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술은 절대 안 돼.”
“……알았다고.”
축제날이니만큼 청년기에 접어드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술을 가볍게 맛보게 해주는 날이었지만, 룬은 아직 너무 어렸다.
심지어 이미 몇 번 시도했다가 들킨 전적이 있는 그에겐 감시의 눈길이 삼엄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오늘부터 일주일간은 만찬을 잡지 않았다. 공정한 심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 푹 쉬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룬에게 어떤 작업을 걸지 모르는 상황이니만큼 드워프들을 만나는 빈도는 최대한 줄이는 게 좋았다.
“고마워, 형.”
“아니다. 여러모로 내가 더 고맙다.”
훈훈한 형제간의 우애는 주변인들의 이목을 끌었고, 보기 좋은 모습에 흐뭇하게 웃었다.
덕분에 모처럼 백야와 흑미는 연병장에 더해, 페르디키온에게 허가받은 필드에서 뛰어놀며 자유 시간을 만끽했다.
제드는 룬의 명으로 그 둘에게 위험한 일이 없도록 보호자를 겸하여 따라갔다.
페르디키온 역시 조사단과 함께 던전으로 들어갔고, 룬은 완벽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편하다. 소란스러운 일 없이 늘어지게 쉬는 게 얼마만이람.’
아무리 생각해도 제드를 수하로 들인 건 잘한 일이었다.
룬은 느리게 심호흡을 하며 몸 안의 마력과 중단전, 하단전의 기운을 정리했다.
명상을 곁들인 휴식은 알차고 고요했다.
안타깝게도 그 여유는 반나절도 채 가지 못했지만.
“룬 니임!”
“어이쿠! 좀 천천히 달려가세요, 흑미 님!”
벌컥!
“삐이! 삐잇!”
반쯤 졸다시피 하며 숨을 고르게 쉬고 있던 차.
‘잠들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건만.’
룬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눈을 떴다.
눈앞에는 제드와 흑미, 백야가 한꺼번에 몰려와 있었다.
“뭔데?”
“흑미 신기한 거 발견했어요!”
흑미 뒤에서 제드가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신기한 거?”
“쨔쟈안! 애들아, 나와!”
쇽!
쇽!
쇽!
쇽!
쇽!
정확히 5마리의 불도마뱀이 흑미 머리와 꼬리, 어깨와 팔. 허리 뒤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저거, 살라만다?”
룬이 눈을 찌푸리고 그들을 보고 있자, 제드가 엣헴. 하고 헛기침을 했다.
“넵. 맞습니다. 제가 어제 산 홍옥 기억하십니까?”
‘홍옥이라면……. 그 암시장의?’
암시장 거리에서 제드가 가장 처음으로 산 정령사냥꾼의 판매물품이었다.
화산대지 어딘가로 방생해 주겠다던 그 살라만더 5마리가 흑미에게 붙어있었다.
심지어 이 불도마뱀의 눈이 이상했다.
‘죄다 하트 문양이 박혀있는데?’
룬의 의문에 반응한 흑미의 정보창이 눈앞에 떴다.
<이름 : 흑미>
- 종족 : 베이비 서큐버스 : 일미호
- 부화 조건 : 매혹의 검은 장미에 마스터(Master)의 꿈을 부여할 경우 희박한 확률로 탄생한다.
- 성장하기 위해서는 마스터(Master)와 같은 속성이 담긴 양분이 필요하다.
※ 특이사항 :
희박한 확률로 씨앗에 마족(몽마)의 혼이 깃들었다.
- 룬 이클립스(Lune Eclipse)에게 귀속
- 서번트(Servant) 화 완료.
- 성향 : 충직한
- 몽마, 서큐버스의 혼이 일미호의 혼과 동화되어 태어났다.
<특성 개화>
- 불 속성 친화력(초급)
- 매혹(초급)
‘매혹?’
못 보던 능력이 추가되어 있었다.
불의 하급 정령.
조금 더 성장하면 중급으로 진화한다는 ‘살라만더’.
뜨거운 불도마뱀 모습을 한 정령들이 흑미에게 꼬리를 흔들며 잔뜩 애교를 부렸다.
“꺄아! 간지러워!”
흑미는 제 볼에 얼굴을 부비적거리는 살라만더를 손으로 잡고 쓰다듬었다.
“제드. 그러니까 이 도마뱀들이 홍옥에 갇혀있던 녀석들이라는 뜻이잖아.”
“옙, 원래는 필드에 방생해주는 과정을 흑미 님에게 보여드리려 했던 건데…….”
제드는 의문이라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물고기 같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흑미 님과 눈이 마주친 살라만더 녀석들이 그 자리에 딱! 멈춰 서더라고요. 거기서 흑미 님이 ‘이리 와.’라고 하니까 꼬리까지 흔들면서 뛰어 들어왔지 뭡니까?”
“…….”
기실 예상 못 한 일은 아니었다.
서큐버스라는 몽마의 특성에다가, 구미호 역시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불의 친화력 때문에 살라만더에게 더 강하게 먹힌 모양이군.’
정신계 능력은 상대하기 무척 까다로운 편이었다.
<매혹> 역시 유용한 능력이겠지만, 문제는 흑미가 너무 어리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기껏 생긴 능력을 무작정 쓰지 말라고 하는 건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없애는 일.
룬은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고민에 빠졌다.
‘흠. 차라리 규칙부터 정해줄까.’
아직 초급 능력이기는 하지만 마구잡이로 사용하면 주변이 난장판이 될 게 뻔했다.
그때 흑미가 룬을 보며 두 손을 모았다.
“룬 님, 룬 님. 흑미가 얘들 키워도 돼요?”
길에서 주워온 고양이를 기르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흑미의 눈치를 보던 다섯 마리 불도마뱀들까지 노란 눈을 올망졸망 뜨고 룬을 바라보았다.
“그래. 늘 불조심 잘 하고.”
“신난다!”
“이야. 잘 되셨네요, 흑미 님!”
허락이 떨어지자 흑미가 제 자리에서 폴짝 거리며 손에 살라만더를 하나 꾹 쥐었다.
곁에 있던 제드도 웃으며 손뼉까지 쳐 주었다.
룬은 그들의 축하와 흥분이 모두 가라앉기를 기다린 후, 흑미를 불렀다.
“너, 혹시 네가 불도마뱀에게 사용한 힘이 뭔지 알고 있어?”
흑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방금 알았어요.”
‘다행히 스스로 능력을 발휘했다는 인식은 있군.’
무의식적으로 상시 발동하는 감당 못 할 상황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한시름 놓은 룬은 흑미에게 사뭇 진지한 어투로 일렀다.
“<매혹>…… 아니, 친구를 사귀는 능력은 앞으로 허락받고 쓰도록 해.”
“왜요? 흑미는 친구 많이 만들고 싶은데.”
여우귀가 시무룩하게 접히면서 룬을 올려다보는 흑미에게, 룬은 무어라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흠……. 원래 능력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거든.”
“책임이요?”
“그래. 만약 내가 너 말고 다른 권속들을 엄청 많이 들여서, 다른 녀석들 돌보느라 너랑 볼 시간이 줄어든다고 생각해봐.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조금 쓸쓸할 것 같아요.”
흑미가 귀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역시 충직한 성향답군.’
룬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선택한 그 다섯 마리 살라만더들도 그럴 거다.”
“……!”
그 말에 흑미가 살라만더들의 얼굴을 하나씩 들여다보더니, 이내 결심한 눈으로 조그마한 주먹을 꾹 쥐었다.
“흑미가 얘들 다 똑같이 사랑하고 이뻐해 줄게요.”
“좋아. 힘내라. 네 말 잘 듣게 훈련도 시키고.”
“네! 알겠숩니다!”
좀 전의 시무룩한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어진 흑미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얘들아! 차렷!”
쇽!
쇽!
쇽!
쇽!
쇽!
살라만더들이 흑미의 말에 일렬로 줄을 섰다.
흑미의 눈이 불도마뱀들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다들, 흑미 따라와!”
쪼르르.
“삐약!”
어째서인지 백야 역시 포르르 날아 흑미의 머리 위에 앉았다.
“미래가 참 기대되신다니까요, 흑미 님은.”
제드가 씨익 웃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본 룬이 던지듯 툭 말했다.
“뒤에서 흐뭇하게 보고나 있을 때냐? 빨리 따라가지 않고 뭐 해.”
“아차! 같이 가요, 흑미 님!”
제드가 호들갑을 떨며 밖으로 나가자, 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자연에게 사랑 받는다는 점은 제 어미랑 닮긴 했지.’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는 법이라며, 룬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흑미 일로 잠기운이 완전히 달아난 그는 머리 한구석에 밀어두었던 일을 하나 떠올렸다.
‘지금이 딱 좋겠군.’
룬은 지난 번 복사해 둔 <마력 열쇠>를 손바닥 위로 소환했다.
방금 나간 흑미와 백야, 제드는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테고, 페르디키온도 던전 조사대를 꾸려 나갔다.
조사대는 빠른 클리어보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게 목적이니 돌아올 때까지 반나절은 더 걸릴 터였다.
몰래 열쇠를 실험해보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다.
우웅!
룬은 침대에 누운 채 손 안에 하얗게 빛나는 열쇠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공중에 마력으로 만들어진 반투명한 문이 고대 문자와 함께 조용히 드러났다.
그는 마치 열쇠로 문을 열 듯 손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철컥!
공중의 문이 열렸다.
‘……이건 암시장과 연결된 느낌은 아니군.’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이는 풍경이 제드가 열었을 때 본 마력통로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아주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다름 아닌 깊은 어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공간은 오히려 편안함까지 느껴졌다.
문에 손을 밀어 넣자 마치 주인이라도 맞이하듯 그를 반기는 신비로운 감각이 느껴졌다.
‘들어간다.’
어느새 룬의 모습과 허공의 문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
어둠이 깔렸다.
이동마법과 달리 룬이 두 발로 걸어가야 하는 마력통로가 보였다.
‘역시 암시장은 아니야. 어디로 이어진 거지?’
룬은 발끝으로 바닥을 몇 번 건드려 보고는, 외길을 따라 건너갔다.
조금 전까지 레드 드래곤의 레어에 있었던 탓인지 서늘한 기운이 유난히 뚜렷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룬은 새까만 출구 앞에 다다랐다.
‘이곳으로 나가면 되는 모양인데.’
그는 일단 출구 너머로 손을 뻗어 보았다.
찰랑.
“?”
손을 빼내자 푹 젖어있었다.
룬은 손에서 풍겨오는 짭쪼롬한 냄새를 맡자마자 물의 정체를 알았다.
‘바닷물?’
마력으로 경계선이 그어진 문 너머가 온통 바닷물이었다.
심지어 새까맣게 물들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치 깊은 심해였다.
‘어쩌다가 이런 곳으로 왔지?’
룬은 의문을 품고서 가죽 주머니에서 마력석을 하나 꺼내들었다.
빛 속성 마력에 특히 잘 반응하는, 옐로 다이아몬드였다.
룬은 그 마력석에 빛의 마력을 주입했다.
전승 마법을 받을 때 넘어온 크리스티나의 빛 속성 마력이었다.
반짝이는 빛이 밝고 따뜻한 노란 장미색으로 번졌다.
그때였다.
[……!]
뽀그륵.
무언가가 경계 너머에서 빠르게 헤엄쳐 지나갔다.
‘뭐지? 물고기 지느러미 같았는데, 사람 머리카락이 달려있었어.’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물의 경계 바로 앞까지 다가가 봤지만 너무 어두웠다.
룬은 조명용으로 들고 있던 옐로 다이아몬드를 아예 경계 너머로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