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242)

피식 웃은 제드가 입을 열었다.

“제가 감이 좀 좋습니다. 전에 말씀드렸죠? 아무튼, 이 정령은 불의 레어에서 일을 도울 녀석도 있지만 화산지대에 방생해 주려고 산거니까 너무 걱정 마십쇼.”

“이미 팔린 녀석들은?”

“음, 보통은 정령 친화력이 없는 자의 사역정령이 되거나, 연금술사들의 연구에 쓰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암시장이 한 해에 겨우 한번 열리고, 열쇠가 애초에 얼마 없어서요.”

저 말이 전부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린 그에게 말할 수 있는 종류의 정보만 꺼냈을 테니까.

하지만 그에 관해 더 캐묻기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

“늦었지만 저도 장사를 시작해야지요. 가져온 드워프제 무기들이 아까우니까요. 룬 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난 따로 둘러볼게. 그리 큰 시장도 아니고, 여차하면 날아서라도 찾아올 테니까.”

“좋습니다. 제가 아니면 원래 장소로 돌아갈 수 없으니, 해가 지기 시작하면 바로 오세요.”

“알겠어.”

‘내 아공간 주머니의 여유 공간이 얼마나 되더라.’

그에게는 마침 크리스티나가 준 마력석과, 금화들이 가득했다.

룬은 즉시 시장을 돌기 시작했다.

***

사막의 암시장.

그곳엔 드래곤의 보물창고에서 본 것보단 아쉬운 물건이 대부분이었으나 제법 흥미로운 물건도 있었다.

룬은 일단 쓸 만해 보이면 이것저것 모두 쓸어 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만족스럽게 생각한 물건이 있었으니.

‘<저주도구 만들기 세트>라니. 돌아가면 검은 방에서 얼른 시험해 봐야지.’

저주도구라면 <약해지는 비약>만 해도 꽤 유용하게 써먹지 않았던가.

마치 원하는 완구를 얻은 아이 같은 얼굴을 한 그는, 아주 흐뭇한 기분이었다.

심지어 필요한 재료가 적힌 레시피도 첨부되어 있었다.

판매자가 마족이었다는 점이 꽤나 당황스러웠지만, 물건은 진짜였다.

‘생각보다 꽤 친절하기도 했어.’

그 마족과의 대화를 통해, 이 암시장에서만큼은 신원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어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장소를 제드 혼자 알고 있었다는 점이 의문일 정도로.

‘같은 드워프족 중에 한 명쯤은 더 알 법하지 않나?’

돌아가 보니 마침 제드가 장사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벌이가 꽤 쏠쏠했던지,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 팔았냐.”

“예! 드워프제 무기는 늘 인기가 있으니 말이죠.”

자부심에 찬 대답과 함께 제드는 배낭을 메었다.

슬슬 어둠이 깔리는 시간.

하늘을 비행하는 자체를 힘들어하는 제드를 위해, 룬은 활력을 올리는 쿠키를 주고 속력이 증가하는 마법을 걸었다.

“이야! 워후우! 이거 신나네요!”

제드는 발이 보이지 않을 속도로 달리게 되자 팔을 벌리고 바람을 만끽했다.

룬은 타이밍을 가늠하다, 슬슬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이런 장소를 왜 드워프족에선 너만 알고 있는 거냐?”

“그야 우리가 만든 무기를 외부로 유출하는 자체가 옛날부터 금지되어있으니까요. 전통파 할배들이 알았다간…… 끽이죠.”

제드가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폐쇄적인 마을이니 전통이 철저하게 지켜진 모양이군.”

“어찌 보면 당연하죠. 심지어 파시야스 님 시절에 알려졌다? 조상님 목이 무사할 리 없죠. 잘 되어봐야 열쇠지기나 되지 않겠습니까요. 소유권이 탐난다며 해코지 할지도 모를 일이고요.”

“그건 그렇겠네.”

페르디키온 이전에 군림한 레드드래곤 파시야스는 드워프족에게 영토를 빌려주는 대신 오직 자신만을 위한 무구를 바치라는 조항을 걸었다.

탐욕스러운 그 성정상, 이런 열쇠를 가졌다는 걸 알면 제드는 드래곤의 보물창고에 평생 썩을지도 몰랐다.

고개를 끄덕이는 룬을 힐끔 본 제드가 말했다.

“슬슬 이쯤에서 돌아가죠.”

“좋아.”

둘은 동시에 멈춰 섰다.

제드는 품에서 꺼낸 열쇠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돌아가기 전에, 룬 님에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제드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어린 해츨링을 지그시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 열쇠에 대한 정보를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으시겠다는 서약.”

“?”

“드래곤 족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는 언령 마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설마, 이 새끼가?’

언령으로 스스로에게 제약을 걸라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이제 10년생인 어린 해츨링에게.

“내가 그런 걸 할 것 같아?”

싸늘한 시선을 주었음에도, 제드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럼 할 수 없죠. 이 열쇠는 처음 사용한 소유자가 다시 사용해야만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는 통로가 생성되거든요.”

제드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면 원래의 마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소리였다.

‘열쇠를 뺏는 방법도 쓸 수 없겠군.’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선뜻 대답하지 않는 룬에게, 제드는 미안한 얼굴을 했다.

“죄송하지만, 비밀을 절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게 대대로 몸을 보존해 온 길이었습니다. 부디 양해해주세요, 룬 님.”

‘이러려고 내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던 거였어.’

룬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하지만.

‘괘씸하네.’

그대로 따르면 룬 이클립스가 아니었다.

제드 머스킷.

그가 대체 어디서 언령 마법에 대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건 확실했다.

‘그게 어떤 마법인지 알면 저런 소리 함부로 못 할 텐데.’

룬은 속으로 혀를 찼다.

비밀 하나 지키자고 해츨링에게 언령 마법을 강제하다니, 이 제안은 드래곤 족 전부를 드워프들의 적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안타까운 녀석. 그런데.’

속으로 혀를 차긴 했지만, 저 드워프의 탐욕스러움은 동시에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이거 잘하면…… 암시장을 내 걸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룬의 눈이 반짝였다.

너, 내 서번트가 되라

잘만 이용하면 오히려 그의 귀찮음을 덜 좋은 수족이 되어 주리라.

속내를 감춘 룬이 넌지시 운을 떼기 시작했다.

“그래? 안타깝네. 내겐 서로에게 더 좋은 제안이 있는데.”

“아무리 좋은 제안도 목숨보다 귀할 리가요.”

“목숨만 연명하면 돼? 생각보다 담이 작은 놈이었네. 앞으로 네 드워프 인생에 다시없을 행운을 잡을 기회를 두고 말이야.”

룬은 여유롭게 머리 뒤로 두 손을 넘겨 깍지를 꼈다.

제드는 이 작은 꼬마 해츨링이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비밀? 그거야 당연히 지켜줘야지. 거기에 더해, 난 네게 암시장 독점 납품을 맡기고 싶은데.”

“납품이라니요?”

“말 그대로다. 오늘 암시장을 둘러보니 괜찮은 물건이 꽤 많더라고.”

어리둥절한 제드의 표정을 보며 룬은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암시장에 항상 들릴 수 없으니까 대신 구매해 줄 녀석이 필요하거든. 물론.”

극적인 효과를 위해 잠시 말을 멈춘 룬이 상대를 빤히 응시했다.

“나를 대신해 움직여준 대가는 충분히 지급할 생각이다.”

“대가…… 말입니까?”

제드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간 <폐광 던전>에 입장하는 팀에 껴서 악착같이 몬스터 사채에서 나오는 재료들을 모아온 제드.

가죽 하나, 날개와 뼈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찾아 주워댈 정도로 물질적인 탐욕이 강했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던전을 찾을 생각이야. 다만 거기서 나오는 부속물에는 흥미가 없어.”

그랬다.

실제로 룬은 <폐광 던전>에서 조차 물건 하나 줍지 않았다.

기껏해야 멀찍이서 싸움구경이나 하다 풍경을 감상하는 정도.

물론 히든 보스의 뼈를 취했지만, 제드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누가 가져가든 상관없지.”

룬은 씨익 웃으며 미끼를 던졌다.

그제야 룬이 하는 말을 이해한 제드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블랙 드래곤 장로가 될 해츨링에게 몬스터 가죽 같은 게 왜 필요하겠어.’

이미 페르디키온에게 ‘불의 인장’이라는 귀한 걸 받은 상황.

심지어 이번 장인대회 출품 주제조차 룬의 장비였다.

이미 얻은 것도 많고, 앞으로 얻을 것이 더 많을 예정인 강자.

제드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따져보면 같은 편으로 두는 게 이익이긴 한데.’

마침 강자와의 친분은 돈을 부른다는 사실을 이번 <폐광 던전>을 통해 깨달은 후였다.

룬을 위험에서 보호해 준 대가로 무려 ‘S급 배틀 액스 파라리엄’을 하사받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앞으로 다른 던전들도 함께 데려가 주신다면 각종 던전 부산물은 물론이고……?’

제드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여 손으로 입을 헙 막았다.

레드 드래곤 영토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드워프제 무기를 외부에 판매할 수 있게 될 지도 몰랐다.

잘만 하면 던전에서 자금도 획득하고, 대륙 곳곳에 무기를 수출하며 드워프들의 문물을 인정받을 수도 있다.

어쩌면 개혁파 드워프들의 소원인 ‘문물 개방’을 제드를 통해 합법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나에게 달렸다! <개혁파>의 꿈이! 미래가!’

두둥!

제드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희망이 차오른 드워프의 눈망울은 룬 입장에서 다소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저렇게까지 탐욕스러웠다고?’

제드 머릿돌 굴리는 소리가 룬의 귀에 들리는 기분이었다.

‘……고기를 눈앞에 둔 개가 행복해 하는 표정이군.’

어쨌든 그의 제안이 제드에게 상당히 잘 먹히고 있는 건 확실했다.

룬은 여기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네 말도 일리 있다. 이런 일은 서로 신뢰를 가져야하는 법이지.”

“예… 예? 아, 제가 그렇게 말은 했습니다만…… 그게 그러니까…….”

제드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후회가 차오르고 있었다.

어떻게든 좋은 관계를 맺어두면 콩고물 떨어질 게 많았는데, 다급한 마음에 입을 잘못 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룬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제드를 보며 은근한 뜸을 들였다.

“흠.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꿀꺽.

제드가 긴장된 눈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너, 내 서번트가 되어라.”

“예? 서번트요?”

“그래. 흑미처럼 내 부하가 되는 거지.”

제드는 파시야스에게 지배받았던 선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선대 드워프족의 아둔한 계약 때문에 수탈당했던 오랜 나날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흑미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하고 귀여운데다 룬을 잘 따르던 아이와 함께한 시간은 무척 즐겁기까지 했다.

‘그래, 드래곤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니었어.’

그 모습은 파시야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표정에 드러나지 않아도 어딘가 따뜻했다.

제드는 던전에서의 룬을 떠올렸다.

‘너, 손 떨고 있는데.’

‘너야말로 무리하는 거 아니냐?’

‘그래, 고맙다.’

드워프인 그를 향한 염려의 말.

심지어 고마움에 대한 표현도 아끼지 않았다.

상급자에게 인정받는 기분은 제드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경험이었다.

사실 드워프지만 주로 재료 수급을 맡고 있는 그는 대장장이 기술 실력이 썩 좋지 않았다.

종종 다른 드워프들이 그를 무시하는 말을 들을 때면 넉살 좋게 넘기면서도, 못내 씁쓸했다.

룬이 한층 차분하고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내 권속이 된 자를 함부로 하지 않는다. 대신, 너 역시 나에게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고. 이 정도면 서로 믿을 만하지 않겠어?”

“…….”

이미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보는 눈인 줄도 모르고, 제드는 홀로 아련한 감상에 젖었다.

그사이 룬은 가죽 주머니에서 큼지막한 마력석을 꺼냈다.

“자, 계약금은 이거면 되나?”

“……!”

제드의 턱이 빠져라 입이 벌어졌다.

손 안에 넘치게 담긴 크고 아름다운 마력석!

‘저런 정신 나간 크기라니!’

그의 눈에 다시 탐욕이 넘실거렸다.

제드는 생전 본 적도 없는 마력석 크기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응 없는 그를 본 룬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부족한가? 그럼 일단 받아봐.”

휘익!

성 한 채 값이 공중을 날아다녔다.

“이 귀한 걸!”

으악 소리를 내지른 제드가 몸을 던져 마력석을 사수했다.

혹여 상처라도 났을까 조심하며 품속을 살피는데, 문득 머리 위에서 강력한 눈부심이 느껴졌다.

“더 줄까?”

“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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