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242)

“보시다시피 그냥 보기에는 단순한 조각입니다만, 마력을 한번 넣어보시겠습니까?”

룬은 제드를 한번 보고, 조각을 받았다.

그리고는 제드의 말대로 마력을 주입했다.

반짝.

연한 푸른색으로 된 잠자는 드래곤의 몸에서 빛이 나더니, 유리공 안에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호오.”

화산지대에서는 눈을 구경할 수 없었을 텐데, 다른 지역의 이야기를 참고해 만든 모양이었다.

“어떻습니까? ‘스노우볼’이라고 합죠.”

“흠.”

룬은 인어가 살던 탁하고 어두운 심해 공간을 떠올려보았다.

‘눈이라.’

인어의 몸에 달려있던 장신구가 유백색의 진주들이었던 걸 보면, 생각보다 괜찮은 선물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경계심이 강한 녀석을 낚으려면 관심 가질 만한 미끼가 필요한 법이지.’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도 정도는 해 볼 만하겠어.’

“괜찮은 물건이네. 고맙다.”

“뭘요~ 혹시 잘 되시면 제 공이라는 점만 잊지 말아 주십쇼오.”

“…….”

‘잘되긴 뭘 잘돼?’

제드를 보자, 주책 가득한 아저씨가 입 근질근질해서 못 견디겠다는 눈이었다.

한마디로 밉상이었다.

‘저놈이.’

지그시 피어(fear)를 쓰며 노려보자, 제드는 즉시 고개를 팍 숙이더니 눈을 깔았다.

“아니라고 했다. 말 좀 들어.”

“녭.”

“나가.”

“녭.”

탁.

제드는 즉시 뒷걸음질로 나가 공손하게 문을 닫았다.

정말이지 행동 잘 해놓고 매를 버는 재주가 탁월한 놈이었다.

‘이게 다 내가 어린 해츨링인 탓이다.’

하기사, 남들이 보기에 그는 10년생 블랙 드래곤 해츨링이다.

만나보지도 않은 블루 드래곤 해츨링이 가져간 일족의 힘을 되돌려 받으려 한다니.

일반적으로는 그런 발상이 가능할 리 없었다.

룬은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빨리 나이를 먹든가 해야지.’

그런 푸념을 하며, 룬은 복제한 <마력 열쇠>를 다시 소환했다.

‘가자. 미끼를 놓으러.’

반투명한 마력의 문을 열고, 룬은 익숙한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그는 물로 막힌 경계선 앞에 서서 조각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깨지면 곤란하니 강화 마법도 걸고.’

문 너머로 스노우볼을 내려둔 그는 부수적인 마법을 걸어 물살에 쓸려가지 않게끔 잘 고정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력을 불어넣어 스노우볼 속 파란 드래곤 조각이 반짝이게 만들었다.

‘잠깐 기다려볼까.’

별 기대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심해의 어둠 속.

룬의 마력을 품은 스노우볼 속에서, 잠든 블루 드래곤 조각 위로 소복소복 하얀 눈이 내렸다.

‘역시 안 오려나?’

해류나 물고기 따위엔 쓸려가지 않도록 강화마법을 걸어두었으니 만약 없어진다면 녀석이 가져갔다는 뜻일 터.

‘두고 가면 자신의 영역인 이상 언제고 발견하긴 하겠지.’

겁먹은 아이에게 다가가는 방법으로 룬이 택한 방식은 바로, 모습은 보이지 않으면서 흔적만 남기기였다.

뽀그륵.

스노우볼을 놓아둔 채 미련 없이 돌아서는 룬.

그는 모르고 있었으나, 어둠 속에 숨죽인 파란 안광이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며칠 후.

‘미치겠네.’

룬은 한숨을 쉬었다.

최근 그가 움직일 때마다 관심이 뒤따르기 시작한 덕분에, 넉넉한 자유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워진 탓이었다.

“어어! 룬 님, 어디 가세요!”

“……수련하러.”

“아하아! 혼자서 수우련을 하러 가시는군요! 혼자서!”

“말이 왜 이상한 데서 늘어져?”

“아이고, 제가 무슨 말을 늘였다고 그러십니까아.”

‘저게 은근히 성질 건드리네.’

히죽히죽 웃는 제드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잠들어있던 폭력성이 꿈틀거렸다.

그런가 하면, 페르디키온은 또 어떤가.

“룬. 이거 받아라.”

“? 이런 건 왜?”

페르디키온이 대뜸 건넨 선물은 루비 중에서도 크고 희소가치가 높은 마력석이었다.

“‘해돋이 루비’라는 이름을 가진 보석이다. 듣자하니 액세서리로 만들면 꽤 봐 줄 만하다고들 하기에.”

“……? 마음대로 써도 돼, 이거?”

“물론이다.”

“아하. 챙겨줘서 고마워. 형.”

원래 은근히 챙겨주는 타입이라 생각했지만, 왜 지금 이 타이밍에 보석을 챙겨주는 건지 다소 의문스러웠다.

‘꽤 순도 높은 불의 마력석인데. 페르디키온의 평소 지론대로라면 권속을 강하게 만들라는 뜻이겠군.’

끄덕.

자고로 선물이란 주는 사람의 마음 역시 어느 정도 고려해야 하는 법.

짧은 고민 끝에 룬은 즉시 제드를 불렀다.

“옙! 부르셨습니까, 룬 님.”

“이걸로 괜찮은 펜던트 좀 만들어와.”

“펜던트요? 아하, 아주 잘 알겠습니다요!”

하나만 뽑자

“그리고 예전 살라만더의 봉인구로 쓰고 남은 빈 홍옥 있잖아. 그걸 좀 가져다 줘.”

룬은 제드가 가져온 홍옥을 먼저 살펴서 마력 구조를 확인했다.

‘살라만더가 깃들 수 있는 마력식을 복사해서 조금 변형시키면…….’

그 다음, 루비를 세공하여 만든 펜던트에 마력식을 새겨 넣고 보니 예상대로였다.

워낙 순도 높은 불의 마력석이라, 흑미가 기르는 정령들인 살라만더 보관소로 적격이었다.

흑미는 펜던트를 목에 걸어보고 한껏 기뻐했다.

“고마워요, 룬 님! 얘들도 마음에 든대요!”

“그래.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라. 보석을 준 건 형님이니 감사인사는 페르디키온 형한테도 하고.”

“네! 고맙숩니다, 페르디키온 님!”

“…….”

고개를 꾸벅 숙이는 흑미를 보며 페르디키온은 씁쓸한 눈을 했다.

‘저게 흑미한테 가다니.’

반짝이는 루비 펜던트.

페르디키온의 선물은 사실 어린 아우의 순수한 첫사랑을 응원하기 위한 회심의 서포트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귀한 루비는 서번트 꼬맹이에게 돌아갔다.

묘하게 흥이 식어 보이는 분위기를 느낀 룬은 조금 의아해할 뿐이었다.

베르딘의 묘하게 등 뒤를 따라오는 시선이라던가, 제드 녀석이 슬금슬금 떠보듯이 주변인에 대해 물어오는 일 등.

하나같이 평소보다 룬을 신경 쓰는 바람에 혼자 몰래 인어를 만나러 갈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결국 장인 대회 결승 전날이나 돼서야 시간이 났네.’

연회에 대회 준비까지.

주최자인 페르디키온과 베르딘까지 가장 바빠진 오늘에야 룬은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마침 흑미가 살라만더를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이 퍼지며 드워프들의 흥미를 끈 참이었다.

그들은 흔치 않은 경우라며, 한번 살펴볼 수 있겠냐고 나름대로 정중히 협조를 부탁했다.

흔쾌하게 수락한 룬은 제드 녀석까지 흑미의 보호를 명목으로 같이 대장간에 보내버렸다.

‘정말 간만의 자유로군.’

슬슬 복제 <마력 열쇠>를 꺼내려는데, 머리 위에 백야가 폭 내려앉았다.

“삐!”

“……? 오늘은 웬일로 흑미랑 같이 안 갔냐?”

의아한 목소리에 백야는 고개를 빼서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하얀 날개로 포닥포닥 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삐삣!”

날개를 펼쳐 룬의 머리를 가득 덮고 볼을 비벼오는 새를 보니,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거 어리광인가?’

그간 흑미에게 붙어있으며 선배 역할을 해온 백야였다.

한데 오늘은 제드가 흑미를 따라갔으니 혼자 있을 룬에게 온 듯했다.

‘하긴, 각인 효과로 날 부모처럼 생각하는 놈이었으니.’

알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교감했던 룬은, 백야에게 각별한 존재였다.

룬은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녀석을 가볍게 다독여주었다.

‘할 수 없지. 고작해야 새니까 이 녀석 정도는 데려가자.’

룬은 백야를 내버려둔 채 복제 <마력 열쇠>를 발동시켰다.

곧장 반투명한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마력통로를 따라 걸었다.

룬이야 이제 제법 익숙해진 통로였지만 백야로서는 처음 와 본 장소.

하얀 새는 가는 내내 머리 위의 깃을 빳빳하게 세우며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의 경계 앞.

룬은 어두운 심해 속에서 지난 번 두고 갔던 스노우볼을 찾았다.

‘이런.’

손을 댄 흔적은 있었다.

문제는 가져가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 선물이 별로였나?’

모래 위에 기울어진 모양으로 선 파란 드래곤이 잠든 스노우볼.

룬은 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굽히고 물의 경계선 너머로 손을 밀어 넣었다.

뽀그르르.

‘?’

그때, 멀리 떨어진 바위 뒤에서 공기 방울이 급격하게 피어올랐다.

“…….”

룬은 그 기척을 모른 척하고 스노우볼에 고정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갑자기 아는 체하면 달아날 것 같은데. 모른 척 살펴만 볼까.’

유리 위에 손을 얹은 그는 스노우볼이 잘 작동하는지 확인이나 하려는 사람처럼 마력을 흘려 넣었다.

스노우볼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하자, 주변이 약간이나마 밝아졌다.

유리병 속 하얗게 흩날리는 눈송이와 반짝이는 푸른 드래곤 조각이 은은한 빛을 뿌렸다.

잠시 그 모양을 살핀 룬이 스노우볼을 회수해 가려 하자, 바위 뒤에서 물빛 머리통이 빼꼼 빠져나왔다.

하지만 다가오지는 못하고, 어딘가 불안한 시선으로 룬과 스노우볼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물이 싫은 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인어의 의향을 확인하기 위해, 룬은 스노우볼을 자신 쪽으로 좀 더 당겨보았다.

[……!]

깜짝 놀란 인어의 얼굴이 드러났다.

하얀 얼굴에 물갈퀴가 달린 귀.

해류에 느리게 흔들리는 물빛 머리는 중간부터 검은색으로 물들어있었다.

룬은 인어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스노우볼을 다시 원위치 시켰다.

그러자 인어는 내심 안도한 듯 다시 스르륵, 바위 뒤에 숨어서 눈만 살짝 드러낸 채 룬을 지켜보았다.

“삐이?”

그 순간, 백야가 고개를 기울이며 울음소리를 내었다.

“넌 못 들어간다. 심해에 빠지면 너 따위는 해류에 휩쓸려서 다시 못 돌아올걸.”

드래곤 스킨을 보유한 룬과 달리, 백야는 풍성한 깃털로 뒤덮인 말랑말랑하고 통통한 새일 뿐이었다.

“삐! 삐약!”

룬의 말을 듣기나 한 건지, 백야는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문 너머로 가보고 싶다는 듯 몸을 자꾸만 들썩거렸다.

그때였다.

[……그, 건…… 새야?]

티 없이 깨끗한 목소리.

가늘지만 순수하고 고운 울림이 청량감을 느끼게 했다.

룬은 인어가 백야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걸 눈치채고, 자신의 두 손으로 백야의 날개 밑에 손을 넣어 덥석 들어보였다.

“삐?”

“이 녀석 말이야?”

끄덕.

어느 틈엔가 바위 뒤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낸 인어가 가만히 고개를 움직였다.

“맞아. 이름은 백야라고 해.”

[백……야?]

인어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백야는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또 기울였다.

“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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