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본능으로만 싸우게 되면, 더 강한 강자를 눈 앞에 두었을 때 본능에 따라 도망가게 되니까.’
익숙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전투 자세와 상황에 맞는 기술은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짧은 대화 사이, 너클을 끼고 나온 다음 드워프가 흑미에게 주먹을 잡힌 채 공중으로 휙 떠올랐다.
콰앙!
“크학!”
“캬하하항!”
바닥에 떨치듯 내리꽂은 흑미가 어린 송곳니가 드러날 만치 크게 웃었다.
그리고 룬과 페르디키온, 백야 쪽을 향해 씨익 웃으며 브이 표시를 했다.
‘신났군. 물 만난 물고기처럼.’
룬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어 또 다른 드워프가 휘두르는 채찍을 줄넘기 하듯 빠르게 넘은 흑미가,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뒤를 잡고 허리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우득!
척추 디스크가 걱정되는 소리였다.
흑미는 다시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공중으로 박차 올라 핑그르르 가속도를 붙여 상대의 가슴팍을 발로 내려쳐버렸다.
뒤로 넘어가다 못해 거의 반으로 접힌 드워프가 입에 게거품을 물며 접힌 채 쓰러졌다.
털썩!
“페르난! 패배!”
‘흠. 6연승인가.’
슬슬 횟수를 세는 것도 귀찮아지고 있었다.
허리가 굽은 드워프는 다른 드워프의 부축을 받아 왕궁 의료실로 실려 갔다.
“나이들도 있는데 살살 하라 할 걸 그랬나.”
“아니. 네 서번트는 충분히 봐주고 있다. 의식적으로 한 방에 죽을 만한 부위는 전혀 건드리지도 않고 있어. 제대로 된 실력을 보고 싶다면 차라리 몬스터가 출몰하는 필드에 보내는 편이 나을 정도다.”
페르디키온의 대답대로였다.
수인형 마족의 특성상, 신체 능력이 비범하게 태어난 흑미였다.
진정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목이나 심장을 노렸을 터.
팔이나 다리, 허리 따위가 부상당한 정도로 끝나는 건 상당히 봐주고 있다는 증거였다.
“과자 이따 한꺼번에 주세요!”
이제 흑미는 순번대로 불려나오는 드워프들 두셋씩을 한꺼번에 상대하며 가지고 놀았다.
룬은 제 어깨를 으쓱였다.
‘보고만 있자니 몸이 근질근질하네.’
전투 상대가 눈앞에 있을 때의 그 고양감!
이무기 시절 이후로는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옆을 보니 페르디키온도 손끝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드래곤 또한 훌륭한 상위 포식자.
심지어 레드 드래곤이니 전투를 즐기는 호승심 또한 남다른 종족이었다.
“흑미! 다 했숩니다!”
“벌써 다 했냐. 수고했다.”
결국 연병장에 있던 그 많은 드워프들이 전멸했다.
룬은 흑미가 벌린 간식 주머니에 감자칩을 한 움큼 쥐어 넣어주었다.
“휴! 힘들었다.”
흑미가 과장되게 땀을 닦는 시늉을 하더니 개운한 듯 뿌듯한 얼굴을 했다.
“백야야! 나 봤어? 나 멋지지! 잘했지!”
“삐잇!”
흑미에게 하얀 날개를 펼쳐 보인 백야가 콧노래처럼 울음소리를 내며 흑미 몸 주변을 파닥파닥 날아다녔다.
끝까지 모든 걸 지켜본 페르디키온이 결론을 내렸다.
“전투는 흑미가 맡는다. 함께 갈 베테랑 드워프들은…… 그나마 눈에 든 자가 하나 있었으니. 그에게 던전 안내역을 맡겨보지.”
‘그 녀석인가. 제드 머스킷.’
흑미에게 얻어터지기는 했지만, 일방적이지 않고. 침착하게 반격까지 했던 드워프.
상대와의 힘의 차이를 눈치채고 가장 피해 없이 버텨낸 자였다.
비록 자빠져 패배하긴 했지만, 유들유들하게 엄살을 부리며 피해를 최소화한 녀석이었다.
이렇게 <던전 공략> 맴버가 확정되고, <폐광 던전> 입장 지원자 선별이 끝났다.
탈락하긴 했으나, 한편으로는 흑미를 상대하느라 고생한 드워프들에게 룬은 회복에 좋은 재료를 선별해 샌드위치를 만들어 돌렸다.
확실히 전투에 익숙한 녀석들이라 튼튼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 한 군데씩 부러지고 터져나갔음에도, 모인 드워프 전원이 패배했다는 소리를 듣자 오히려 즐거운 해프닝이 따로 없다는 듯 서로 놀리며 껄껄 웃기도 했다.
“아저씨들, 많이 아파요?”
“뭔 소리냐. 하나도 안 아파!”
“그래, 봐라. 헛차!”
연병장에서 끙끙 거리던 모습을 기억하고 걱정하던 흑미가 그들을 걱정하며 안부를 묻자 호탕하게 대꾸한 그들은 오히려 흑미를 기특하게 여겼다.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전사의 싹이 보인다면서 말이다.
그런 드워프들을 보고 룬은 생각했다.
‘뒤끝 없어서 좋군.’
46화 너, 정체가 뭐냐?
혹여 자기들을 두들겨 팬 흑미에게 괜히 나쁜 감정이라도 가질까 살폈으나, 다행히 그럴 걱정은 없어 보였다.
샌드위치를 먹고 의료실 신세를 졌던 전사들은 해가 질 즈음 무사히 귀가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드워프들은 흐뭇한 얼굴이었다.
그들의 품에는 달달하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감자칩 봉투가 소중히 안겨있었다.
딱 한 명만 빼고.
***
“예에? 저요?”
제드는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황당하게 되물었다.
전투 드워프이기는 하나,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몬스터 부산물을 모으는 일을 주로 하던 그는 기세등등한 전사들 사이에서 자신이 뽑히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던 차였다.
“그렇다네. 이 방에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게나.”
베르딘은 제드를 대기실에 두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대기실.
제드는 눈을 꿈뻑이며 생각했다.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평소에는 성에 얼씬도 안 하다가, 참가상인 감자칩이나 얻어가고 싶어서 끼어든 건데.’
초조함에 식은땀이 났다.
비교적 젊은 그는 개혁파 드워프들 중에서도 새로운 문물에 흥미를 느끼는 드워프였다.
감자칩을 먹어보고 싶은 마음 왔던 그에게, 이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설마 <폐광 던전 공략> 팀으로 뽑힐 줄이야.’
제드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다른 드워프들과 달리, 그는 <던전 공략> 팀에 큰 흥미가 없던 차였다.
‘곧 시장 열리는 날이라 적당히 싸우고 자연스럽게 졌는데. 왜 이렇게 된 거람.’
공략팀으로 뽑혔다고 들었을 때, 제드는 바로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바로 공략팀에게 페르디키온이 대여해주기로 약속한 무구였다.
“아이고, 이 이쁜이! 그래, 내가 널 두고 어딜 가겠냐!”
쪽쪽!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냉큼 집에 데려가고 싶었다.
무기의 이름은 <파라리엄>.
매끈한 손잡이와 머리 부분에 넓은 날이 양쪽으로 달린 배틀 액스였다.
휘두르면 날에 그려진 불꽃 무늬에서 실제로 화염이 뿜어져 나오는 던전의 S급 유물이었다.
그 외에 자잘한 다른 장비들도 하나같이 놓치고 싶지 않은 귀한 보물들이었다.
‘하긴, 이미 이렇게 된 거 포기하기도 아깝고. 어떻게든 되겠지.’
골머리만 앓고 있는 건 딱 질색이었다.
제드는 당장 손 안에 있는 무기를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공중에 펄쩍 뛰며 크게 세로베기를 했다.
촤라락!
화륵!
“캬! 화끈하구만!”
손에 착 감기는 맛이 일품이었다.
제드는 파라리엄을 휘두르거나 손에 걸고 돌리며 화려한 불놀이를 즐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손 잘리고 싶은가봐.”
“히익!”
낯선 목소리에 깜짝 놀란 그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돌아보니 언제 방에 들어온 건지, 검은 머리를 가진 소년이 서 있었다.
“왕궁에서 불장난하다 걸렸다간 손목이 무사하지 못할 텐데.”
“그, 그, 그렇죠! 하하하…….”
‘대체 언제 들어오신 거람!?’
제드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앞의 상대를 가늠해 보았다.
분명 자신보다 자그마한 소년이다.
하지만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눈빛에선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이 있어 몸을 굳게 만들었다.
‘이게 드래곤이란 종족인가.’
제드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난 룬이라고 해.”
“바, 반갑습니다. 룬 님. 저는 제드 머스킷이라 합니다.”
꾸벅, 머리를 숙이며 제드는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이분이 페르디키온 님과 불을 나눈 의형제라던…… 블랙 일족의 해츨링?’
제드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슬쩍슬쩍 룬을 훔쳐보았다.
저 소문의 해츨링이 그가 속한 개혁파 대표인 콰탄의 대장간에 종종 들렸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재료 조달 담당인 제드는 밖으로 나돌아 다닐 일이 워낙 많았다.
덕분에 그를 제대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 특이해 보이는데.’
드워프들 중에서도 감이 좋은 편인 제드였다.
어딘지 모르게 독특한 느낌에 그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문득 그는 블랙 드래곤을 상대로 물건 감평하듯 본 스스로를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한데, 저에게는 무슨 볼 일이 있으셔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평가전 때 넌 흑미와 제대로 싸우지 않고 회피했지?”
‘아이쿠, 역시 들켰었나?’
목이 뻣뻣하게 굳은 제드에게 룬이 쐐기를 박았다.
"마지막에 왜 일부러 나자빠졌어?”
“그야 당연히…… 이길 수 없는 상대니까요.”
“그걸 어떻게 아는데?”
“어, 감이죠. 뭐라 자세히 설명하기 어렵지만요.”
“그랬구나.”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룬이 잠시 후 품에서 만찬 초대권을 꺼냈다.
“던전 공략팀 전원이 모이는 만찬을 생각 중인데. 어때?”
“옙! 좋습죠!”
요즘 드워프들 사이에 성에서의 저녁 만찬이 꿀만찬 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안 그래도 슬슬 출출해지고 있었기에, 제드는 룬의 제안에 반색을 했다.
“이 방은 대기실이니 내일 던전에 갈 때까지 네가 쓰고.”
“내일요?”
“어.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게…… 아, 아닙니다.”
“…….”
룬의 집요한 시선을 받은 제드는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왠지 모르겠지만, 어린 모습에 속아 말실수라도 하면 큰일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짐만 정리해 두고 가겠습니다.”
“그래.”
볼 일을 마친 룬이 밖으로 나갔다.
기척을 살피던 제드는 한참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아! 염통이 다 쫄깃해지는 기분이라 아주 혼났네!”
선명한 붉은 보석 같은 눈이 꼭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표정조차 큰 변화가 없어서 속을 읽기 어려웠다.
“으으, 웬 소름이 이렇게 돋았어?”
제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 팔 언저리를 문질거렸다.
한편, 룬은 방문을 나온 후에도 이상한 점을 곱씹었다.
‘드워프족 중엔 마법을 쓰는 녀석이 없다고 들었는데, 저 제드란 녀석은 뭐지?’
태어날 때부터 마력에 특히 민감한 룬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에 닿아있는 마력의 흔적.
사실은 이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흑미에 대해 궁금한 척 일부러 찾아가 살펴보았다.
그리고, ‘제드 머스킷’은 마법 사용에 익숙한 드워프라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이 나왔다.
‘묘한 녀석이군. 페르디키온은 드워프 중에 마법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없다고 했는데.’
그 사실을 눈치챈 게 자신뿐이라는 점도 묘했다.
심지어 그게 견습 대장장이에게나 시킨다는 재료 수급을 주력으로 하는 드워프라니.
누가 봐도 수상한 녀석이었다.
“재미있네. 너, 정체가 뭐냐?”
중얼거린 룬은 서늘한 눈으로 미소 지었다.
***
“으악!”
다음 날 제드는 유난히 퀭한 얼굴로 눈을 떴다.
그는 얼굴을 손으로 쓸며 끙, 소리를 냈다.
“룬 님이 꿈에 나오시다니…….”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고작 10년생 해츨링이 맞나 싶었다.
천년을 묵어온 드래곤이나 가질 법한 위압적인 시선.
거기에 소름이 돋아버린 게 바로 어제였다.
‘뭐가 잘못된 거지? 만찬이며 전략 회의, 어쩌다 복도에서 스치기만 해도 자꾸 눈이 마주쳤다고……!’
“어휴휴휴.”
다소 방정맞은 깊은 한숨이 이불 위로 쏟아졌다.
제드는 한 순간도 룬의 시선 속에서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집요하게 그를 보는 눈은 때때로 내면을 꿰뚫어보는 기분까지 들었다.
게다가 단 둘만 있을 때는 포식자가 그를 주시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공포를 날 것 그대로 느끼게 만드는 피어(fear)는, 페르디키온보다 더 강렬했다.
‘고작 드워프에게 피어(fear)를 사용하시다니. 날 말려 죽일 셈이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