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242)

베르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수염을 손으로 문질렀다.

룬을 잠시 살핀 페르디키온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래. 그나저나 내 아우가 피곤해 보이는군.”

“이 노인네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어서 들어가 쉬시지요.”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킨 베르딘이 허허롭게 웃었다.

룬 역시 이 자리에 남아있느니 제 방에서 편하게 쉬는 게 낫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이어 베르딘은 턱을 문지르며 말을 맺었다.

“허면, 저는 제드에게 보상에 대해 이야기해 두겠습니다.”

“알겠다. 잘못 놀려서 성에 불이라도 내면 회수하겠다는 말도 전해두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제드 녀석, 조만간 회수당하겠네.’

룬은 남몰래 그렇게 짐작했다.

그날 저녁은 드워프들의 전통 식사가 곁들여진 특식이 차려졌다.

크리스티나가 재료를 보내주었고, 베르딘이 룬의 요리를 도우며 배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룬 님께서 미리 좋은 재료를 마력 냉장고에 넣어두셔서 요리하기 편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소생 언령 연습하느라 꽉 채워두었지.’

잘 말린 육포와 베이컨, 양젖치즈를 올려 통째로 구운 감자.

두터운 손으로 섬세한 손놀림을 발휘해 만든 바게트.

시원한 보리음료와 술.

투박하고, 심플한 그들의 일상식.

룬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남이 해주는 식사는 오랜만이군. 크리스티나 생각이 나는 걸.’

페르디키온의 레어에 온 후로는 만찬을 준비하느라 늘 최상의 재료로 원하는 음식을 해먹기만 했다.

그러다보니 지금처럼 누군가가 해주는 음식을 먹는 건 오랜만이었다.

“맛은 어떠십니까? 어깨 너머로 배운 실력이다 보니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요? 허허.”

“충분히 훌륭한데 뭘. 잘했다, 베르딘.”

룬의 칭찬에 베르딘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솜씨 좋은 장인이라 그런지, 불을 다루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간을 맞추는 게 다소 서투르기는 하지만.’

요리를 배운 지 얼마 안 된 베르딘이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페르디키온 일행의 피곤하고 힘들었을 시간을 나름대로 위로해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따뜻하군.’

화산의 열기조차 닿지 못하는 심장 근처를 데우는 느낌이었다.

“베르딘 할아버지! 최고!”

고기를 입에 가득 문 흑미도 엄지를 치켜들었다.

“내일 아침도 솜씨 좀 발휘해 볼 생각이니, 기대해주십시오.”

“예에? 아, 아침이요?”

맥주로 목을 축이던 제드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래. 지금은 피곤할 테니 말이지. 조사대에게 넘길 던전 정보는 아침에 정리하기로 했다.”

페르디키온의 대꾸에 제드의 얼굴에 눈에 띄게 난감함이 스쳤다.

“한동안 여러모로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오늘은 성에서 머물러라.”

“어…… 그게 말입죠, 페르디키온님. 이거 참. 제가 집에 화로를 끄지 않고 나온 기분이라! 오늘 밤은 좀 불안해서 말입니다.”

그러자 페르디키온이 의문 어린 시선을 던졌다.

슬쩍 구겨지는 미간을 발견한 제드가 웃으며 다급하게 핑계를 댔다.

“죽음의 위기를 겪고 보니 제 집이 참 그립지 뭡니까? 다신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식탁의 웃긴 무늬까지도 보고 싶더라고요.”

“……사정이 있다면 할 수 없지. 그럼 내일 아침에 성으로 다시 와라.”

“옙!”

굳이 명령까지 해서 성에 잡아둘 필요까지는 없었기에, 페르디키온은 제드의 귀가를 허락했다.

그리고 룬은 그 모습을 조용히 눈여겨보았다.

그날 밤.

흑미와 백야에게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라고 명한 뒤, 룬은 혼자서 제드의 뒤를 밟았다.

평범하게 성을 나선 제드는 슬그머니 주변을 살피더니 어느 어둑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는 점점 더 으슥하고 인적 없는 골목.

짐승이나 넘나들 법한 거친 길을 따라갔다.

그 끝에 도달한 장소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폐가였다.

집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낡은 데다 귀신이라도 나올 듯 음산했다.

화로는커녕 식탁처럼 생긴 흔한 가구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지……?”

어둠속에 몸을 숨긴 채 따라온 룬을 끝까지 발견하지 못한 제드가 중얼거렸다.

녀석은 한쪽 구석에 단단하게 쌓아올린 나무 상자를 치워냈다.

그리곤 끙차 소리를 내며 거대한 배낭을 끄집어냈다.

금속이 부딪히는 절그럭 소리를 내며 배낭을 등에 진 제드는 품에서 열쇠를 꺼냈다.

‘열쇠에서 마력이 느껴지는데. 뭘 할 셈이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무릎을 꿇은 제드가 바닥의 흙먼지를 슥슥 쓸어냈다.

그리고 천천히, 열쇠를 어딘가에 끼워 넣기 시작했다.

철컥!

가벼운 마찰 소리가 나더니 마력이 넘실거리는 지하공간이 드러났다.

‘비밀 통로?’

제드는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열쇠를 빼냈다.

열쇠가 빠지자마자 마력으로 된 문이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난감하군.’

따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가는 제드를 지켜본 룬은 짧은 고민을 끝냈다.

‘들어간다.’

문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룬은 제드가 들어간 문 너머의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넘실거리는 마력이 몸을 휘감으며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되었다.

스으.

직후, 문이 완전히 사라지고 평범한 폐가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기껏해야 트랩 정도 있겠지, 라고 생각했던 룬.

그는 쨍하게 내리쬐는 풍경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꿈이라도 꾸는 건가.’

아침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모래사막.

커다란 야자수가 군데군데 자라있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숨을 들이킬 때마다 뜨겁고 건조한 모래바람이 느껴졌다.

‘필시 이동마법이겠군. 지하에 마법진을 설치해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폐가의 지하 창고에 이런 풍경이 있을 리 없었다.

50화 가는 날이 장날

마력이 넘치게 흘렀던 걸 보아, 초장거리 공간이동이거나 차원이 분리된 아공간.

혹은 환술일 터.

어느 쪽이든 보통의 마법실력으로는 불가능 한 일이라는 게 중요했다.

‘대충 숨겨둔 보물을 찾거나 비밀리에 누굴 만나는 수준인 줄 알았더니.’

룬은 속으로 가벼운 헛웃음을 흘렸다.

뒤돌아보니, 들어왔던 통로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티나가 ‘이 세상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다’고 했지.’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을 문뜩 떠올린 룬은 먼저 들어왔을 제드를 찾았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 점점 지워지고 있었지만 앞으로 쭉 이어지는 건 확실했다.

황당한 상황이기는 하나 우선 제드를 놓치지 않는 게 중요했다.

룬은 걸을 때마다 신발에 푹푹 스며드는 모래를 느끼고 바로 비행마법을 시전하여 제드에게 날아갔다.

“야.”

“흐억!”

모래언덕을 막 넘어가다 화들짝 놀란 제드가 룬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루, 루, 룬 님?!”

입을 떡 벌린 제드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펄쩍 뛰었다.

“세상에. 여긴 대체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네 행동이 수상했다는 생각은 안 드냐?”

“그게……. 완벽하게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름.”

“…….”

룬은 대답 대신 한심한 시선을 꽂아주었다.

말이야 그렇게 했어도 자신의 행동이 떳떳하지 않았다는 점에 양심이 찔린 제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와, 이걸 진짜 어쩌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제드의 사정은 알 바 아니었다.

“바로 나가지 않는 걸 보니 갈 데가 있는 모양이지.”

“예에. 그렇죠, 뭐…….”

묘하게 의욕을 상실한 제드에게 룬은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안내해.”

힐끔힐끔 눈길을 주면서도 제드는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놀렸다.

정말 급했던지, 지고 있는 거대한 배낭을 추스르면서도 속도만큼은 떨어뜨리지 않았다.

지나가는 길에 사막 도마뱀, 얼굴을 빼꼼 내밀다 구멍으로 들어가는 새끼 전갈, 몸을 흔드는 선인장 몬스터를 구경할 수 있었다.

“이런 장소가 있었군. 드워프 중엔 너만 알고 있는 통로인가?”

“옙. 애초에 이 열쇠는 저희 집안 보물이었는걸요.”

“보물?”

제드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가보시면 알 겁니다. 다른 놈들이 알아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거.”

안 그래도 룬이 알아버린 시점에서 축 늘어진 어깨가 펴질 줄 모르고 있었다.

“저기입니다. 제가 가려던 곳.”

“흠.”

멀리 보이는 건축물은 피라미드였다.

먼저 돌로 된 담장이 낮게 설치되어 있었다.

그 담을 경계로 안쪽은 피라미드.

바깥쪽에는 이국적인 옷을 입은 이들이 낙타를 끌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들이 임시로 설치한 천막과 가건물이 드문드문 세워져있었다.

“역시 벌써 많이들 선점했네요. 조금만 서둘러보죠.”

“뭘 할지 말이라도 해봐.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

제드는 룬을 돌아보고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결심을 마친 듯,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여긴 사막의 암시장입니다. 간단히 말해, 비밀리에 특별한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죠. 그런데 오늘이 하필 마지막 장날이거든요.”

“호오.”

특별한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라는 말에 룬 역시 흥미가 동했다.

그는 비행마법을 사용해 제드와 그의 몸을 띄웠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간다.”

“우, 우억!”

제드는 뺨이 공기의 벽에 밀리는 느낌을 받으며 순식간에 암시장 위에 도착했다.

“히익! 루, 룬 님. 얼른 내려주세요!”

“? 왜 그렇게 무서워 해.”

“그, 전 이렇게 공중에 떠 있는 건 익숙하지 않단 말입니다!”

“…….”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제드를 보며 한심한 눈을 한 룬은 즉시 착지했다.

바닥에 발이 닿자 겨우 정신이 든 제드는 뭐가 그리 억울했는지 룬에게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룬이 가볍게 피어(fear)를 섞어 노려보자 금세 눈을 깔았다.

“볼 일 있다며. 얼른 가자.”

“옙!”

침묵 속에서 그들은 천막 거리로 들어갔다.

이쯤 되니 룬도 살짝 기대감이 올라왔다.

본격적으로 거리에 들어가기 전부터 느껴진 마력의 기운 때문이었다.

“사과 할멈! 오랜만이야. 물건 좀 남았어?”

“다 팔리고 딱 홍옥 열 알 남았네. 멋진 드워프 양반.”

“별일이네. 웬일로 사과가 남았어?”

“수확량이 줄어서 가격을 살짝 올렸을 뿐이야. 이젠 홍옥 한 알 당 하급 마력석 하나 받고 있지.”

“작년의 두 배? 설마 나한테까지 그렇게 팔 생각은 아니지?”

룬은 그들의 옥신각신 하는 모습을 뒤로한 채, 고급스러운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붉은 보석이 초록빛 잎을 하나씩 달고 있었다.

‘안에 뭔가 있는데.’

실랑이를 마친 뒤 제드는 사과 열 알을 모두 구매했다.

배낭에 사과를 담아주는 걸 유심히 본 룬은 순간 눈을 의심했다.

‘설마 살아있나?’

그는 제드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

“뭐냐, 이건?”

“불의 정령을 산채로 봉인한 정령봉인석입니다. 저 할멈은 유명한 정령사냥꾼이거든요. 사과의 잎을 따면 봉인이 풀리고, <불의 정령 살라만다>가 나오죠.”

“…….”

정령사냥꾼이라는 말에 크리스티나와 라이를 떠올린 룬이 미미하게 표정을 굳혔다.

“너무 그런 표정 지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표정?”

“마음에 내키지 않으신다는 얼굴이요.”

표정 변화가 없었을 텐데, 어떻게 알았는지 제드는 정확히 룬의 심정을 읽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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