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242)

“대지와 불의 친화력이 강한 족속들이지. 전쟁 때 이 레어에 터를 만들고,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는 나의 레어 주민이다.”

“와아!”

겉으로는 별 말 하지 않고 있지만 신기한 기분인 건 룬도 마찬가지였다.

‘묘한 종족이로군.’

선이 굵은 다부진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빛에선 고집이 느껴졌다.

대부분 덥수룩한 수염을 길렀고, 두꺼운 팔과 다리를 지닌 난쟁이들.

어떤 드워프는 배틀액스를 등에 메고 다니기도 했다.

“이쪽이다.”

백야가 갸웃하더니 흑미의 머리위에 내려앉았다.

룬 역시 둘의 기척을 확인하며 페르디키온을 따랐다.

널찍한 대로변이라 구경하는 맛이 쏠쏠했다.

원래 지나야하는 길인지, 일부러 거리를 자랑하고 싶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는 대충 알겠군.’

무기, 액세서리, 갑옷 등 만드는 품목이 정해져 있는 가게.

수제주문제작 간판을 걸어놓고 있는 전문점.

대장기술과 관련 없이 운영 중인 가게는 식당과 술집, 그리고 잡화점 정도였다.

‘공예품보단 실용적인 물건이 많네. 무기라든가, 무게추 역할을 하는 폼멜이라든가.’

주민들의 복식도 아름다움보다는 편한 활동성에 중점을 맞춘 저렴한 몬스터 가죽 재질이었다.

‘그 와중에 잘 만들기는 했다만.’

소재가 가죽일 뿐, 다듬는 솜씨가 하나같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데 차분히 주위를 살필 수 있는 것도 잠시, 드워프들의 시선이 점차 일행에게 집중되었다.

애초에 튀는 외형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겠군.’

페르디키온을 알아본 이들의 반응은 놀란 토끼 같았다.

화들짝 놀라 하나같이 시선을 내리거나, 고개를 푹 숙이는 행동.

‘이 녀석을 두려워하고 있어.’

페르디키온의 표정을 살피니 웃음기 하나 없는 바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자재를 가득 메고 가던 드워프가 둘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뭉툭한 코에 주름살이 파인 얼굴.

우락부락한 덩치를 가진 그가 제 짐을 옆에 내렸다.

“허허. 페르디키온 님 아니십니까!”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여기 있었나, 베르딘.”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드워프는 굳은살이 맺힌 짧은 손을 자신의 배 앞에 두고 허리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지금은 왕궁에 들어와 있지만, 베르딘 역시 실력이 뛰어난 대장장이다. 특히 그가 만든 대지를 가르는 창, <블라디메리>는 무척 인상 깊었지.”

“허허,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제 혼을 담아 만들었지요!”

손을 모으고 기분 좋게 웃은 베르딘이 룬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못 뵈었던 손님이신데, 이분은 누구십니까?”

“일전에 언급했던 블랙 드래곤 해츨링. 룬이라고 한다.”

“! 그렇다면…… 페르디키온님의 형제나 다름없다던 그분이십니까?”

베르딘은 문득 뭔가를 깨달았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더니 황급히 룬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엄연히 페르디키온 님과 불을 나눈 형제이신데, 바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불의 인장을 받은 걸 알고 있군.’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나중에 물어보면 될 일.

룬은 우선 베르딘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반갑다.”

룬의 대답에 베르딘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저는 드워프 왕궁 대장간에서 일하는 ‘베르딘’이라 합니다.”

베르딘은 룬에게도 페르디키온에게 보였던 것과 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런 베르딘을 페르디키온이 눈짓했다.

“드워프족 중에서도 질 좋은 무구를 만들어 내는 녀석이다. 왕실 전속 대장장이기도 하니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맡겨 봐도 좋겠군.”

그 말에 룬이 다시 베르딘을 보자, 그가 단단한 손으로 제 가슴을 탕탕 쳤다.

“무엇이든 맡겨주십시오! 영광으로 받들겠습니다.”

‘왕궁 소속이라. 일단 무기는 위대한 대장간에 맡기면 될 테고.’

잠깐 고민하던 룬이 양 손을 벌려 크기를 가늠해 주었다.

“이 정도 되는 식칼이 필요해.”

“식칼이군요! ……식칼이요?”

당황한 베르딘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러자 페르디키온이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퍼뜩 정신이 든 베르딘은 허리를 과장되게 푹 숙였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도마랑 밀대. 소재는 마력의 손실을 가져오지 않는 걸로.”

“!?”

꼴깍.

마지막 말에 베르딘이 목을 울럭이며 침을 삼켰다.

룬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진 베르딘은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중얼거렸다.

고개를 든 그의 눈빛에 호기심과 진지함이 뒤섞여있었다.

“알겠습니다. 만들어지는 대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베르딘.”

“예!”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베르딘의 대답에 페르디키온이 고개만 까닥이며 말했다.

“이번 <장인 대회>의 결승, 이 녀석이 심사할 거다. 출전한 놈들에게 일러둬라.”

“……?”

룬이 의문 섞인 시선으로 페르디키온을 보았지만 둘은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외람되오나 이번엔 페르디키온 님이 아닌, 룬님이 ‘과제’로 선출되신 겁니까?”

“그래. 이 녀석이 이번 <장인 대회> 결승에 제출될 ‘최종 과제’다.”

“!”

베르딘의 눈빛이 변했다.

그의 부리부리한 눈이 룬의 전신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이제껏 눈도 마주치지 못한 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집중력이었다.

“검이라면 신체 밸런스에 맞는 길이가……· 무게는 이 정도…… 장신구도 너무 커선 안 되겠어…….”

혼자 빠르게 중얼거리기 시작한 베르딘을 내버려두고, 룬이 페르디키온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 시선에 담긴 의문을 느끼고 페르디키온은 어깨를 한 차례 으쓱였다.

“마침 이번 대의 위대한 장인을 뽑는 대회가 열리고 있다. 그리고 방금, 이번 결승 최종 과제 주제는 ‘블랙 드래곤 해츨링의 장비’로 결정했지.”

대충 상황이 보였다.

베르딘의 반응으로 보아 원래는 ‘페르디키온의 장비’가 결승 주제였으리라.

이번 대 위대한 장인을 뽑는 대회이니만큼 치열한 승부 끝에 결승까지 남은 장인들의 실력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경쟁심까지 불타고 있으니 전심전력으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려 들 터.

상황을 파악한 룬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백야와 흑미도 ‘과제’로 추가하고 싶은데.”

“삐이……?”

“저요?”

백야와 흑미가 나란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작 말을 꺼낸 룬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기왕이면 이 녀석들도 좋은 장비를 가지는 게 좋지.’

페르디키온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들었나? 베르딘.”

“똑똑히 들었습니다. 출전하는 장인들에게 확실히 전하겠습니다.”

‘잘됐군.’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이 만든 무구를 쥘 기회.

놓치기엔 아까웠다.

갑작스레 과제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접할 장인들의 곡소리가 들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룬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한편, 베르딘으로서는 여러모로 아쉬운 게 많았다.

‘새로운 결승 과제가 되신 분들의 취향은 어떨지. 또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지만…….’

괜히 욕심을 부려 룬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캐내려 시도하려다가는 페르디키온의 심기를 거스를 터.

베르딘은 입맛을 다셨다.

‘아직 미공개 정보인 만큼, 사적으로 알아보려는 행위는 대회 공정성에 어긋난다.’

“하면, 간단한 외적인 정보만이라도 전달해야 하니 간단히 스케치만 하겠습니다.”

그는 양해를 구하고는 최대한 빠르게 룬과 흑미, 백야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그리고는 페르디키온의 심기를 살피며 그가 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제안했다.

“조만간 인사드릴 자리가 있기를 바랍니다. 개혁파 장인과 전통파 장인들 모두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그 말에 페르디키온이 눈가를 꿈틀, 찌푸렸고 베르딘이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잠시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다행히 페르디키온이 대꾸함으로서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식사 자리는 조만간 마련하지.”

“감사합니다.”

다행히 베르딘은 제법 눈치가 있는 편이었다.

그는 더 이상 무언가를 시도하지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 인사를 했다.

“그럼, 평안한 오후 보내십시오.”

베르딘은 지고 왔던 자재들을 다시 들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드워프들과 영 편한 분위기는 아니로군. 사연은 대충 알고 있지만.’

페르디키온이 드워프들이 사는 땅의 주인이기도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저 건장한 자의 태도는 어색함을 넘어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우리도 가지. 대장간이 금방이다.”

고개를 끄덕인 룬이 흑미와 백야를 챙겼다.

함께 걷기 시작한 룬이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베르딘이라는 저자가 나에게 불의 인장이 있다는 건 어떻게 눈치챈 거야?”

“저놈뿐 아니라, 어지간히 실력 있는 녀석들이라면 알아볼 확률이 높다. 마력석을 제련하다보면 저절로 불의 마력에 민감해지는 모양이니까.”

멀리 보이는 거대한 대장간으로 시선을 던진 페르디키온이 말을 맺었다.

40화 재주는 드워프가 넘고

“게다가 베르딘은 왕궁 대장장이로서 네게 줄 불의 인장을 만들 때 도움을 준 놈이기도 하지. 그 점도 한 몫 했을 거다.”

“그랬구나.”

대충 납득한 룬의 시야에 문득 흑미가 들어왔다.

흑미는 백야를 머리 위에서 내려 품에 안고 부지런히 따라오는 중이었다.

이제 보니, 페르디키온이 흑미의 속도에 딱 맞춰서 걷고 있었다.

그를 본 룬이 내심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처음 봤을 때는 백야에게 그렇게 날을 세우더니, 이젠 배려하는 법을 알게 되었군. 고작 10년 사이 많이 바뀌었어.’

다만 드워프들에게는 예전 페르디키온의 모습만 기억에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전 왕궁 대장장이라는 베르딘과 대화하는 동안 다른 드워프들은 대로변에 주르륵 비켜 서 있었다.

덕분에 걷는 길은 편했지만, 눈 한번 들지 못하는 그들의 두려움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레어 주민들과의 관계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게 아니었나. 나중에 좀 알아봐야겠어.’

이런 탁 트인 장소에서 물어볼 일은 아니었다. 룬은 피어오르는 의문을 마음속으로 밀어두었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좀 전에 말 나온 ‘개혁파’, ‘전통파’는 또 뭐야?”

“장인들의 고집이라고 해야겠지.”

“고집?”

“드워프들의 제작품과 기술을 바깥세상에도 알리고 싶어 하는 녀석들과, 함부로 유출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쪽.”

쇄국과 개방.

정반대 이념의 두 파벌이 서로 맞서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떤 게 더 좋다고 말하기 어렵겠군. 이건 어차피…….’

“관점의 차이.”

룬이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었다.

태연한 중얼거림에 페르디키온이 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 나이에 맞지 않는 발언이었나, 이거.’

아차 싶어진 룬은 순발력을 발휘했다.

“……라고 크리스티나가 말했던 것 같아.”

다행히도 빠르게 말을 돌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자 페르디키온이 ‘그렇군. 크리스티나 님이라면 그러실 만하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룬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편으로는 좀 우스웠다.

‘내가 이 레드 드래곤 꼬마를 점점 편하게 여기고 있나.’

함께 수업하고, 서로 가르쳐 주며 일상을 보내기도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다고 내 전생에 대한 걸 알게 할 수는 없지. 좀 더 주의해야겠어.’

새삼 다짐하는 룬에게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미리 알아둘 정보가 있다.”

“?”

“<장인 대회>는 내가 10년 전부터 공식적으로 개최한 행사다.”

“형이?”

10년 전이면 룬이 막 수면기에 들었을 때였다.

공교로운 타이밍이라는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페르디키온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네 덕분이지.”

“나?”

“음, 조금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