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
반짝이는 마력석이 물살에 밀려가는 순간.
“……?”
[……!]
푸른 눈.
붉은 산호와 하얀 진주로 장식된 긴 머리카락.
그리고 하얀 손가락엔 얇고 투명한 물갈퀴가 붙어있었다.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인어는 잔뜩 놀란 얼굴로 빛나는 마력석을 피해 황급히 도망쳤다.
“야!”
멀어져가는 뒷모습에 대고 소리쳐 봤으나 인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느러미를 흔들며 사라졌다.
‘뭐야?’
룬은 한동안 인어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다시 나타날 것 같지 않자 일단은 포기하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룬이 돌아가면서 마력통로가 사라진 후.
그 뒤로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심해의 인어는 바위 뒤에서 조심스럽게 눈만 빼꼼 내밀었다.
소녀는 빛의 마력으로 반짝이는 옐로 다이아몬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차마 다가가진 못하고 지켜만 보고 있자, 안에 있던 마력이 떨어져가며 빛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
결국 인어는 손을 뻗어, 마력석을 소중히 쥐었다.
하지만 겨우 뻗은 손이 무색할 정도로 빛의 마력은 남은 빛을 모두 소진하고 사라져버렸다.
인어는, 다시 어두운 심해 속에 혼자 남게 되었다.
[…….]
푸른 눈에 방울방울 눈물이 맺혔다가 바닷속으로 사라져갔다.
[흑……. 아파…….]
꼬옥.
새하얀 손이 불이 꺼진 노란 마력석을 꼭 끌어안았다.
[아파…… 아파요…….]
아프다는 말을 띄엄띄엄, 겨우 웅얼거려보던 인어는 빛이 꺼진 심해 속에서 점차 침묵에 잠겨들었다.
긴 물빛 머리카락이 끝자락부터 새까맣게 오염된 인어.
그녀의 목소리는 가슴에 품고 있는 어둠을 숨긴 채, 심해 속에 묻힐 뿐이었다.
***
‘뭐지? 왜 하필 인어가 있어?’
원래 있던 방으로 돌아온 룬은 손에 묻은 바닷물을 닦아냈다.
열쇠를 다시 몸에 흡수시켜 둔 채, 룬은 떠오르는 의문들을 머릿속에 늘어놓았다.
‘게다가 잠깐이었지만 나와 같은 어둠 속성의 마력이 느껴졌는데……?’
블랙 드래곤이 지니는 순수한 어둠의 기운.
아무리 봐도 동류였다.
하지만, 블랙 드래곤은 전멸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참을 혼자 고민하던 룬은 답이 나오지 않자 결국 크리스티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는 가죽 주머니 속에서 크리스티나가 준 연락용 마력석을 꺼내 발동시켰다.
- 어머나, 룬!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고 있니?
“응. 난 잘 있어. 라이도 거기 있어?”
- 물론이야. 안 그래도 옆에서 네 목소리 듣고 신이 나서 돌아다니고 있어.
오랜만에 듣는 크리스티나의 목소리였다.
페르디키온의 레어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숲과 빛의 마력이 가득하던 레어가 그리워지는 기분이었다.
간단한 안부를 나누고, 룬은 본론을 꺼냈다.
“혹시 나 말고 블랙 드래곤이 더 남아있어? 아니면…… 블랙 드래곤과 비슷한 어둠의 마력을 지닌 종족이라든가.”
- 블랙 드래곤과 같은 암속성 마력을 지닌 존재?
마력석 너머 다정한 목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 혹시 블루 드래곤 해츨링 ‘아멜리아’ 이야기니?
“아멜리아?”
룬이 되묻자, 크리스티나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 나왔다.
- 그렇단다. 마력 감응을 해봤을 때 너도 느꼈겠지만, 주속성과 호환되는 속성들이 있어.
“응. 알아.”
- 네가 태어나기 전, 블랙 드래곤이 멸족하자 이 세상에서 어둠의 마력이 사라져가기 시작했지. 처음 겪는 상황에 우리는 대책을 세워야했고, ‘어둠’과 가장 잘 호환되는 ‘물’ 속성의 드래곤이 어둠을 대신 품기로 결정했단다.
오래 된 이야기가 크리스티나를 통해 들려왔다.
크리스티나의 설명대로라면, 룬이 만났던 그 인어가 ‘아멜리아’.
즉 블루 드래곤의 해츨링일 터였다.
-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어린 네게는 이른 이야기야. 너무 신경 쓰진 말렴.
다정하게 권하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룬은 오히려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그 녀석은 물의 일족이 가장 보호해야 할 해츨링일 텐데. 보호받기는커녕 날 보더니 겁만 잔뜩 먹고 도망갔잖아.’
갑자기 마주쳤으니 놀라서 몸을 피할 수야 있다.
다만, 주위에 보호자가 아무도 없었던 점은 영 수상했다.
심지어 녀석은 특이하게도 물과 어둠의 마력을 모두 품고 있는 강자에 속했다.
제 영역에 침입한 자를 두고 도망가는 포식자라니.
오히려 어떻게 들어왔느냐며 화라도 내야 정상이었다.
‘설령 힘이 좀 부족한 어린 해츨링이라 해도, 보호하는 성체 블루 드래곤 하나쯤 있는 게 정상 아닌가?’
설마 그걸까요?
속 시원하게 풀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더 물어봤다가는 그가 암시장 열쇠를 복사해 버린 일까지 줄줄이 털어놔야 했다.
그러니, 이쯤에서 가벼운 흥미인 듯 끊어야 의심을 사지 않을 터였다.
“알려줘서 고마워. 장인 대회가 이번 주 마지막 날에 끝난다는데, 끝나면 선물이라도 사갈게.”
- 늘 몸 조심하렴. 가끔은 이렇게 연락도 좀 주고.
“알았어, 크리스티나. 라이한테도 안부 전해줘.”
인사와 함께 대화를 마무리한 룬은 노란 연락용 마력석을 주머니에 갈무리 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블랙 드래곤이 멸족한 줄 알고 그 인어 녀석에게 어둠을 맡겼다면, 원래는 내가 물려받았어야 했던 힘이라는 소리인데…….’
문제는 순순히 내어줄지 알 수 없을뿐더러, 그 전에 대화가 가능할지조차 의문이었다.
‘역시 당사자를 한 번 더 만나보는 게 좋겠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직접 듣는 게 제일 정확하겠지.’
말 한 마디 붙이기는커녕 모습만 보여도 겁먹고 도망칠 정도다.
아무 대책 없이 찾아갔다가 저번처럼 녀석이 도주해버리면, 언제 또 보게 될지 기약하기 힘들 것 같았다.
‘……명색이 드래곤이면서 무슨 겁이 그렇게 많냐.’
개복치도 저 정도는 아닐 거란 생각에 룬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날 저녁.
룬은 오후 내내 고민했지만, 마땅한 답을 떠올리지 못한 채 식사 자리에 참석했다.
“룬, 무슨 일 있냐? 고민 있어 보이는데.”
“그러게요. 오늘따라 영 표정이 딱딱하시네.”
빵을 먹던 페르디키온과 면을 후루룩 순식간에 흡입한 제드가 물었다.
둘을 번갈아 바라본 룬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움을 구해보기로 했다.
‘제3자인 녀석들에게 자문을 구해보는 것도 좋겠지.’
“별 일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궁금한 건데.”
“뭔데?”
“소심한 여자애는 뭘 좋아하지?”
우뚝.
빵을 집어 들던 페르디키온과 제드의 손이 동시에 멈췄다.
“흑미는 백야랑 룬 님이랑 노는 거요!”
“말은 고맙다만,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이 필요해.”
룬의 대꾸에 흑미가 포크를 입에 물고 ‘그런가?’ 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조용해진 식탁 분위기에 룬이 돌아보자, 페르디키온과 제드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왜 이래?’
그저 암 속성의 힘을 되찾기 위해 블루 드래곤을 구슬릴 조언을 구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페르디키온과 제드에게 쓸데없는 오해를 만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앞뒤를 너무 잘라먹었다.
그제야 룬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젠장. 연애상담 같아졌잖아.’
룬은 고개를 흔들며 감자 조각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번복하자니 더 이상하잖아. 그렇다고 암속성 힘을 포기할 수도 없고. 미치겠네.’
결국 그는 빠르게 발언을 철회했다.
“아냐. 없던 걸로 해. 잊어버려.”
“…….”
“…….”
제드와 페르디키온이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룬은 그들이 무언의 눈치를 주고받는 걸 알았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머쓱한 얼굴로 포크를 움직이기 시작한 제드가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그 뭐랄까. 이 제드, 오래 산 드워프는 아니지만. 여성이 좋아하는 게 뭔지는 좀 알죠!”
“그래?”
“녭. 여성들은 맛있는 것, 예쁘고 반짝이는 것, 마음을 담은 로맨틱한 선물 같은 걸 아주 좋아합니다.”
“호오.”
룬이 흥미로운 시선을 던졌다.
더 말해보라는 듯 가볍게 턱짓을 하자 제드가 어깨를 펴며 말을 이었다.
“예를 들면……. 지나가다가 그분 생각이 나서 산 소소한 액세서리나 꽃도 좋죠. 달달하고 귀엽게 생긴 먹거리도 좋아하고 말이죠.”
“연애를 많이 해봤나 보네, 제드.”
룬은 제법이라는 뜻으로 말했다.
한데, 그 말을 들은 제드가 고개를 슬그머니 떨어뜨렸다.
“……원래 연애 못 하는 사람이 더 척척박사가 되더라고요…….”
“……미안.”
던전공략팀 모집 당시 상품으로 감자칩을 얻어 어떻게든 여자 드워프에게 인기를 끌고 싶었던 제드.
그는 이론만 충만하고 실제 연애 경험이라고는 한 번도 없는 순수한 청년이었다.
“제드, 울어?”
“어휴! 흑미 님, 아닙니다. 오늘따라 마늘이 참 맵네요!”
흑미가 제드를 물끄러미 보더니, 자신의 접시에서 소시지 하나를 포크로 콕 찍어 제드의 접시 위에 올렸다.
“제드 아저씨! 이거 먹어.”
“크흑. 상냥하기도 하시지!”
묘하게 감동하는 제드를 내버려두고, 룬은 남은 차를 전부 털어마셨다.
“잘 먹었어. 오늘은 먼저 좀 들어가 볼게.”
“그래. 쉬어라.”
어쩐지 짠하게 보는 듯한 페르디키온의 대답에 고개만 끄덕인 룬이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룬이 사라진 뒤.
“베르딘.”
“예!”
“룬 주변에 소심한 여성이 있었는지 확인해봐.”
“허허, 알겠습니다.”
은근한 흥미로움이 담긴 눈으로 제드가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걸까요? 어린 시절 첫사랑의 시작은 역시 짝사랑이죠!”
“내 아우가 감히 짝사랑? 녀석이 좋아하는 상대가 있다면 진작 넘어 왔을 거다.”
“예에에…….”
‘불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뻐 죽는다더니.’
제드는 페르디키온의 말에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역시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원래 남의 연애사란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일이기 마련.
‘이야, 게다가 룬 님이 첫사랑을 한다니. 이게 진짜라면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으셨잖아?’
능글능글한 웃음을 흘린 제드는, 이 기회에 점수나 딸 생각으로 저녁을 싹 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있어서 저도 먼저 일어납니다요~!”
여성의 마음이라!
비록 제대로 된 연애는 못 해 본 제드였지만, 친화력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신이 활약할 때라 여겼다.
***
똑똑.
“룬 님.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식사 후 포만감에 젖어 침대에서 배를 두드리고 있던 룬에게 제드가 찾아왔다.
“들어와.”
룬의 허락을 받은 제드는 품에 무언가를 안고 들어왔다.
“룬 님, 이것 좀 보십쇼.”
제드가 들고 온 물건을 본 룬이 눈을 가늘게 떴다.
“드래곤……?”
“제가 또 개혁파 드워프 아닙니까? 아, 물론 장인 대회에 영향 있는 종류는 절대 아니고요.”
“…….”
청탁으로 생각될까 염려라도 된 건지, 제드가 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일단은 저도 개혁파의 대장장이다 보니, 이런 간단한 조각 정도는 제 손으로 해보곤 하거든요.”
제드의 손에는 잠이 든 드래곤의 조각이 들어간 유리병이 들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