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242)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그의 몸이 손 안에 쥐어 터질 듯 쪼그라지기 시작했다.

후욱!

한쪽 두개골이 어둠에 먹혀 사라졌다.

스으으!

팔이었던 뼈가 맹수에게 물어뜯긴 듯 자취를 감췄다.

[크아아아!]

해골의 형체에 까만 점이 우수수 찍히더니 새까맣게 변해 어둠에 삼켜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와작!

망망대해 같은 밤이 죽음을 짓눌렀다.

손 안에서 우그러뜨린 종이처럼 구겨진 해골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이가 가지고 놀다 질려서 버린 장난감처럼.

‘옛날 생각나는군.’

어둠 속에서 이를 지켜본 룬이 한쪽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느리게 웃었다.

흑룡의 이무기.

두려움의 대상이던 그가 철저하게 혼자였던 이유.

그가 다루는 어둠에 공포와 절망조차 삼켜져서 자신을 유지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었기에.

“삐약!”

“……?”

그 순간 작고 하얀 빛이 깜빡였다.

동그란 빛은 날개를 달고 날아와 태연하게 어둠의 머리 위에 앉았다.

추운 듯 몸을 살짝 떤 백야는 흰 날개를 파닥거리며 지저귀었다.

“삐!”

“…….”

룬이 천천히 어둠을 물리자 다시 던전의 구조물이 드러났다.

어둠에 뜯어 먹힌 죽음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너무 시시하게 끝내버렸네.”

“삐이!”

백야가 룬의 머리를 날개로 포닥포닥 쓰다듬었다.

“걱정했다고?”

“삣.”

“별 걸 다.”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룬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근처에 흑미가 보였다. 어둠이 무섭지도 않았는지 태평하게 잠들어있었다.

그는 잠든 흑미를 옆구리에 챙겨들었다.

“으으, 룬니임 흑미 배고파요…….”

제드가 있는 장소에 데려다놓자, 흑미가 입맛을 다시며 널브러져 잠꼬대를 했다.

룬은 미간을 구긴 채 쓰러져 끙끙거리는 페르디키온도 그 옆에 데려다 두었다.

일행을 다 챙기고 나서야, 룬은 엉망으로 찢긴 해골 사신을 뒤적였다.

힘을 잃은 핵이 녹빛의 혼령처럼 맺혀 있는 두개골.

비록 금이 가있었지만 다른 뼈들도 제법 실했다.

‘뭐, 이 정도는 챙겨도 되겠지. 일단은 목숨 값이니까.’

던전에서 얻은 물건은 공헌도에 따라 팀 내부에서 균등하게 분배하는 게 원칙.

룬이 보스의 잔해를 보상으로 가져간다 해도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크리스티나에게 선물 받았던 가죽 주머니를 열어 뼈를 보관했다.

‘써먹을 곳이 있겠지.’

때마침 그의 눈 앞에 정보가 적힌 작은 창이 떠올랐다.

[던전 생성 이후 최초로 등장한 <망자의 혼>과의 전투에서 승리!]

- 아득한 세월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잊어버린 망자.

- 한때 강력한 힘을 가진 초인(超人)이었으나 죽음 속에 오랫동안 잠겨, 원한을 가진 망자가 되었다.

‘이놈 이름이 <망자의 혼>이었군.’

사신이니 해골 따위로 부르고 있었던 룬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뼈의 잔해를 쳐다보았다.

갱신된 정보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언령 <소생> 마법 가능 목록

- 사과

- 감자

- 우유

- 샐러리

- 양파

‘이딴 건 왜 뜨는 거야? 이런 자잘한 건 볼 필요 없어.’

대충 넘겨버리자 맨 마지막 목록이 떠올랐다.

- 절벽 산양

- 망자의 혼 (습득가능)

‘!’

그가 눈을 깜빡였다.

‘이놈…… 내가 살릴 수 있다는 건가?’

룬은 주머니 속을 들여다보며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삐이?”

“아, 그렇지. 수고했다, 백야.”

블랙드래곤의 저주 비약.

만약을 위해 저주를 정화할 수 있는 백야를 함께 데려왔는데 그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해주었다.

흐뭇해진 룬은 상으로 백야에게 그가 만든 감자칩을 물려주었다.

다른 보상 물품을 수거해 던전 출구로 빠져나오자 기절해 있던 일행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으으……. 어디냐, 여긴.”

“끄워억. 드워프 살려……줍세.”

여전히 고롱고롱 코를 골며 자는 흑미를 제외하고, 다들 주변을 둘러보며 일어났다.

먼저 상황을 파악한 건 페르디키온이었다.

“설마, 클리어한 거냐? 히든 던전을?”

“응.”

“어떻게? 분명 그 해골이 내 눈을 멀게 만들고 공격했다. 꼼짝없이 당했다고 생각했는데.”

페르디키온은 설마하니 룬이 공격했으리란 가능성은 아예 떠올리지도 못했다.

실제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었으니, 누가 공격했는지 미처 보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49화 살아나왔다!

룬은 대충 납득 가능할 정도의 사실만 말해주었다.

“비약의 저주가 사라져서 내 힘이 원래대로 돌아왔거든. 덕분에 그놈을 처리할 수 있었어.”

“네가?”

끄덕.

페르디키온은 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룬이 진실을 말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몸은 괜찮고?”

“어. 형은 좀 어때.”

“……크게 다친 곳은 없다. 내 불찰로 널 위험에 빠트리다니 한심하군.”

페르디키온은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며 얼굴을 구겼다.

룬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 애초에 ‘부활’ 능력을 지닌 자에게만 반응해 나오는 히든 보스였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예측할 수 있을 리가.”

룬이 백야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영원히 볼 일 없는 놈이었다.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여전히 분해 보였다.

“……그래도 예측했어야 했다.”

‘고지식한 녀석 같으니.’

속으로 혀를 찬 룬은 우울해하는 그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비약의 저주가 사라질 때까지 형님과 흑미가 버텨준 덕에 그놈에게 이길 수 있었어.”

딱히 달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진심으로 고마워. 형.”

‘실제로 백야가 눈물을 흘릴 시간, 그리고 내가 그걸 마시고 해독할 시간을 벌어줬지.’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도움 받은 건 사실이었다.

살짝 얼굴이 펴지는 페르디키온을 확인하고 룬은 주변을 살폈다.

마침,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드와 눈이 마주쳤다.

“저희가 그 무시무시한 놈을 잡은 겁니까?”

“그래.”

“오오오!”

제드는 앓는 소리를 내던 좀 전이 무색하리만치 신나서 S급 배틀 액스 파라리엄을 신나게 휘둘렀다.

화륵!

화르륵!

“이야아! 살아나왔다! 살아나왔다고!”

“…….”

‘놔두자.’

룬은 ‘불놀이하다 손모가지 날아간다.’라고 한 소리 하려다가 보류했다.

꼼짝없이 죽으리라 생각했다 살아온 놈이니 잠시 자축하게 둬도 괜찮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잠시였을 뿐이지만.

“불놀이 계속 할 거냐?”

멈칫.

룬의 말에 제드가 얼른 무기를 추스르며 머쓱하게 웃음을 흘렸다.

“하하! 룬 님도 참. 이건 축포입니다, 축포!”

그제야 페르디키온의 굳었던 표정이 풀어졌다.

“큼! 그러고 보니 네 서번트도 제법이었다. 이번에 활약이 뛰어났는데 뭘 하사해 주면 좋을지 의견 있나.”

‘아까는 흑미라고 부르더니.’

급박한 상황이 종료되니 다시 서번트로 호칭이 돌아왔다.

룬은 알기 쉬운 성격의 페르디키온을 보며 픽 웃었다.

“하나 떠오른 건 있는데 형한테는 좀 어려울걸.”

“뭔지나 말해봐.”

“‘서번트’말고 ‘흑미’라고 불러주기.”

페르디키온의 미간이 한번 움찔, 좁혀졌다.

“……생각해 보지.”

‘의외군. 아예 거절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함께 합을 맞췄던 전투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전우애라도 생겼나?’

룬은 페르디키온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제대로 ‘흑미’라고 부를 날이 오리라 여겼다.

“흠냠냠…….”

“어이구. 흑미 님 이렇게 작고 순하게 생기셨는데. 좀 전의 용맹한 모습이 거짓말 같네요.”

잠든 흑미를 업은 제드가 호들갑을 떨자 페르디키온이 내심 흐뭇해하며 대꾸했다.

“당연하지. 내가 직접 가르쳤다.”

“이야! 역시 페르디키온 님이십니다!”

제법 훈훈한 분위기로 다들 돌아갈 채비를 했다.

던전을 떠나기 전.

룬은 입구에 그려진 인간과 드래곤의 벽화를 다시 한 번 눈여겨보았다.

‘혹시 저기에 새겨진 인간이 <망자의 혼>인가.’

저 벽화를 그리게 지시한 것이 파시야스가 맞다면, 히든 던전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페르디키온이야 보스를 잡을 때의 반응으로 보아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을 터.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날이 있겠지.’

곧 페르디키온이 일으킨 불꽃에 삼켜진 그들은 던전에서 사라졌다.

***

“오, 돌아오셨습니까?”

“마중 나와 있었군, 베르딘.”

“예. 늙은이의 주책인지……. 예상 시간보다 늦으시기에 조바심이 나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더군요. 허허. 별 일은 없었습니까?”

허허, 웃은 그가 일행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는데 페르디키온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있었지. 히든 보스가 있었기에 처리하고 오는 길이다.”

“! 히든 보스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페르디키온이 던전에서 겪은 자초지종을 늘어놓았다.

그 사이 룬은 제드에게 잠든 흑미를 침실에 바래다주라고 명했다.

백야가 흑미와 함께 나간 후.

사정을 모두 들은 베르딘은 허, 하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런 조건이 있었다니, 놀랍군요. 던전이 생긴 건 페르디키온 님께서 태어나기도 전인데. 여태껏 출연하지 않았던 몬스터라니.”

“혹시 모르니 한동안은 던전을 봉인하지. 바로 조사대를 꾸려 던전 상태를 확인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페르디키온 님!”

베르딘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안건을 입에 올렸다.

“그러고 보니, 룬 님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자리를 지킨 제드에게 그에 맞는 보상을 해주어야겠군요.”

“그렇겠지. 하여 S급 배틀 해머인 <파라리엄>을 그에게 하사할까 한다.”

원래는 대여품으로 지급된 무기였다. 던전 공략이 끝났으니 이제 반납해야할 때였으나 페르디키온은 돌려받지 않기로 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안 그래도 그 무기를 꽤나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으니 제드도 좋아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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