돌하게 대답하는 흑미에게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었다.

“앞으로 처음 겪는 상황에 대해서는 무조건 나한테 물어볼 것.”

“알겠숩니다!”

“그것만 잘 하면 돼. 나머지는 잘했다.”

어차피 지금은 뭐가 좋은 거고, 나쁜 건지 잘 모르는 시기인 게 당연했다.

‘잘했다’는 말에 칭찬을 받았다고 느낀 흑미가 헤헤거리며 볼을 부비적거렸다.

와중에 털 끝 하나 타지 않은 하얀 백야는 아무 생각 없이 근처에 있던 라이를 부리로 쪼아보는 중이었다.

“자아. 슬슬 떠날 시간이구나.”

이제까지 끼어들지 않았던 크리스티나가 단번에 주변의 시선을 모았다.

자연스럽게 인솔 담당이 된 페르디키온이 흑미와 백야, 룬을 확인했다.

크리스티나는 품에서 통신용 마력석을 꺼내 룬에게 건네주었다.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언제든지 사용하렴.”

평소에는 통신만 가능하지만 긴급 시 크리스티나의 레어에 단번에 이동이 가능한 마력석.

익숙하지만, 그녀의 염려가 담긴 귀한 물건이었다.

“응. 다녀올게.”

룬은 마력석을 꼭 쥐었다가, 이내 품속에 갈무리했다.

이제 이 금빛의 온화함 가득한 레어를 떠날 시간이었다.

“떠나는 이들에게 빛의 축복을.”

크리스티나의 축언이 그들의 머리 위에 별가루처럼 부서져 내렸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페르디키온이 가볍게 손을 올리며 영창을 시작했다.

화륵!

타오르는 화염이 그들의 몸을 휘감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

타오르는 대지.

유황의 냄새.

용암이 시냇물처럼 흐르는 산.

그 뜨거운 상공에 페르디키온 일행이 나타났다.

“여기라고?”

공중에 뜬 채 펼쳐진 광경을 내려다본 룬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이 공기 중에 생겼다가 연소하여 사라지곤 했다.

‘마을은커녕, 살아있는 생물이 아예 보이지도 않는데?’

다행인 점은 공기가 끓는 듯한 이 상황에 고통을 호소하는 자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불의 축복을 받지 못한 평범한 생명체는 이 장소에 나타난 순간 뼈째 녹아버렸으리라.

“제대로 온 거 맞다.”

룬은 물론이거니와 백야와 흑미조차 의문스러운 시선을 교환했다.

그에 대한 답으로, 페르디키온은 용암이 부글거리는 분출구를 가리켰다.

페르디키온의 비행마법이 발동하면서 저항할 새도 없이 일행은 동시에 용암 분출구를 향해 저절로 날아갔다.

“들어간다. 자신 없는 녀석들은 코를 막아.”

철퍽!

반강제로 꿀렁거리는 마그마 속에 빠지게 된 룬은 열기와 눈부심에 얼굴을 찡그렸다.

‘여름철 계곡물에 입수하는 놈들이냐고.’

하지만 굳이 입을 열었다가 용암을 한 사발 들이킬 필요는 없었으니 얌전히 침묵했다.

곧 발아래 거대한 이동 마법진이 보였다.

‘저게 레어 입구인가.’

마법진의 굵직한 문양은 글자임과 동시에 마력을 짜임새 있게 엮은 수식이었다.

화악!

화려한 불빛이 그들의 몸을 감싸며 마법진 너머의 세상이 펼쳐졌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화강암으로 지은 넓은 홀이었다.

조금 전의 열기 탓일까.

볼을 스치는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질 만큼 이질적이었다.

‘여기가 불의 성지라고 일컬어지는 페르디키온의 레어.’

바싹 마른 공기 중에 섞인 미미한 타는 냄새.

그리고 강력한 불의 기운이 느껴졌다.

창으로 보이는 하늘은 회색 구름이 낀 듯 드문드문 뿌연 연기가 보였다.

“여긴 내 개인 공간이야. 하지만 다른 녀석들을 부르기 전에.”

페르디키온이 감춰왔던 비밀을 알려주듯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디인데?”

딱히 거절할 만큼 피곤한 상태도 아니었기에 룬은 가볍게 되물었다.

“위대한 장인의 대장간.”

“위대한 장인의 대장간?”

이름부터 범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페르디키온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레어에서 가장 뛰어난 ‘위대한 장인’ 칭호를 가진 대장장이의 대장간이다. 어렵게 생각할 건 없어.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무기제작자를 보러 간다고 이해하면 된다.”

‘명인이라는 소리였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흠흠, 하며 헛기침을 한 화룡족의 꼬마가 은근한 눈치로 말을 덧붙였다.

“내가 직접 뽑는 ‘장인 대회’ 우승자만이 ‘위대한 장인’이라 불리지.”

“호오.”

인재는 소중했다.

심지어 룬은 드래곤이 사용 할 수 있는 무구를 제작 할 최상의 재료까지 가지고 있었다.

마침 그의 아공간 주머니엔 크리스티나가 챙겨가라고 넣어 준 마력석들이 가득 했으니까.

“룬, 전쟁은 강대한 드래곤조차 비참하게 만든다.”

페르디키온의 얼굴에 사뭇 진지함이 어렸다.

“넌 아직 어려서 실감나지 않겠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 마족과의 전쟁에서 많은 드래곤들이 목숨을 잃었던 시기가 있었다.”

마족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일삼았던 시기.

페르디키온의 나이라면 전쟁이 휩쓸고 간 잔재를 목격했을 시기였다.

그때를 상상한 건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들의 강함만을 믿고 있던 드래곤의 방심이 부른 결과였지.”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전생의 이무기 역시 같은 이유로 생을 마감했으니까.

룬은 미련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오만이었지. 고작 인간의 손에 죽으리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었으니.’

무기를 들었든, 비겁한 수를 쓰든 그게 어쨌다는 건가.

목숨을 잃으면 끝인데.

“하지만 뛰어난 무구로 너와 네 권속들의 생명을 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언젠가 너도 어둠의 일족들을 지키고 보호할 자가 될 터.”

그가 상념에 빠진 사이 페르디키온의 말이 이어졌다.

“일족과 스스로를 지키는 것. 그를 위해 무구를 갖추는 건 일족의 장로로서 가장 선행해야 하는 일이지.”

39화 이분은 누구십니까?

페르디키온의 생각이 짐작되었다.

언젠가 어둠의 일족들을 이끌어야 할 룬과 그를 보조해야 할 흑미.

그는 레어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을 통해, 그들에게 장비를 마련해 줄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티나가 장 구경을 해보라 한 것도 같은 이유였겠군.’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무구장인들이 있는 곳인 만큼, 룬 역시 좋은 무기를 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르디키온이 흑미와 백야를 돌아보았다.

“지금 갈 대장간의 주인은 이 녀석들의 무구도 제작 가능한 장인이니, 사양 말고 고르도록 해라.”

“나야 좋지. 고마워, 형.”

“고맙습니다!”

룬의 눈치를 본 흑미가 냉큼 감사 인사를 했다.

“큼, 뭐 이 정도 가지고.”

어딘지 만족스러워 보이는 페르디키온의 영창이 시작되고 다시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도착한 곳은 투박한 돌이 깔려있는 광장의 분수대 앞이었다.

깡깡!

치이익.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와 뿜어져 나오는 증기.

탁한 흑맥주와 기름진 고기냄새.

여기저기서 쇳물이 끓고 망치질 소리 또한 요란했다.

석재 건축물, 진흙과 마른 짚으로 지은 다양한 건물에서는 대장간 특유의 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유난히 키 작은 주민들은 하나같이 자재나 곡괭이 따위를 들고 돌아다녔다.

광장이라기보다는 장인들의 건축물 전시장에 온 것 같았다.

“좋은 마을이네.”

진심이 섞인 말이었다.

환경이 풍족해 보이는 건 아니지만 하나같이 듬직한 자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나이에 관계없이 열정과 씩씩함이 느껴졌다.

우직해 보이는 그들은 하나같이 근육이 탄탄하고 건강했다.

“그래. 함부로 들락거리는 놈들도 없고. 저들끼리 살기 꽤 좋은 곳이지.”

‘하긴 들어오는 길이 그 모양이니.’

용암이 끓는 입구라니. 살기 좋은 곳 가려다가 저승 건너기 딱 좋았다.

“와! 다들 흑미처럼 쪼그매요!”

흑미가 가리킨 자는 성인의 반 정도 되는 키에, 덩치가 제법 있고 청소년기에 접어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제 몸보다 크고 무거운 석재를 들고 어딘가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내 레어에 있는 주민들은 모두 드워프 종족이다.”

“드워프요?”

어리둥절해하는 흑미에게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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