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242)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룬의 손에는 더 커다란 마력석이 들려있었다.

“루, 루, 룬 님.”

타악.

룬은 손에 든 마력석을 공중으로 던졌다 받으며 덤덤한 눈으로 제드를 내려다보았다.

제드의 시선도 룬이 던졌다 받고 있는 마력석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망설일 필요 있나? 나랑 계약하면 넌 아쉬운 게 없잖아. 아니면 그 마력석 도로 가져오든지.”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마력석 실물을 손으로 만져보니 이걸 놓고 싶지 않았다.

제드가 평생을,

어쩌면 그의 자식의 자식까지 일한다 해도 손에 닿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즉시 몸을 날렸다.

“이 제드 머스킷을 발닦개로 써 주십시오! 주인님!”

넙죽.

말 한마디보다 눈앞에 보이는 실익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백 마디 말보다 눈앞에 보이는 결과가 중요한 법.

“…….”

엎드린 제드는 그 와중에도 마력석이 담긴 두 손을 경배 하듯 숙인 머리 앞에 모아 올리고 있었다.

그 꼴을 내려다본 룬이 잠시 침묵했다.

‘파시야스가 왜 드워프들과 그런 불공정 계약을 맺을 수 있었는지 알 것 같군.’

속으로 혀를 찼으나 어쨌든 룬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그럼, 계약하기로 한 걸로 알고.”

상호 동의가 끝나자 룬은 그 자리에서 권속계약을 맺었다.

<이름 : 제드 머스킷>

- 종족 : 드워프

- 나이 : 37세

※ 특이사항 :

탐욕의 화신 같은 젊은 드워프. 개혁파 지지자.

- 룬 이클립스(Lune Eclipse)에게 귀속

- 서번트(Servant)화 완료.

- 성향 : 탐욕스러운, (재물에)충직한, 계산적인

‘……뭐에 충직한 거야?’

서번트화가 되었지만 흑미와는 충직함의 종류가 사뭇 달랐다.

‘어이가 없네. 이 자식…… 이대로 괜찮은 건가.’

물론 그 탐욕스러움을 노리긴 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룬이 납득하는 사이, 계약을 마친 제드는 들뜬 얼굴로 제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호오. 이게 권속화로군요. 룬 님의 기운이 느껴지는 게 아주 든든합니다!”

“뭐 그렇지. 아, 내 권속이기 때문에 내가 부르면 바로 소환되니 그 점만 기억해 둬.”

“오! 그거 매우 편리하군요!”

‘얘는 부하가 된 걸 왜 이렇게까지 좋아하지?’

룬은 몰랐지만 사실 이번 일은 제드에게도 기연이었다.

이 일로 인해, 제드 머스킷은 최초의 자유 드워프가 되어 대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훗날 대륙에서 유일한 드워프제 무기를 팔며 상단과 대장장이 기업까지 거느리는 가장 거대한 상회.

바로 머스킷 상회의 시작이었다.

“아, 그건 그거고 암시장 열쇠 잠시만 보여줘.”

“넵? 열쇠를요?”

“응. 바로 돌려줄게.”

쭈뼛거리던 제드가 품에 가득 안겨진 두 개의 거대한 마력석을 힐끗 보고, 슬그머니 열쇠를 내밀었다.

“여, 여기 있습니다.”

“좋아. 잘 했어.”

룬이 열쇠를 받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는 사이 제드는 마력석을 뺏기기라도 할까 배낭 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슬금슬금 룬 근처를 기웃거렸다.

“혹시 열쇠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없어. 드워프들은 마법을 잘 다루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너는 이 열쇠로 마력의 통로를 열었기에. 좀 신기해서 살펴본 거야.”

“아. 하하! 그러실 수 있죠. 제가 마법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그 열쇠가 마력석에 꽂기만 하면 그 힘을 빨아들여 미리 새겨둔 마법을 자동으로 시전하는 저장형 아티팩트거든요!”

“호오. 그런 원리였군.”

룬은 태연하게 열쇠를 돌려주었다.

“잘 봤어. 고맙다.”

“별 말씀을요! 그럼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열쇠를 돌려받고 나서야 제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열쇠를 또 달라고 할까봐 불안해진 그는 빠르게 문을 만들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너무 긴장 마시고 마력의 통로에 몸을 맡기시면 됩니다.”

“알겠어.”

통로는 들어올 때처럼 약간의 일렁임을 남기고 원래의 폐가로 이어졌다.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새벽 별이 떠있었다.

“이야! 벌써 새벽이라니. 시간이 참 빠르지 않습니까?”

“그렇군. 이따가 낮에 성에서 다들 모일 텐데, 넌 어떻게 할래?”

룬의 질문에 제드가 개운한 얼굴로 싱글벙글 웃었다.

“저야 암시장에서 구한 물건들을 정리해두고 가야지요. 룬 님께서는 바로 성에 가십니까?”

“그래야지. 밤에 외출한 사실을 굳이 형님에게 들켜봐야 곤란하고. 눈이나 좀 붙이다 나올 생각이야.”

“옙! 그럼 저도 아침식사 때 뵙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룬 님!”

종복의 자세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듯했다.

허리까지 훅 숙여 깍듯이 인사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쇽쇽쇽쇽쇽!

“그래. 들어가라.”

“넵!”

제드와 헤어지고 난 뒤, 그는 모처럼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느긋하게 산책하듯 성으로 걸어갔다.

인적이 드문 데다 고요한 시간.

걸음을 옮기던 룬이 어느 순간 자리에 멈췄다.

‘……이게 되네.’

포옹.

룬이 손에서 천천히 마력의 형태를 뽑아냈다.

마치 ‘열쇠’처럼 생긴 형태였다.

그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제드에게서 열쇠 아티팩트를 받아 꼼꼼하게 살펴보던 룬.

그는 이 열쇠의 구조를 이해했다.

‘마력석에 꽂기만 하면 미리 열쇠에 새겨둔 마법이 발동한다.’

마력석은 땔감.

열쇠는 화로.

간단한 원리였다.

이를 깨닫는 순간, 룬은 여기서 한 가지 가능성을 더 실험해보고 싶어졌다.

‘어떤 마력이든지 상관없다면, 꼭 마력석일 필요는 없잖아?’

결론부터 말하면 룬은 <암시장 열쇠 복제>에 성공했다.

마법을 다루지 못하는 드워프에겐 마력석이 필요했지만, 블랙 드래곤 해츨링인 그에게는 필요 없는 제약이었다.

또한 페르디키온과 어릴 때 수업한 ‘마력 실뜨기’를 통해 익힌 감각도 있었다.

룬은 원본 열쇠를 만지면서 ‘마력 실뜨기’로 열쇠에 새겨진 정교한 마법진을 복사했다.

그 결과가 바로 그의 손 안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는 ‘마력 열쇠’였다.

‘이게 제대로 작동하는지가 관건인데……. 확인하려면 문을 열어보는 수밖에.’

이론은 완벽했지만 확인을 위해선 한 번쯤 실험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성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룬은 몸 안으로 열쇠의 마력을 다시 흡수했다.

이제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제드 녀석이야 내가 말해주지 않는 이상 평생 모르겠지. 괘씸죄의 대가는 이걸로 봐 줄까.’

룬은 기분 좋게 웃었다.

아침 산책이라도 하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는 성문 앞 문지기 드워프가 보일 때 즈음, 자신의 방으로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베르딘이 차려준 아침 식사자리에서 룬은 제드가 자신의 권속이 되었음을 모두에게 알렸다.

“제드를 네 권속으로 삼았다고?”

페르디키온은 대놓고 의외라는 얼굴이었고, 흑미는 소시지를 문 채 제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드는 싱글벙글하며 변죽 좋게 다른 이들과 살갑게 친목을 다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흑미가 까만 귀를 쫑긋거리며 이해한 바를 되물었다.

“그럼, 제드 아저씨가 흑미 후배예요?”

“그런 셈이지.”

룬이 답하자, 제드도 싹싹한 태도로 미소 지었다.

“옙!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요, 흑미 님.”

“응! 흑미도 잘 부탁해!”

해맑은 흑미의 미소는 제드에게 푸근한 기분을 선사해주었다.

그러는 사이, 페르디키온이 룬에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은 거냐?”

그는 드워프의 본성에 대해 잘 아는 레드 드래곤이었다.

드워프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점을 제외해도 눈앞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속성이 충직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응. 아주 충성스러워서 앞으로도 쓸모가 많겠더라고.”

‘물론 돈에 충성스럽지.’

이미 알고 뽑은 인재였다.

오히려 그 특성 때문에 당근만 잘 흔들어준다면 자기 이익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할 녀석이었다.

‘알아서 재산을 잘 불려다 줄 놈이니 어찌 보면 최고의 투자처지.’

게다가 아이들과 친화력까지 좋았다.

룬이 제드보다 상위 포식자임에도, <폐광 던전>에서 어린 룬조차 보호해주려 했으니 흑미와 백야와도 잘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긴, 네 입장에서는 목숨을 걸고 널 끝까지 지켜주려던 녀석이었지. 잘 알겠다.”

“…….”

어쩐지 오해를 산 기분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드워프의 수명은 약 200년.

아무리 길어도 300년을 넘지 못한다.

아득히 오랜 세월을 살아갈 룬의 입장에서 보면, 미우나 고우나 평생 볼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생각을 마친 룬은 보리차를 손에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제드는 내 권속으로서 자유롭게 영지를 오가게 해줬으면 해.”

페르디키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파시야스도 그가 차기 블랙 드래곤 장로의 성장을 돕길 바라고 있으므로, 고작 드워프 하나 내어주는 데에 부정적일 필요가 없었다.

“그래야겠지. 드래곤이라 해도 네 권속이 된 자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마음대로 해.”

고개가 휙 도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제드였다.

그의 강렬한 눈빛이 룬의 뺨을 찔러왔다.

자리만 괜찮았다면 당장이라도 자신의 ‘파라리엄’을 휘두르며 또 축포랍시고 불놀이를 벌이고 싶은 눈이었다.

‘아주 신났군.’

애초에 저 탐욕스러운 녀석은 이 점까지 계산했을 게 뻔했다.

룬은 속으로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어리숙해 보이다가도, 손익을 따지는 머리가 잘 돌아간단 말이야.’

제법 영악했다.

그리고 그런 녀석이 권속이기에 득을 본 건 룬이었다.

제드는 벌써 암시장에서 산 물건의 절반을 룬에게 건네고, 큼직한 마력석과 함께 내년 암시장 구매에 쓸 선수금까지 받은 상태였다.

‘암시장은 1년에 한번 열린다는데, 그 시기를 매번 맞춰 가는 일도 귀찮거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룬에게 페르디키온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리고 룬, 네겐 다른 일정이 하나 더 있다.”

“무슨 일정?”

“장인 대회 말이다.”

“아.”

‘그러게. 때가 되긴 했지.’

그간 돌아다니며 보았던 드워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록 우리의 땅은 사라졌으나, 우리의 기술은 문화가 되어 드워프로서 살게 할 거요. 외부에 알린다니. 그랬다간 순수한 드워프족의 기술이 사라지고, 그들에게 맞춰져 오염된 문화가 되고 말 거요.’

불을 붙이지 않은 곰방대를 입에 물고 이야기하던 전통파의 마스터 대장장이 쿠안 루베스.

‘우리의 기술과 문화를 지키는 방식이죠, 이게! 대륙에 이걸 알려서 우리 기술이 대륙에 알려지고, 인정받는 거니까요. 가만히 품고 있어봐야 고여서 썩은 물밖에 더 되겠냐고요!’

줄자를 채찍처럼 자유롭게 휘두르며 말하던 개혁파 마스터 대장장이 콰탄 퀘이터스.

둘은 같은 결론으로 말을 맺었다.

‘그러니 우리가 만든 작품이 선택받도록 최선을 다 할 거요.’

‘그러니 우리가 만든 작품이 선택받도록 최선을 다 할 겁니다!’

개혁파도, 전통파도 자신의 실력의 최대치를 선보이기 위해 밤잠을 설치며 쇠와 모루를 두들겼다.

“그러네. 슬슬 성과를 확인할 때가 됐어.”

룬은 그들의 탐욕, 고집, 신념과 욕망. 그 모든 것들을 태워 만든 그의 장비가 과연 어떻게 나왔을지 기대되었다.

“대회는 이번 주 마지막 날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든, 최선을 다해 승부에 임한 드워프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축제날이기도 하지. 괜찮다면 정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드워프들 모두와 만찬 자리를 가지고 싶군.”

룬은 페르디키온의 의중을 눈치챘다.

‘평소 서넛의 드워프들만 모이는 소규모 만찬이 아닌, 아예 연회요리를 준비할 수 있겠냐는 거군.’

잠깐 생각하던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 다만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면?”

“베르딘을 내 조수로 붙여줘.”

“좋다. 그렇게 하지.”

베르딘 역시 이번 대회의 심사위원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사회자라고 해야겠지만.

순조롭게 동의한 페르디키온이 문득 단호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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