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갈 팀원들에게 넉넉히 줄 만큼 있어.”
“알겠다. 그럼 나도 같이 가도록 하지.”
“형도?”
눈을 둥글게 뜬 룬에게, 페르디키온이 단호하게 재차 쐐기를 박았다.
“그래! 왜, 나에게 먹이기 꺼림칙한 약인 거냐?”
“그런 건 아니지만.”
‘약에 대해서는 크리스티나의 정보로도 확인했으니.’
페르디키온이 함께 가는 건 그의 예상 중 하나였다.
이 약을 같이 먹겠다 말할 줄 몰랐을 뿐.
“고마워, 형님.”
“좋아서 가는 건 아니다.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가주는 거지.”
“응. 그래.”
동생이라고 챙기려드는 레드 드래곤 꼬마가 기특했지만, 룬은 그저 시원하게 웃어주었다.
그날, 전투 드워프들에게 특별한 던전 레이드 공고가 돌았다.
***
성 앞 연병장에 드워프 무리가 가득 모여들었다.
서로 밀치고 싸우다가 대기용으로 준 번호를 찢거나, 새치기를 시도하다 얻어터지는 드워프.
시비에 걸려 즉석 싸움구경을 제공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대낮부터 어이없는 광경을 두루 목격한 룬은 창 밖에서 시선을 돌렸다.
“저게 다 내 <던전 공략> 지원자라고?”
“그래.”
페르디키온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왜 저렇게 많이 모인 건데?”
“? 당연하지 않나.”
룬의 물음에 페르디키온이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 공략팀의 보상으로 네가 저녁 만찬 초대권을 걸었잖냐.”
“그거야 우린 비약을 먹고 던전 난이도를 낮출 거잖아. 그렇게 되면 보상을 전혀 기대할 수 없으니까 밥이라도 줘야지.”
“식사만 걸어둔 건 아니었지. 뭐, 이건 정보가 샌 모양이다만.”
여전히 의문스러운 얼굴로 보는 룬에게, 페르디키온이 한숨 섞인 대답을 해주었다.
“공략팀 간식.”
“그거라면…….”
공략팀에게 간식으로 제공하겠다고 적은 ‘꿀과 버터를 발라 구운 감자 요리’가 있었다.
‘그게 왜?’
룬이 생각했을 땐 딱히 정보가 샌다 한들 문제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런 인파를 불러올 줄은 전혀 몰랐다.
“꿀과 버터는 여기서 구할 수 없는 재료니까. 그리고 아우님이 손수 간식을 만든다는데 나도 뭔가 도움이 되어야겠다 싶어서…….”
“싶어서?”
“……다른 던전에서 보상으로 나온 적당히 괜찮은 무기들을 몇 개 걸었다.”
저거다.
룬은 듣자마자 이거다 싶은 느낌이 왔다.
고작해야 특별식으로 모이기엔 너무 많은 수였으니까.
“그 탓이네.”
“아니다! 무기는 공략 시 대여해 준다는 조건이었고, 공략이 끝나면 반환하게 되어 있어.”
“……형. 드워프잖아.”
룬의 눈빛을 받은 페르디키온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래, 네 녀석이 몰랐을 리 없지.’
금속에 대한 욕심만 있으랴.
장비에 대한 욕심 또한 만만치 않은 종족들이었다.
폐쇄적인 드워프족 특성상, 외부에서 만들어진 좋은 장비를 보기 어려웠다.
드워프들이야 자신들이 생산하는 장비가 최고라고 주장하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무기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파시야스에게 도움 받았을 리는 없고, 자력으로 구한 거겠지.’
레드 드래곤 중에서도 천재라고 불린 페르디키온은 강했다.
그런 그가 직접 외부 던전에서 구해온 무구라 하면 한번쯤 만져보고 싶은 욕심이 나는 게 당연했다.
‘이 곳에서 얻을 수 없는 질 좋은 무구 샘플을 자세히 살펴볼 기회인데, 어떤 드워프가 그걸 놓치고 싶겠냐? 고작 간식 때문이라니 무슨.’
어린애다운 발상이라 생각하며 룬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우드랑 고르반에게 전갈이나 보내줘. 계속 저렇게 세울 수도 없고, 심사라도 얼른 시작해야할 것 같아.”
“그래야겠군. 너는 뭐 하고 있을 생각이냐.”
“고생해서 왔는데, 감자칩이라도 만들어주지 뭐.”
‘감자는 소생 마법을 연습하기 편하지.’
몸에 활력을 주는 마력요리인데다, 바삭하게 구운 맛 때문인지 백야가 특히 잘 먹는 특식이기도 했다.
페르디키온은 전갈을 보내기 위해 작은 새 모양의 조각을 꺼냈다.
개혁파 드워프의 발명품 ‘전서구’였다.
새의 붉은 눈은 세련된 커팅을 한 마력석으로, 디자인과 센스를 둘 다 잡은 개혁파 드워프 측의 자신작이었다.
“우드. 고르반. 연병장에 모인 전투 드워프들, 열 세우고 바로 시험 시작해.”
새의 눈이 반짝거리더니 날개를 펼치고 ‘구구!’하는 소리를 냈다.
슈웅.
룬은 빠르게 날아가는 새 뒤꽁무니를 보며 생각했다.
‘흑미가 보면 사냥하고 싶어하겠는데. ……가만, 사냥이라.’
그 순간, 룬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45화 물 만난 물고기
물끄러미 창밖을 살펴보던 룬이 다시 페르디키온에게 시선을 옮겨 운을 떼었다.
“그런데 형. 저 많은 지원자를 무슨 수로 걸러낼 생각이야?”
우드와 고르반이 모인 드워프들에게 거칠게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전서구는 무사히 그들에게 도착해, 눈을 반짝이며 페르디키온의 목소리를 재생시켰을 터였다.
“저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직책에 맞는 일을 하게 될 테니 걱정 마라.”
과연, 그의 말대로 소란스럽던 연병장이 정리되고 있었다.
“이놈들! 빨리빨리 움직여! 발로 궁둥이를 차줘야 말을 들을 테냐?”
“시작도 전에 자격 박탈되고 싶나! 머리통부터 박살나고 싶지 않으면 부지런히 뛰란 말이야!”
어르고 채인 드워프들이 양치기견에 쫒긴 양들처럼 한 곳에 모였다.
곧 빈 공터가 마련되고 실력 검증이 시작되었다.
‘좋아. 흑미 녀석의 사냥 실력을 실제로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야.’
흑미에게는 사냥에 대한 본능만 있을 뿐, 전투경험이 없었다.
무엇보다 애매하게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에너지를 발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전투 드워프들 정도라면 실전 들어가기 전 예비 수업 정도는 되겠지.’
거기까지 계산을 마친 룬이 페르디키온에게 물었다.
“형. 흑미도 저기 끼어도 될까?”
“그 녀석의 실력을 봐두려는 건가.”
“응. 지금이 딱 좋은 기회 같아서.”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다. 우리가 직접 가는 게 좋겠군.”
“알았어.”
룬은 바로 흑미와 백야를 불렀다.
***
“다음 도전자!”
타박타박.
유난히 작고 가벼운 발걸음 소리.
까맣고 윤기 나는 여우 꼬리가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저는 흑미예요!”
까만 여우 귀를 쫑긋 세운 흑미가 한 손을 번쩍 들어 자기 이름을 외쳤다.
앞선 지원자들을 보고 따라하고 있는 모습인데, 보기만 해도 흐뭇한 귀여움을 발산했다.
“허허, 이거 귀여운 꼬마아이가 걸렸군. 봐주기는 할 테지만 위험할 텐데. 드워프 곤란하게 이거 참.”
“어쨌든 상대해보겠다고 했으니 무르면 안 되네.”
고르반의 말에 흑미의 상대가 된 드워프, 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꼬마와 놀아주고 그 감자칩을 한 봉지씩 받을 수 있다니, 시간 좀 때우고 그 유명한 간식거리도 얻고.’
워 해머를 손에 든 드워프가 입맛을 다셨다.
‘고작 간식 따위’라고 여긴 룬의 생각과 달리, 이곳에서 그가 만든 간식은 고품질의 먹거리로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특히 여성 드워프들에게 초인기 품목이었다.
‘얼마 전, 줄리에르에게 감자칩을 선물하고 사귀는 데에 성공한 험프 녀석이 지금은 결혼식까지 준비한다던데.’
특히 맥주와의 궁합이 최고였다던 소문의 감자칩.
말 그대로 인생의 꿀맛을 본 친구의 소식은 그의 질투를 샀다.
또 다른 드워프는 어땠나.
그걸 먹고 나면 저절로 혀가 기름칠 된 듯 달달하게 구른다며 먹은 드워프마다 시인이 되어 맛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이쯤 되니, 소문을 들은 드워프들 사이에서는 암거래까지 성행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제작자인 어린 블랙 해츨링이 언제까지 여기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
지금 먹지 못하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진행자가 외쳤다.
“타스! 흑미! 시합 시작!”
“흐업!”
워해머를 한 손으로 든 타스는 흑미에게 겁을 줄 요량으로 바로 앞의 바닥을 내리쳤다.
콰앙!
묵직한 타격이 연병장 흙바닥을 터트렸다.
“쵸!”
떨어지는 무기 위.
뛰어오른 흑미가 빠르게 공중회전을 두 번 돌았다.
그리고 원심력을 실은 그대로 타스의 왼뺨에 뒤꿈치 킥을 먹였다.
빠악!
“어억!”
쿠당탕!
타스가 꼴사납게 옆으로 나동그라지며 몇 바퀴를 굴렀다.
타격의 반동으로 몸을 공중에 띄운 흑미가 빙그르르 돌아 바닥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그리고는, 검지를 척 세워 타스를 가리켰다.
“아저씨! 탈락!”
“타스 패배!”
“우, 어어!?”
몇 초 후 고개를 든 타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손으로 어긋난 턱을 몇 번 흔들어본 그는 깨진 이빨을 두 개 뱉어내고는 분을 터트렸다.
“흐아아! 히게 훠야! 히럴 리가 없어!”
“쯧.”
한쪽 벤치에 앉아 구경하던 룬이 혀를 찼다.
“형, 드워프들 교육 좀 시키는 게 좋겠어. 적으로 등장하는 게 누구든, 최소한의 실력은 보일 수 있어야 할 것 아냐.”
“네 말이 맞다. 아무리 난이도가 낮은 던전이라 해도, 저런 식으로 굴면 어이없게 죽을 수도 있으니.”
페르디키온의 표정도 영 좋지 않았다. 보아하니, 아무래도 흑미에게 방심해서 당한 드워프들은 조만간 죄다 죽기 직전까지 훈련으로 쥐어짜일 듯했다.
벌써 세 번째.
드워프들은 귀엽고 작은 흑미에게 원 펀치로 당하고 있었다.
지고 나간 드워프가 수치스러움 탓에 흑미에게 당했다고 입을 열지 않은 탓이 컸다.
덕분에 흑미가 강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드워프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어느새 연병장에 모였던 드워프들은 모두 흑미의 상대가 되었다.
‘싸움 센스가 좋군.’
상대가 일방적으로 당하기는 하지만 어떤가.
그들의 실력과 방심이 부른 결과인 것을.
룬은 회복에 유용한 감자칩 간식 분배 고민을 했다.
반면, 페르디키온의 얼굴이 사납게 굳어갈 때마다 고르반과 우드의 누런 얼굴이 허옇게 질려갔다.
“저 새끼, 다음 훈련 때 내가 직접 조져주지……!”
까드득!
고르반의 치아 건강이 염려되는 소리가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흑미는 룬이 있는 곳으로 달려와 두 손을 내밀었다.
“또 주세요.”
“그래. 잘했다.”
룬은 주머니에서 육포 하나와 감자칩 하나씩을 꺼내 손 위에 올려주었다.
“헤헷!”
해맑게 웃은 흑미가 ‘고맙습니다!’라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는 대장간에서 얻은 간식 주머니에 육포를 밀어 넣고, 감자칩은 바로 입 안에 와앙-하고 넣었다.
흑미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뺨에 손을 올렸다.
“맛있어요!”
칭찬과 상을 받은 게 좋았던지, 얼른 연병장으로 뛰어가는 흑미를 보며 룬은 팔짱을 끼었다.
“형님. 던전이 너무 난이도가 낮으면 흑미 녀석의 성에 차지도 않겠어.”
“……그렇군. 육탄전만으로도 이 모양이니.”
페르디키온이 순순히 인정했다.
상대하는 드워프마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 패대기치는 꼴로 만들어버렸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룬 역시 어깨를 으쓱였다.
다음 드워프가 쥐고 나온 배틀 액스의 손잡이가 부러지고, 머리를 바닥에 쳐박히는 것을 본 페르디키온이 이어 말했다.
“차라리 팀원들이 흑미를 보조해주는 쪽으로 가는 게 낫겠다. 팀플레이를 한다 해도 선봉장, 위험한 몬스터를 가장 먼저 상대하는 역할을 맡겨야겠군.”
“동감이야. 그래도 기초는 가르쳐 둘 생각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