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지,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구겼다가 입속으로 중얼 거렸다.
“목숨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손에 넣고 싶은 게 있는 놈들처럼.”
“!”
문득, 룬은 품에 있는 백야를 내려다보았다.
동글동글한 눈으로 ‘삐?’ 하고 올려다보는 순한 얼굴.
‘설마 백야를 노리나?’
불사조.
신성한 불을 품은 새.
불사조의 눈물엔 정화와 치유 능력이 깃들어있다.
그리고, 불사(不死)의 능력을 가진 유일한 종족이기도 했다.
아직 어려서 한입거리로 보이긴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룬이 미간을 구겼다.
‘감히 누구 밑에 있는 걸 욕심내.’
아무리 위험도가 낮은 몬스터라지만 던전에 있는 전력이 전부 백야를 노리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형, 최대한 빨리 클리어 해야겠어.”
“그래. 안 그래도 곧 던전 보스가 출몰하는 지역이다.”
‘그나마 다행이군. 쉬운 던전이라.’
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만 보면 흑미에게 필요한 사냥 경험을 잔뜩 쌓아주는 데에 성공했다.
더불어 자잘한 자재와 소금석, 양질의 마력석까지 알뜰하게 챙긴 상태.
이대로 무사히 나가기만 하면 완벽했다.
‘이 녀석들이 꽤 강해서 약효가 떨어지기도 전에 끝내게 생겼으니.’
다시 여유를 찾은 룬은 보스를 기다렸다.
‘던전 보스는 바위 골렘이랬지.’
단단한 광물이라 타격이 잘 들어가지도 않고, 불에 타지도 않아 어렵다는 던전 보스.
보상으로 질 좋은 상급 마력석과 광물을 주기에, 드워프들이 노리는 녀석이기도 했다.
페르디키온은 시간이 걸리기는 해도 흑미 혼자서 깰 만한 수준이라 했으므로, 흑미의 마지막 전투 상대로 미리 말을 맞춘 상태였다.
골렘의 약점인 핵의 위치까지 미리 일러주었으니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흑미는 골렘이 출현하자마자 놈이 집어던지는 바위를 날쌔게 피하며 골렘의 핵이 들어있는 머리 부분을 압도적인 무력으로 박살냈다.
“룬 님! 저 잘했죠?”
“오냐.”
한데, 뭔가 이상했다.
보스를 쓰러뜨렸는데 갑자기 던전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캬아앙!”
“!”
“으더더더억!”
심한 진동에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혀를 깨문 제드가 버티지 못하고 땅에 넙죽 엎드리며 아이고, 아이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반면, 페르디키온은 안색을 대번에 굳혔다.
“하필…… 좋지 않군.”
“왜 그래?”
페르디키온은 던전에 입장하고 나서 처음으로 긴장한 얼굴을 했다. 전방을 주시하는 그의 뺨에 식은땀이 맺혔다.
“……매우 드물지만 또 다른 던전이나 보스가 감춰진 히든 던전이 있다.”
“특수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발현된다는, 그거 말이야?”
-스스슷……!
검은 천이 군데군데 찢긴, 뼈만 남은 채 선 해골.
우묵하게 파인 검은 눈구멍에서 녹빛 안광이 번뜩였다.
마치 죽음 위에서 몸을 일으킨 사신을 형상화한 느낌이었다.
페르디키온이 처음 맞닥뜨린 몬스터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우리가 보스라고 생각했던 저 골렘은 그저 문지기였을 뿐. 저게 이 던전의 진짜 주인이다.”
사자(死者)가 원하는 제물.
놈의 눈빛은 명백히 ‘백야’에게 향하고 있었다.
“삐잇!”
백야는 사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냉큼 룬의 품안으로 파고들어 몸을 숨겼다.
‘그랬군. 이 던전이 유난히 쉬웠던 건 이놈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정말 재수도 없었다.
48화 폐광 던전(2)
고작해야 광석 던전에 이런 말도 안 되게 강력한 보스가 잠들어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심지어 그가 나오는 조건은 ‘불사의 능력을 가진 자’와 동행했을 때.
던전이 생긴 이래 지금까지는 깨어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가 잠든 던전에 불사조의 새끼가 함께 들어왔다.
흡수하면 부활 능력이 발동한다는 불사조!
심지어 그를 품은 자는 현재 이 팀에서 가장 약한 생명체였다.
[내놓…아라.]
검게 새어나오는 입김에서 짙은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흑미가 경계하며 털을 잔뜩 세웠고, 제드는 겁에 질린 와중에 그의 배틀 액스를 꼬옥 쥐었다.
마르고 흉측한 뼈가 백야를 가리켰다.
[먹어치워, 생명을, 얻으리라.]
“!”
“생명을 얻어서…… 어쩔 셈이냐?”
페르디키온이 묻자 검은 그림자로 된 사신에게서 스산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삼킨다. 세상을.]
본능일지, 원한일지는 알 수 없지만 노리는 바는 명확했다.
그는 백야를 통해 생명을 얻을 생각이었다.
‘저 사신 같은 놈이 노리는 건 역시 부활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지금은 죽음의 기운을 두른 몬스터일 뿐.
생명이 흘러넘치는 장소에서 제대로 살 수 있는 몸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사조의 심장이라면 강한 생명의 힘을 얻을 수 있을 터.
[내놓아라!]
키이이잉!
죽음이 명령했다.
뇌를 관통하는 이명을 기합으로 버텨낸 페르디키온이 앞으로 나서며 검을 겨누었다.
“미안하군. 영토에 있는 던전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내 탓이다.”
“형.”
“뒤로 빠져있어. 너희들이 감당할 자가 아니다. 이 녀석은……어떻게든 내가 해결하마.”
페르디키온의 눈동자가 흑미를 주시했다.
‘나라면 약효가 사라질 때까지만 버티면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내 아우만큼은 털 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겠어.’
하필이면 지금은 힘이 약해지는 저주에 걸린 상태.
블랙드래곤의 비약 효과가 사라질 때까지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우선 네 서번트와 내가 시간을 끈다.”
“캬앙!”
지목받은 흑미가 페르디키온 옆에 서서 해골 사신을 노려보았다.
[전부 죽어라!]
그때, 해골사신이 기괴하게 몸을 비틀며 팔을 벌렸다.
그러자 새까만 연기가 흘러나와 훅 하고 그들을 덮쳤다.
“! 룬, 숨을 들이키지 마라!”
퍼석!
바닥에 나뒹굴던 바위골렘 조각이 연기에 닿자마자 그대로 녹아내렸다.
부식 저주였다.
페르디키온과 흑미는 몸 주변에 불길을 둘러 연기를 몰아내며 싸우고 있었다.
룬은 둘의 전투를 보며 생각했다.
‘둘이 의외로 합은 잘 맞는군.’
던전에 오기 전, 흑미를 직접 교육시킨 페르디키온의 성과가 빛을 발했다.
룬은 뒤로 빠진 채 둘의 전투방식을 눈에 담아두었다.
“막아야한다, 흑미!”
“컁!”
해골 사신이 손을 크게 휘젓자 검게 물든 창 수십 개가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콰앙! 쾅!
콰드드득!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무수히 내리꽂히는 창을 전부 피할 수는 없었는지, 흑미와 페르디키온은 아예 불을 합쳐 불기둥을 만들어냈다.
화르륵!
푸른색과 붉은색의 불이 뒤엉켰다.
불기둥은 뜨거운 폭풍을 일으켰다.
검은 창을 약화시키는 화염의 폭풍 속에서 페르디키온이 흘려 쳐내고 흑미가 틈을 노려 달려들었다.
시간을 끄는 일조차 버거워 보였지만 어떻게든 버텨내려는 둘의 투지가 대단했다.
그 와중에 피하느라 바닥을 굴러다녔던 제드는 벌떡 일어나 결연한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룬 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어, 어떻게든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요!”
“……너 손 떨고 있는데.”
제드는 달달 떨면서도 배틀 액스를 꺼내들었다.
식은땀이 흘렀지만 손에 무기가 있으니 떨림은 조금 줄어들었다.
“제드 너야말로 무리하는 거 아니야?”
“그, 그야 무섭긴 합니다만.”
밭은 숨을 뱉은 제드가 룬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종족이 다르다지만, 열 살짜리를 앞세울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죠. 이, 일단은 저도 드워프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씩씩하게 말하곤 있지만 제드의 눈은 패배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린 해츨링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웃으려 드는 그를 보며, 룬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래. 고맙다.”
무서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어린 해츨링의 얼굴을 보며 황당해진 제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거참. 긴장 풀리게 하시는 데 재주가 있으시네, 허허. 멋집니다. 역시 간덩이가 아주 드래곤 ……이 아니라. 드래곤다운 배포를 가지셨군요.”
횡설수설 떠들어댄 제드가 룬을 뒤에 두고 배틀 액스를 꼬나 쥐었다.
어쨌든 어린아이가 덜덜 떠는 모습을 보느니, 이편이 훨씬 나았다.
그런 제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룬은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벌써 드러냈어야 했는데. 아닌가?’
모종의 이유로 힘을 숨기고 있었다 해도, 살고 싶다면 알아서 밝히리라 생각했다.
뭔진 몰라도 여기서 죽으면 소용이 없으니까.
어떻게든 제드가 혼자 살아남는다 해도, 페르디키온이 사망할 경우 아들을 잃은 파시야스가 그와 드워프족을 가만 둘 리 없었다.
‘확인할 건 다 했고. 슬슬 시작해볼까.’
힐끗 상황을 보니 페르디키온이 젖 먹던 힘까지 내어 공격을 쳐내고 있었다.
생명력을 흡수하는 검은 구체였다.
그가 분통을 터뜨렸다.
“젠장. 하필이면 그 빌어먹을 저주 약효가 있을 때에……!”
“그러게.”
룬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에 눈을 홱 부라리는 페르디키온을 무시하고, 불룩한 제 품을 두드렸다.
“백야.”
“삐?”
빼꼼.
고개만 내민 새에게 룬이 속삭였다.
“뭐 해? 울어.”
“!”
룬과 시선을 마주친 백야의 눈에 물기가 망울망울 맺혔다.
“피이이…….”
퐁.
영롱하게 빛나는 <불사조의 눈물>이 또르르 굴러 내렸다.
‘좋아.’
시키는 대로 잘도 해내는 어린 새였다.
룬은 손가락으로 그 눈물을 콕 찍어 핥았다.
꿀꺽.
‘만드라고라를 산삼인 줄 착각하고 먹어버렸던 경험이 이럴 때 써먹힐 줄은 몰랐군.’
<불사조의 눈물>이 목안으로 넘어가자, 비약의 저주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화 효과였다.
룬은 서서히 힘이 되돌아오는 걸 느끼며 그가 지닌 어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훅!
그 순간, 공간 전부가 어둠에 잠겼다.
“억!”
“무슨……!”
퍽!
제드의 비명에 막 돌아보려던 페르디키온이 뒷목에 손날치기를 당하고 기절했다.
‘미안, 형님. 아직은 이런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리면 곤란해서.’
뒤통수에 커다란 혹이 생긴 채 기절한 제드와 페르디키온을 뒤로하고, 룬은 앞으로 걸어갔다.
“룬 님……?”
잔뜩 지친 흑미가 숨을 몰아쉬며 룬을 바라보았다.
“수고했어. 뒤는 나한테 맡기고 쉬어.”
“네에.”
마지막까지 사신을 상대하고 있던 흑미는 폴짝 뒤로 물러섰다.
깊은 어둠속 한가운데에 남겨진 검은 해골.
한 맺힌 망자의 존재 따위는 먼지처럼 작고 초라했다.
그때였다.
[크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