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룬이 성체 드래곤이었다면 진작 공포로 쓰러졌을 터였다.
어쩌면 그 자리에서 숨이 멎어 죽었을 지도.
드래곤이라는 종의 눈빛은 그런 힘이 있었다.
‘하이고. 잘못 걸렸어, 아주!’
그러면서도 손은 착실하게 장비를 챙겨 들었다.
철로 된 어깨장식과 단출한 아머.
마지막으로 한동안 그의 파트너가 될 배틀액스, 파라리엄을 굳게 쥐고 모이기로 한 장소로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놀렸다.
한편, 룬은 백야와 흑미를 데리고 이동 마법진이 있는 방에 미리 와 있었다.
백야와 흑미를 저들끼리 놀게 놔둔 룬은 페르디키온에게 제드에 대한 의견을 전달했다.
“그래서 제드를 그렇게 쳐다봤던 거냐?”
“뭔가 수상한 녀석이어서.”
룬이 어깨를 으쓱였다.
“형이라면 눈치챌 수 있을 텐데. 전에 같이 수업할 때 기억나? 나한테 마력 실뜨기 가르쳐 줬잖아.”
“물론이다.”
“마력실을 없앨 때 마력이 이어졌던 흔적이 손가락에 남았지. 이런 식으로.”
룬이 한 손을 들어 툭툭 손가락 끝을 몇 개 건드렸다.
“그 제드라는 녀석 오른손에 비슷한 흔적이 보였어.”
확실했다.
마력의 선과 닿았던 희미한 흔적이 제드의 손끝에 남아있었다.
“형도 알지? 단순한 아티팩트로는 그런 흔적이 남지 않아.”
페르디키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드워프가 마법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일은 들어본 적 없는데.”
말하고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저었다.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면 대단한 일일 텐데. 굳이 왜 감추고 다니는지가 궁금했을 뿐이야. 형 말대로 착각일 수도 있지만.”
룬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 녀석을 살펴볼게. 형은 그냥 알고만 있어줘.”
“알았다. 유념해 두마.”
대화가 끝나갈 무렵, 때마침 문이 열리며 제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제드 머스킷, 지금 도착했습니다!”
“아저씨 꼴찌다!”
“삐!”
백야의 부드러운 날개 죽지 밑에 손을 넣고 조물거리고 있던 흑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드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자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제가 좀 늦었습니까?”
“아니. 정시에 도착했다. 가지.”
“옙!”
페르디키온의 명에 제드가 얼른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페르디키온.
붉은 기운이 감도는 마법진에서 뜨거운 화염이 솟아나와 일행들을 삼켰다.
눈을 감았다 뜨자 일행들은 순식간에 <폐광 던전>의 입구에 도착해있었다.
미리 정해둔 대로 룬과 페르디키온은 던전 입장 전에 <약해지는 저주 비약>을 들이켰다.
“으.”
“우욱.”
누구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입을 틀어막은 둘은 같은 생각을 했다.
‘뭐 이렇게까지 써?’
약효는 확실했다.
맛만 따지면 드래곤도 한 방에 보낼 극약이었지만.
“기왕이면 와인이나 과일주스 맛으로 할 수는 없었나…….”
룬은 묵묵히 주머니를 열고 던전에 들어가서 먹을 생각으로 싸온 쿠키를 꺼냈다.
“앗, 초코쿠키! 흑미도요!”
“삐이!”
“아이고, 이게 뭔가요. 냄새를 보니 꽤 좋은 향을 풍기는데 말이죠. 이 제드도 줄 좀 서 보겠습니다요?”
“…….”
가득 머금은 약 냄새 때문에 입을 벌릴 수도 없는 상태.
룬은 말없이 다른 일행들에게도 과자를 나눠주었다.
‘정신력을 깎아서 효과를 보는 셈이네. 빌어먹을, 내가 이 약 다신 먹나 봐라.’
47화 폐광 던전(1)
심지어 슬프게도 룬은 아무도 모르게 페르디키온보다 더 많은 양의 비약을 사용했다.
지식 전승과 언령 마법.
이 둘만 더해도 던전 난이도가 급상승할 게 뻔했으니까.
전투적으로 쿠키를 씹어댄 후, 확실히 약효가 돌았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야 그들은 다시 던전 입구 앞에 섰다.
약과 쿠키를 삼킨 룬은 문득, 입구 양 옆에 조각된 돌 벽화에 시선이 갔다.
‘드래곤과 인간……인가.’
던전의 입구를 사이에 두고 왼편에는 드래곤, 오른편에는 인간 전사를 표현한 벽화였다.
거대하기도 하거니와, 양각과 음각을 모두 섞어 세공한 덕에 더욱 웅장한 위용을 뿜고 있었다.
아마도 먼 옛날, 파시야스가 지배하던 시절 착취당한 드워프들의 노고였을 터.
던전 입구 앞에는 철길이 이어져있었다.
“이 길은 뭐야?”
“드워프족이 사용하는 길이다. 그들은 이 철로를 이용해서 오지. 마법을 쓸 수 없으니까.”
“아. 그렇겠네.”
룬은 대답하면서 제드를 슬쩍 확인했다. 놈은 동요 한번 없이 태연하게 코를 후비고 있었다.
페르디키온이 먼저 발걸음을 떼었다.
“가자.”
“네에!”
“하핫! 잘 부탁드립니다!”
일행을 따라 이동하면서 룬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백야.”
“뺫!”
룬이 눈짓하자 어린 새는 곧장 그의 어깨로 폭 내려앉았다.
“던전에 있는 동안은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만약의 경우가 생기지 않길 바랐지만, 안전은 대비할수록 좋았다.
룬은 백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생각한 바가 있어 데려오기는 했지만 흑미와 달리 별 능력도 없이 삐약거리기만 하는 녀석이라 영 걱정되었다.
“삐잇!”
대답하듯 힘차게 울음소리를 낸 백야는 부리로 룬의 옷깃을 비집고 들어갔다.
요즘 덩치가 꽤 자라서 완전히 숨지는 못하고 동그란 머리를 쏙 내밀기는 했지만.
“입장한다.”
일행이 모두 던전 마법진 위에 올라서자 서서히 풍경이 바뀌었다.
쏴아아-
‘파도 소리……?’
짭조름한 소금향이 느껴졌다.
무너진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멀리서 물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금세 썰물처럼 빠져나가 갯벌을 이루었다.
바닥에서 물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이내 붉은 보석과 광석 같은 돌덩이들이 드러났다.
“아니? 시작부터 운이 좋군요!”
제드가 주변을 보더니 채광도구를 꺼내 바닥에 깔린 돌덩이로 달려들었다.
“무작위로 가끔 등장하는 <바다바위산>이다. 소금석을 노릴 수 있지.”
주변을 둘러보는 페르디키온의 말에는 은은한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바다를 볼 수 없는 화산 지대에서 ‘소금’을 얻게 해주는 귀한 장소.
심지어 아직 몬스터가 출몰하기 전이었다.
“마법석도 좋지만, 소금이야말로 금값이란 말이죠. 히힛!”
조금이라도 많은 소금석을 캐기 위해 제드가 열심히 채광질을 했다.
흑미는 그런 제드의 근처를 경계하며 돌아다녔고, 페르디키온은 검을 들고 룬 근처에서 대기했다.
어차피 얼마 동안 힘도 약해진 마당에 할 게 없는 룬은 느긋하게 그들이 하는 행태를 구경했다.
‘바다 느낌이라 좋네.’
이 세계에서 처음 맡는 바다 공기.
어딘가 그리운 기분까지 들었다.
그때였다.
“온다.”
퍼드덕!
사색에 잠겨들던 그를 깨운 심상치 않은 소리가 있었다.
그 즉시 흑미가 전면으로 나서며 여우귀를 쫑긋 세웠다.
“캬앙!”
-키긱! 끼기긱!
그륵, 쇠를 긁는 듯한 가래소리와 함께 가죽 날개를 가진 그렘린이 서넛씩 무리지어 나타났다.
붉은색, 녹색, 푸른색 등.
크기도 색상도 다양한 놈들이었다.
다만 흑미가 있어서인지 경계하며 주변을 빙빙 돌 뿐이었다.
굵게 주둥이 밖으로 튀어나온 송곳니와 갈고리 같은 손톱에서 탐욕스럽게 뼈와 살을 취하려는 공격 성향이 그대로 드러났다.
특히 룬을 향한 시선은 ‘맛있는 먹잇감’을 보는 듯 했다.
하찮은 취급에 심기가 불편해진 룬이 미간을 구겼다.
그 순간, 흑미가 별안간 자리에서 사라졌다.
-키야악!
팍! 데구르르.
순식간에 붉은색 그렘린의 머리가 맥없이 날아가고, 목이 잘려나간 몸뚱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채 경련했다.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녹색 그렘린이 심장을 꿰뚫렸다.
-큭! 쿠르륵!
눈치 빠르게 도망치려던 파란 녀석은 찌익! 소리와 함께 가죽 날개를 뜯겼다.
툭!
흑미가 뜯어낸 그렘린의 날개를 버리자 제드가 냉큼 달려와 주웠다.
비록 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 그는 몬스터 가죽을 공짜로 구했다는 생각에 흐뭇해했다.
“너희들, 룬 님 노리면 안 돼. 흑미한테 혼난다?”
생글 웃는 흑미의 분홍색 눈동자에 섬뜩한 붉은 기운이 돌았다.
한층 색이 짙어진 눈은 얼핏 보면 핏빛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몬스터들은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움직임을 바꾸었다.
한 놈이 옆에 있던 그렘린을 돌연 흑미에게 밀쳐버린 것이다.
-케엑! 쿠엑?
밀쳐진 놈은 흑미의 손날에 순식간에 세로로 갈라졌다.
그 사이 동료를 미끼로 던진 그렘린들이 룬에게 달려들었다.
“어딜.”
사악!
털썩. 털썩!
단 한 번.
초승달처럼 그어진 검 궤적이 그렘린 무리를 한방에 꿰뚫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강하네, 형.”
“뭘. 별것 아니다.”
말과 달리 칭찬이 나쁘지 않았는지, 검집에 검을 집어넣는 페르디키온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블랙드래곤의 비약으로 능력치가 약화된 탓에 불을 다루는 위력이 약해졌지만, 그를 쓰지 않았음에도 강했다.
검을 다루는 폼이 오랜 세월 수련한 검사처럼 능숙했다.
‘어쩐지 저주의 비약을 마시자고 할 때 거리낌이 없더라니.’
페르디키온은 힘이 사라진 상황에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 이미 알고 있는 자였다.
힘이 비교적 약했던 어린 시절.
그때부터 이 던전을 무수히 다녀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약이 없었다면 오히려 안 왔을지도 모르겠네.’
비약을 먹은 지금도 이 정도라니.
원래의 페르디키온이 함께 왔다면 필시 난이도가 급상승 했을 게 틀림없었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몬스터들이기 때문인지, 다음 층으로 가도 자잘한 놈들이 무리지어 공격해오는 패턴이었다.
꺼지지 않는 불에 휩싸인 나무 몬스터, <파이어 우드>가 나오자 흑미가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캬앙!”
공중에 불꽃이 튀더니 작은 새끼 여우 모양의 여우불이 쪼르르 튀어나왔다.
-케엥!
-켕!
-케겡!
여우불은 달려드는 몬스터에게 붙어 주둥이로 나무를 물어뜯었다.
“어~허어! 가자, 내 이쁜이!”
마찬가지로 불에 익숙한 제드가 나무 몬스터를 향해 S급 도끼 파라리엄을 휘둘렀다.
“헛! 흐엇! 아이고! 흑미 님, 이놈 관심 좀 끌어 주세요! 저기 떨어진 나무는 마력에 변형이 잘 되지 않는 질 좋은 나무라고요!”
……중간 중간 제드가 촐싹거리며 맥이 빠지게 만들었지만, 일처리만큼은 깔끔했다.
게다가 재료 수급을 담당하던 드워프의 본분도 잊지 않았다.
그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틈틈이 떨어지는 마력석 조각과 쓸 만한 자재, 몬스터 사체를 전부 쓸어 담았다.
살육전을 벌이는 흑미와, 최약체인 룬을 노리고 파고드는 놈들을 침착하게 처리하는 페르디키온.
‘쉽네.’
던전 풍경은 흥미로웠고, 룬의 몸은 편했다.
‘나만 보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드는 꼴은 거슬리지만, 이 정도면 곧 클리어 하겠군.’
질리지도 않고 룬에게만 달려드는 집요함은 불쾌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페르디키온은 아무런 방해 없이 그들의 머리통을 검으로 쪼개었다.
“이렇게까지 널 노리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그거야 지금으로서는 내가 제일 약하기 때문 아니었어?”
“아니야. 보통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당하면, 아무리 약하고 머리 나쁜 놈들이라도 무모한 짓은 피하려들기 마련이다. 한데, 이놈들은 지나치게 무리하고 있어. 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