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242)

‘내 나이가 어때서. 원래라면 천 살이 넘었다고!’

억울함에 불퉁한 얼굴을 했지만 앞에는 따끈한 보리색 찻잔이 놓일 뿐이었다.

‘이게 뭐람. 이럴 줄 알았으면 부엌에서 조금이라도 마실걸.’

드워프의 입맛에 맞아야 한다는 생각에 베르딘에게만 맛보게 한 게 실수였다.

‘어린 몸이라 만찬 시작하기도 전에 술에 취하기라도 할까 봐 조심했던 건데……. 지금은 함께 술 한잔했다는 그 동질감이 필요했다고!’

함께 술자리를 하며 나누는 대화는 친목을 쌓기 좋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맛있는 술과 고기를 나누며, 서로의 앙금을 조금씩 풀어가는 작업을 해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첫 단추부터 예상을 벗어날 줄이야.

잔뜩 시무룩해진 흑룡 꼬마를 본 페르디키온이 입 꼬리를 씩 올렸다.

“얼굴 풀어라. 형님에게 눈초리가 영 불손하군.”

‘이놈이 내가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도 모르고.’

술은 권위로 인한 벽을 조금이나마 허무는 수단이었다.

룬은 자신의 계획의 마무리가 보리색 물맛으로 끝난 게 아쉬워 찻잔만 들이켰다.

마침 페르디키온의 옆자리였기에, 그가 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너무 억울해 하지 마라. 첫 술은 같이 마셔 줄 테니까.”

그러자 드워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런 분이셨던가?’

놀랄 일이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설득이 아닌 강압으로 해결하던 그였다.

그런데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웃기까지 하다니!

그들의 머릿속엔 여전히 페르디키온이 자존심을 짓밟던 모습이 남아있었다.

사실 왕궁에서 일하던 드워프들은 페르디키온이 노력하던 모습 또한 종종 지켜봐왔다.

그럼에도 가식일 거라 생각했다.

제 아비의 핏줄이 어디 가지 않을 거라며 혀를 찼다.

얼마 못 가 본성이 드러날 거라며 그의 진심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어린 아우와 함께 식사하는 페르디키온의 모습을 보니 조금씩 다른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생기니 바뀌긴 한 건가?’

그 생각은 곧 지난 십 년간 페르디키온이 꾸준히 베푼 선정과 연결되었다.

‘베르딘이 했던 말이 사실이었나.’

10년 전, 모두가 기피하던 페르디키온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유일한 드워프.

불의 인장을 함께 만들며 페르디키온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던 베르딘.

처음으로 ‘대장장이 대회’라는 걸 연다며 드워프들에게 참가를 설득하는 데에 협조하게 된 베르딘은 드워프들에게 격렬한 항의를 받곤 했다.

그들은 당시 베르딘이 한 말들을 회상했다.

‘이보게들. 페르디키온 님을 미워할 연유야 충분히 있네. 사과도 받아야겠지. 다만 페르디키온 님은 파시아스 님의 폭정을 답습하지 않고자 다짐했네. 그러니 앞으로 그 분이 변하리라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게나.’

‘변화는 무슨. 그럼 왜 제대로 사과를 하지 않는단 말인가! 잘못인 줄 알았으면 마땅히 고개를 숙여야지!’

‘맞네. 베르딘, 자네도 알지 않나. 파시야스가 우리의 아들들을. 아버지들을 본보기로 죽였을 때의 비극을. 모두 두 눈으로 봤잖은가.’

‘아네. 그를 용서할 생각은 나도 없네. 다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제 아버지인 파시야스 님의 입장 탓이네. 페르디키온 님은 아직 해츨링이기 때문이지.’

모두가 보내는 멸시 어린 시선들에도 베르딘의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잘 생각해 보게. 파시야스 님이 군림하던 시절, 우리는 노예 그 이상일 수 없었네. 그런데 아들인 페르디키온 님은 아니네. 변하고 싶어 하시지. 그러니 조금만 참고, 마음을 열어주게나. 그래야 우리 드워프들이 장인으로서 자존심과 권위를 되찾을 수 있어.’

당시 베르딘의 그 주장은 드워프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그 뒤에 장인대회가 개최되고, 폭정이 사라졌다.

베르딘의 마지막 말이 모인 드워프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변화는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네. 페르디키온 님이 성체 드래곤이 되었을 때 이 땅에 살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지.’

비슷한 생각을 한 드워프들이 서로 눈짓을 했다.

그 중 리더격인 드워프가 운을 떼었다.

“이거 참, 페르디키온 님께 좋은 형제가 생기셨군요.”

“?”

‘이건 무슨 상황이지.’

계획의 마지막을 실행하지 못해 아쉬움만 삼키던 룬은 드워프들의 태도 변화에 어리둥절해졌다.

‘술이 잔뜩 들어가 기분 좋을 때 슬슬 작업해보려 했더니.’

무슨 상황인지 몰라 입에 고기만 욱여넣는 룬과 다르게, 페르디키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까지 띄웠다.

“그렇지. 여러모로 고마운 녀석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아직 어린 해츨링이시지만 아주 총명하십니다!”

‘얼씨구?’

드워프들과 페르디키온의 훈훈한 시선이 룬에게로 향했다.

‘술과 고기를 잔뜩 먹여서 그런가?’

룬은 자신이 알고 있는 드워프들의 성향을 되짚었다.

의리가 강한데다 충동적이고 단순한 성질.

의협심이 강해 배신자나 불의를 행하는 자를 용서하지 못하지만 이익에 있어서는 탐욕적인 면이 있는 자들.

‘마음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을 테니, 이익을 따지는 점을 파고들 생각이었는데.’

폭정을 저지른 자는 페르디키온의 아비인 파시야스.

하지만, 그 아들인 페르디키온 역시 아비의 모습을 따랐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변한다 해도 페르디키온과 드워프와 관계는 쉽게 개선될 종류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아비의 재산을 물려받고 싶으면서, 아비의 빚은 물려받고 싶지 않다는 소리로 들릴 테니까.

‘그래서, 앞으로 페르디키온이 통치하면서 생길 이익에 대해 보여주려 했더니.’

고기를 꿀꺽 삼킨 룬이 볼을 긁적였다.

첫 번째 이익, 페르디키온의 의형제인 블랙 드래곤과의 친분으로 얻을 수 있을 비늘 조각.

비록 아직 덜 자란 해츨링의 비늘이라지만 그거라도 얻기 위해서 눈이 뒤집히는 그들을 보았으니 유용한 패였다.

두 번째 이익, 룬이 머무는 동안 맛보게 될 특별한 식사.

요리다운 요리가 없는 드워프들에게 그 식사자리가 좋은 기억으로 남으면, 자연스럽게 호감을 올릴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레드 드래곤이 아무리 증오스럽다 해도, 파시야스보다는 페르디키온이 낫다는 인식.

술잔을 나누는 동안 자연스럽게 파시야스 시절의 생활과 페르디키온이 통치하는 지금의 생활을 비교시켜 줄 셈이었다.

아무리 껄끄러운 자라 해도 페르디키온을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이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테니까.

‘한데, 생각보다 잘 되어버렸군.’

분위기가 바뀐 탓인지, 드워프들은 급기야 룬이 던전에 대해 궁금해 했다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아는 정보를 내세워 자랑까지 시작했다.

“<폐광 던전>이라!”

“몬스터 따위야 별거 아니지. 특히 내가 키워낸 전투 드워프들의 성과는 최고라고!”

그 때, 페르디키온이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도 들었지. 고르반 자네가 이번에 배출한 기수 중 뛰어난 전사가 있다던데.”

“페르디키온 님도 아십니까? 허헛.”

페르디키온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언제부턴가 주민들에 대한 보고를 빠짐없이 탐독한 그는 드워프들이 자랑스러워하는 후위 기수에 대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페르디키온 녀석. 저력은 있었다, 이건가.’

그들의 분위기를 지켜보던 룬은 깨달았다.

원래 착한 사람이 선의를 베푸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최악의 이미지를 고수해온 권력자가 갑자기 진심으로 잘해주면, 금방 평가가 후해진다.

‘하긴. 가진 녀석이 선의를 베풀면 그 자체로 최고의 이익이기도 하니.’

룬은 어깨를 으쓱이며 찻잔을 입에 대었다.

생각보다 차 맛이 좋았다.

술 냄새 풍기는 자리에서 홀로 차나 홀짝이려니 우울해졌을 뿐.

‘쳇. 두고 보자. 나중에는 술을 오크통째로 들이켜 줄 테니.’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한 드워프 왕궁의 만찬.

밤이 깊었고,

술잔을 뺏긴 어느 해츨링의 한도 깊어졌다.

44화 나한테 좋은 게 있어

룬은 매일 만찬을 열고, 드워프들의 입을 황홀하게 만들어 주었다.

불의 영토에서 결코 맛볼 수 없는 천국의 만찬!

그런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며 드워프들은 아예 물밑에서 만찬에 갈 순번까지 뽑아놓고 기다리곤 했다.

“고기에서 어떻게 그런 맛이 나는지!”

“맥주! 신선한 꿀 맥주!”

“샤워크림은 또 어떻고!”

“감자 따위가 그렇게 맛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내 평생 처음 알았어!”

쉬어터진 맥주와 말라비틀어진 빵을 주식으로 삼을 수밖에 없던 그들에겐 색다른 경험이었다.

생맥주와 윤기 자르르 흐르는 고기!

신선한 우유로 만든 소스와 치즈!

풍족한 만찬을 통해 페르디키온과 드워프의 관계도 꽤 순조롭게 개선되고 있었다.

나름대로의 가치관에 따라.

거기에 더해 만찬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이익에 대해 듣고 은근슬쩍 마음을 바꾸는 자들도 생겨났다.

‘페르디키온을 호의적으로 느낀 드워프가 베르딘 말고 더 있었다는 사실은 좀 의외였지.’

그간 페르디키온의 행실을 눈여겨 봐온 드워프들이 이 기회에 제 목소리를 높였다.

분위기상 주장하기 어려웠을 뿐, 이젠 그를 두고 성군이 될 재목이라 평하는 드워프가 나올 정도였다.

‘이 땅이 레드 드래곤의 영토인 이상, 제대로 대우해주려는 페르디키온 녀석을 계속 미워만 할 수는 없을 터.’

선대에 파시야스의 폭정으로 가족을 잃거나 불구가 된 자들의 골은 여전히 깊었다.

하지만 선대 시절에 있었던 일과 페르디키온이 주인이 된 지금을 구분하여 생각하게 된 드워프들이 점차 늘어갔다.

한편으로는, 틈틈이 전통파와 개혁파 대표들의 대장간에도 들렀다.

주된 목적은 장인 대회에 출품할 제작물에 대해 상의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가 가져갈 무구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성실하게 출석한 룬의 평가도 제법 좋았다.

거기에 더해 룬은 괜찮은 무구를 발견하면 사비로 사들이기도 했다.

단점이 있다면, 대장장이들이 여전히 룬의 비늘에 대한 탐욕으로 눈을 번뜩인다는 점이지만.

“또 거기 가요? 흑미가 보호해 줄게요! 룬 님 껍질까지 뜯어먹으려는 무서운 아저씨들한테서요!”

“삐! 삐잇!”

“어, 뭐. 고맙다.”

‘어차피 데려가려했다만.’

다행히 불사조의 새끼인 백야와 수인형 마족인 흑미에게 관심이 분산되었다.

특히 흑미의 인기가 압도적이었다.

살가우면서도 쾌활한 성격이 드워프족과 잘 맞은 탓이었다.

게다가 최근엔 육포에 맛을 들이면서 흑미도 드워프들을 곧잘 따랐다.

‘요즘 이가 나려고 그러나. 간지럽다면서 육질이 탄탄한 고기를 씹으려 든단 말이지.’

그런 흑미의 욕구를 충족시켜 준 음식이 바로 육포.

질감에 맛이 들려서 질겅질겅 씹는 걸로 간지러움을 해소했다.

드워프들은 마치 잘 먹는 손주 보듯 흑미에게 육포를 먹였다.

먹성이 워낙 좋아서 육포를 주는 대로 잘 받아먹으니 드워프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했다.

최근 흑미의 동태가 심상치 않은 탓이었다.

멍하니 백야를 바라보고 있다거나, 손이 간지러운지 베개를 벅벅 긁어본다거나.

별안간 우다다 뛰어다니고, 의미 없이 캬앙!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슬슬 때가 됐군.’

흑미의 본능을 강제로 묶어두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곳에서 호의와 신뢰를 충분히 얻었으니, 급한 일은 일단락된 셈.

‘<던전 공략>에 대한 말을 꺼내야겠어.’

드디어 던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시기였다.

룬은 부쩍 바빠진 페르디키온을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 그를 찾았다.

“형.”

“무슨 일이냐, 룬.”

“<폐광 던전>에 가보고 싶어.”

던전이란 말에 페르디키온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사실 이전부터 룬이 던전에 대해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해야 10년생 해츨링.

던전에 보내기에는 너무 어렸다.

“안 돼. 내가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던전이라는 곳이 그리 만만하진 않아.”

‘굉장히 만만해질 예정인데.’

생각은 그랬지만 룬은 미소 지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혼자 가겠다는 거 아니야. 요즘 고르반이랑 우드가 클리어 확률이 제일 높은 팀으로 구성해 준다고 그랬거든. 어차피 거기 몬스터가 아무리 강해도 내 비늘을 뚫을 정도는 아니잖아?”

“……진입자의 능력에 맞춰 생성되는 던전이야. 꼭 그렇다고는 장담 못 해.”

‘쯧, 까다롭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페르디키온이 생각해봐도, <폐광 던전>의 몬스터는 쉬울 수밖에 없었다.

베테랑 팀이 들어갈 경우 광 캐는 시간이 더 걸릴 테니까.

“형이 저번에 그랬잖아? ‘미숙한 서번트라 해도 가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 그건……!”

“해츨링이라고 다를 거 없어.”

페르디키온이 반박하지 못하고 주춤하는 모습을 본 룬이 씨익,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진입자의 능력. 그러니까, 강함의 척도에 따른 던전 몬스터의 난이도 때문에 걱정인 거지? 나한테 좋은 게 있어.”

그는 허리춤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이거 봐, 형. 신기해서 혹시나 하고 챙겨둔 건데.”

주머니를 벌린 룬이 꺼낸 보랏빛으로 찰랑이는 병.

어딘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페르디키온은 룬이 내민 작은 약병을 보곤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물약처럼 보이는군. 대체 그게 뭐기에 그러는 거냐.”

“물약 맞아. 심지어 블랙 드래곤의 저주 비약이지.”

“뭐!?”

페르디키온의 발이 성큼성큼 룬에게 향했다.

뺏으려는 그의 손길을 예측한 룬이 냉큼 주머니에 약을 회수했다.

“안심해. 말은 저주 비약이라지만, 아주 쓸모 있는 약이니까.”

“그게 말이 돼?”

블랙드래곤의 저주.

암 속성 일족의 가장 강력한 능력 중 하나.

지금은 없는 일족이라 해도 과거의 유명세는 그대로였다.

“진정해, 형. 이게 뭔지 들으면 이해할거야.”

“뭐기에 그렇게 단언하는 거냐.”

영 못마땅해 하는 그에게 룬은 즐거운 듯이 말했다.

“<일시적으로 힘이 약해지는 저주 물약>.”

“……!”

“효과는 성체 기준으로 최대 10분. 약의 농도를 조절해서 약화되는 정도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 지속시간은 나 같은 해츨링은 두세 시간 정도고.”

본래는 암살과 포획, 혹은 고문에 최적화된 물약이었다.

“이걸로 힘을 약하게 만들어서 입장 때 난이도를 낮출 생각이야.”

페르디키온이 느끼기에도 좋은 생각이었다.

애초에 <폐광 던전>은 중간마다 등장하는 광석과 마력석이 목적인 던전.

몬스터로 득을 보는 던전이 아니었다.

고민으로 침묵이 길어졌던 페르디키온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약은 얼마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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