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242)

“가는 동안 심심했는데 잘됐네. 얘기해줘, 형.”

페르디키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오래 전 드워프들은 더 거칠고, 다혈질인데다 고집이 세고 호전적이었다더군.”

부친 파시야스가 일대를 지배하던 시절.

드워프들은 용마전쟁의 여파로 고향을 잃었다.

살아남은 드워프들이 레드 드래곤의 레어에 피신해 왔으나 자존심 센 그들에겐 이 사실이 굴욕으로 다가왔다.

심지어, 파시야스는 폭력적인 지배자였다.

그들은 장인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기껏해야 피난민, 혹은 무구를 생산하는 일꾼 나부랭이일 뿐이었다.

이는 파시야스와의 약조 탓이기도 했다.

안전한 거주지를 제공받는 대가로 파시야스가 원할 때 무구를 만들어 주기로 한 것이다.

무려 레드 드래곤의 영토에 자리 잡는 대가였으니, 물릴 수도 없었다.

“내가 이 레어를 물려받았을 때, 드워프들의 굴욕감은 더욱 심해져 곪아갈 지경이었다.”

페르디키온은 씁쓸한 눈으로 거리를 둘러보았다.

“하필이면 나 또한 아버지에게 가르침 받은 대로 불의 일족 차기 장로로서 선대와 똑같은 공포 정치를 펼쳐온 탓도 있었지.”

‘그래서 드워프들이 대부분 페르디키온을 두려워하고 있었군.’

미뤄두었던 의문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룬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디키온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룬. 너와 수업을 하다 보니 내 방식을 바꿔보고 싶어졌다. 네가 말한 대로, 드워프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기 위해 고민을 해봤지.”

당시의 어려움을 상기해낸 페르디키온이 한숨을 낮게 쉬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의 곪아버린 마음을 돌리기는 무척 어려웠다. 아니, 오히려 무슨 꿍꿍이냐며 의심하는 자들도 꽤 있었지.”

페르디키온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러다, 드워프들이 가장 되찾고 싶어 했던 장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세워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게 <장인 대회>였다는 거야?”

골목 하나를 지나가면서 느려졌던 걸음에 약간 더 속도가 붙었다.

“그래. 베르딘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그 즈음이야. 다른 드워프들은 1회차 장인 대회를 열 때조차 비협조적이었지. 결과적으로는 성공이었지만.”

‘호오.’

룬은 그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쉽지 않았을 텐데. 대체 어떻게 설득했어?”

“우승 상품으로 내 비늘을 걸었다. 드워프는 불과 광석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자들이라, 드래곤의 비늘처럼 귀한 재료라면 달려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테니까.”

사실 드워프의 입장에서 이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폭력이 아닌 설득을 위해, 드래곤이 드워프를 위한 일을 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여태껏 힘으로 군림하던 레어의 주인이 자신의 신체 일부를 떼어주는 데다, 그게 장인이라면 누구라도 탐낼 재료이니. 반발심을 줄이는 데에 효과적이었겠군.’

생각을 마친 룬은 순수한 감탄을 담아 그를 칭찬했다.

“대단하네, 형. 멋있다.”

“큼. 내게 좋은 아우가 생긴 덕분이지.”

‘겸양도 떨 줄 알다니. 짜식, 잘 성장하고 있군.’

인정받는 기분이 싫지는 않았는지, 페르디키온의 볼이 살짝 상기되었다.

하지만 금세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잘못 봤다고 여길 지경이었다.

“드워프들 중에서도 알 만한 놈들은 다 알고 있다. 내가 아우님 덕에 바뀌었다고. 그들은 네 덕분에 드워프 종족의 긍지를 되찾았다고 생각하고 있지.”

“뭐?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을 자른 페르디키온을 보며 룬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긍지를 되찾아준 은인.

흉포한 레드 드래곤의 생각을 변화시킨 존재.

하지만, 룬은 페르디키온이 차마 말하지 않고 있는 이면을 읽어냈다.

‘폭정을 펼쳤던 페르디키온보다 아무 은원 관계 없는 내가 이곳 주민들에게 더 받아들여지기 쉬웠을 테지.’

사실대로라면 페르디키온의 노력이 빛을 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이제까지의 원한의 상징이자 욕할 수 있는 대상인 레드 드래곤을 그대로 두고, 룬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는 폭정을 했던 대가로, 페르디키온이 시간을 들여 꾸준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페르디키온에게 고마움을 느꼈다면 저렇게까지 두려워하며 피하진 않았겠지.’

그렇기에 페르디키온은 룬에게 불의 인장을 주고 형제로 받아들였다.

드래곤이지만 아직 어리고, 드워프 종족의 호의를 얻게 된 블랙 드래곤 일족의 해츨링.

그가 페르디키온과 불을 나눈 의형제라는 사실은, 드워프들에게 새로운 통치자인 페르디키온을 진심으로 따를 이유가 되어줄 수 있을 테니까.

“고생했겠다, 형. 어쨌든…… 내가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고.”

안타깝지만, 지금은 이 정도의 말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장인 대회>에서 나올 제작품은 물론, 필요한 장비가 있다면 무엇이든 편히 말해라. 단순히 내 호의가 아닌 드워프들의 보답이기도 할 테니.”

‘무구는 물론이고, 잘하면 이 기세로 <폐광 던전>에 함께 입장해줄 드워프 모집도 가능하겠군.’

보은을 위해서라면 꽤 괜찮은 지원자들이 몰릴 듯했다.

페르디키온의 명에 의해 모집하는 것보다, 자의로 호의를 가진 자들로 꾸리는 편이 룬에겐 훨씬 좋았기에 이는 충분히 써먹을 만한 패였다.

“그럼, 지금 만나러 가는 건 어느 파 대장간인데?”

“전통파. 이 뒤에 개혁파의 공방에도 들를 거다.”

“그래?”

문득 궁금해진 룬이 입을 열었다.

“형도 지지하는 파가 있어?”

“나는 딱히 없다.”

페르디키온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들은 가치관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해. 심지어 아주 불같은 호승심까지 지녔다. 술집에서 두 파벌이 맞붙는 바람에 기물파손과 건물 두 셋을 날려버린 일이 있었지.”

때마침 멀리 보이는 대장간 앞에, 드워프 하나가 뒷짐을 지고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는 일행을 보더니 눈을 홉뜨고 문 안쪽에 대고 무어라 고함을 질렀다.

“어느 쪽 편을 들기라도 하면 그 즉시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놈들이야. 그러니 그들 앞에서 어지간하면 상대 파벌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하는 게 나을 거다.”

괜한 불이 붙게 되면 피곤해질 거라는 뉘앙스였다.

‘경쟁 과열현상인가.’

페르디키온의 걱정과 달리, 룬은 이 상황이 꽤 마음에 들었다.

가뜩이나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여 싸움까지 일삼았던 자들이라면 호전적인 성격일 터.

개혁과 전통.

정반대 입장을 취한 대표들의 자존심 대결.

희귀 재료인 레드 드래곤의 비늘까지 걸린 마당이었다.

우승에 따라 세력의 힘과 지지도를 상승시키는 아주 중요한 장일 게 뻔했다.

‘승부욕 강한 자들은 부채질을 해줘야 하는 법이지.’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장인들.

그런 치들일수록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게 되어있었다.

‘우승 판돈을 키워야겠군.’

룬은 자신의 팔목을 슬슬 만지작거렸다.

서열을 가시적으로 세우는 일은 경쟁심을 불태우기 마련이다.

상품이 눈 돌아가게 탐난다면 더더욱.

‘재주는 드워프가 넘고 실익은 내가 챙긴다!’

씨익.

씰룩거리려는 입가를 가라앉힌 룬은 페르디키온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형, 나 제안 하나 해도 돼?”

“해 봐라.”

룬의 제안을 들은 페르디키온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짧게 고민하던 그는 이내, 드워프들에게도 좋은 일이 될 거라며 승낙했다.

‘됐다.’

승부는 드워프들끼리 가르고, 우승상품은 자신에게.

적당히 불쏘시개 역할만 해준다면 알아서들 활활 타올라 좋은 재료와 장비를 뱉어내리라.

***

풀무질과 수차 돌아가는 소리와 누군가 내지르는 고함, 그리고 철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뒤섞였다.

건물 꼭대기까지 올려다 본 흑미가 감탄하여 맑게 외쳤다.

“와. 엄청 크다아!”

“삐잇!”

대장간은 무척 거대했다.

신난 백야가 꼭대기에 꽂힌 깃발까지 날아오를 듯 파닥이다가 다시 흑미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안내를 위해 나온 듯 그들을 무뚝뚝한 눈으로 본 체격 좋은 드워프가 입술을 몇 번 달싹거렸다.

그리고는 생전 해 본 적 없는 걸 해 본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41화 이걸로 해줘

“어서 와라……가 아니고 어서 오십시오! 페르디키온 님, 룬님과 권속 분들. 저는 루베스 대장간의 수석 대장장이 ‘마일 캠버피’라 한다, 아니, 합니다.”

투박하고 거친 목소리.

존댓말이 입에 잘 붙지 않는지 그는 몇 번이나 굵직한 콧망울을 움찔거렸다.

그의 이름은 ‘마일 캠버피’.

드디어 룬 일행은 전통파 대장간 입구에 도착했다.

“그럼, 안에 드시지요.”

수석 대장장이 마일의 권유에 페르디키온은 고개만 까닥이고는 앞서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다.

몬스터의 뿔과 신체 일부를 자재용으로 모아 둔 게 보였고, 양산형 장비도 여럿 눈에 띄었다.

‘장인 대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테고……. 폐광 던전에서 쓸 적당한 장비가 있다면 구비해둬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룬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흥미와 궁금증을 참지 못한 눈을 한 드워프들이 들쑥날쑥 서 있었다.

페르디키온이 그들을 향해 일행을 차례로 소개했다.

“이쪽은 어둠 일족 블랙 드래곤 해츨링 룬. 그의 서번트인 흑미, 백야다.”

이곳에서도 드워프들은 페르디키온과 눈을 마주치려는 걸 피하고 있었다.

대신 룬과 다른 일행들에게는 집요할 정도로 눈을 홉뜨고 바라보았다.

그들이 페르디키온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알고 있어도 막상 그 분위기를 마주하니 다소 어색했다.

‘이런 분위기니 놀라지 말라는 뜻이었군.’

미리 페르디키온에게 드워프족의 과거에 대해서 들어두어 다행이었다.

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나눴다.

‘영 편치는 않네.’

페르디키온을 향한 드워프들의 고까워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공적인 자리라 나름대로 참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어험! 와 봐라. 치수부터 재야한다. 아니, 재봅시다. 마스터 대장장이께서는 손을 놓을 수 없는 작업 중이셔서, 그것만 끝내고 오신다고 하니.”

촤르르.

줄자를 능숙하게 펼친 드워프가 이쪽을 봐왔다.

미리 베르딘을 통해 언질이 들어갔는지, 간단한 상차림이 준비되어 있었다.

문제는 어린애들이 좋아할 맛이 아니었다는 것이지만.

‘말린 육포에 시큼한 치즈라니.’

코가 얼얼한 향과 맛은 둘째치더라도, 아무리 봐도 술상이었다.

백야 녀석이야 어차피 새라서 먹지 않아도 실례가 아니었고, 고기를 좋아하는 흑미는 육포를 탐냈다.

문제는 그였다.

이무기 시절에도 먹을 것에 딱히 구애받지 않았건만, 이건…….

맛이 없었다.

‘최근 몸에 좋고 맛있는 것만 먹고 살았더니. 차이가 더 심하게 느껴져.’

물론 화산지대라는 환경 특성상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으리란 추측 정도야 할 수 있었다.

내심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페르디키온이 왜 요리를 부탁했는지 좀 알겠다. 음식이 퍽퍽한데다 거칠고, 시큼해.’

새삼 느끼지만, 정말 맛이 없었다.

그나마 말린 육포는 훈제향이 배어들어 먹을 만했지만.

룬은 베르딘에게 부탁한 조리도구가 완성되는 대로, 식사 자리부터 잡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였다.

“쿠안 님!”

갑자기 드워프 무리가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마스터 대장장이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죽으로 된 장비꽂이를 찬 그는 온몸을 제련도구로 무장한 상태였다.

“페르디키온 님께서 예까지 오시다니.”

새로 나타난 드워프는 페르디키온을 달갑지 않은 눈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분위기가 어색해질 즈음 형식상으로나마 고개를 까닥, 숙여보였다.

‘은근히 홀대하는 느낌인데.’

페르디키온도 한쪽 눈썹을 꿈틀하기는 했지만, 일단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러자 마스터 대장장이의 시선이 그 옆에 있는 룬에게로 이동했다.

“저는 이 대장간의 주인, 쿠안입니다.”

“반가워. 룬이야.”

“쿠안 님! 여기 기록입니다.”

“흠!”

콧김을 훅 내쉰 쿠안이 종이를 쭉 읽더니 미간을 굵게 좁혔다.

“어둠의 일족 해츨링에…… 마족 서번트, 불사조의 새끼라.”

텁, 파이프를 꺼내 문 쿠안은 습관처럼 불을 붙이려다 눈을 동그랗게 뜬 흑미를 보고 입가를 실룩이며 도로 뺐다.

파이프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버린 쿠안은 종이를 책상 위에 탁 내려놓고 룬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원하시는 무구가 있습니까?”

굵은 통나무 두셋은 이어붙인 것처럼 듬직한 몸집을 가진 그.

뱃속에서 울려오는 목소리가 유난히 두텁게 들렸다.

“가장 잘 만드는 게 뭔데?”

룬이 되묻자, 쿠안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뭐든. 특수 제작도 상관없소.”

과장 하나 없는 진심이었다.

“그래?”

룬은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주문표에 즉시 제작품목을 적어 넣었다.

“종류는 상관없지만 변형이나 수축이 자유롭고, 저 녀석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걸로.”

쿠안은 말없이 주문표를 받아들었다.

룬이 적어둔 품목을 본 쿠안이 눈썹을 꿈틀, 하더니 이를 가죽 포켓 주머니에 접어 넣었다.

“알겠소. 선호하는 재료가 있다면 미리 알려주시오.”

“아, 그거라면.”

룬이 소매를 걷고 손을 본체화했다.

그리고는 가볍게 톡 비늘을 뽑아냈다.

그 순간, 비늘을 들고 있는 룬의 손끝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걸로 해줘. 난 나에게 가장 최적화된 물건을 원하거든.”

공기조차 멈춘 듯 짧은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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