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242)

뽀글.

인어의 입에서 짧게 공기방울이 흘러나왔다.

입 모양을 보니, 가벼운 탄성과 ‘백야’라는 혼잣말이었다.

그걸 본 룬은 문득 제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여성들은 달달하고 귀엽게 생긴 먹거리도 좋아하죠!’

“…….”

귀엽게 생긴 먹거리?

백야를 보던 룬은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설마’라고 생각의 진행을 멈추었다.

그 사이, 인어는 백야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바라보는 중이었다.

“가까이 와서 봐도 돼.”

[……!]

하지만 인어는 오히려 바위 너머로 모습을 다시 숨겼다.

룬은 스스로에게 혀를 찼다.

‘너무 서둘렀나.’

다행히도 멀리 도망가진 않고 다시 얼굴을 드러낸 인어.

룬은 침착하기 위해 노력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난 룬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아, 아멜리아.]

“삐약!”

‘역시.’

그의 추측대로였다.

블루 드래곤의 해츨링인 아멜리아는 날개를 파닥이며 우는 백야를 보고 바위 뒤로 얼굴을 또 반쯤 가렸다.

“이 녀석도 반갑다고 인사한 거야.”

“삐이. 삐.”

다행히 백야가 룬의 설명에 호응해 주었다.

아멜리아는 그제야 머뭇거리다 고개를 다시 원래대로 내밀었다.

“이 녀석이 마음에 들어?”

[…….]

끄덕.

미미한 고갯짓을 본 룬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만져보라고 해봤자 또 달아날 테고.’

오랫동안 이 심해에서 살아왔으리라 추정되는 블루 드래곤 해츨링.

예상보다 훨씬 소심한 성격이니 조심해야했다.

‘제드 녀석이 소소한 액세서리도 괜찮다고 했지, 아마.’

고심하던 룬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백야.”

“삣?”

“깃털 하나만 뽑자.”

“피……?”

룬은 백야의 속털을 뒤적이다가, 적당히 부드럽고 잘 자란 깃을 가볍게 뽑아들었다.

뽑!

다행히 백야는 제 깃털이 뽑힌 줄도 모르고 고개만 갸우뚱 기울였다.

“자. 기념으로 줄게.”

꺼지지 않는 불의 마력을 머금었다는 불사조의 깃털.

룬은 깃털에 빛을 내는 마법식을 새겨 넣었다.

‘마력 실뜨기로 진을 새기는 능력, 진짜 유용하네.’

포옹.

룬의 마력을 머금은 하얀 깃이 은은하게 빛을 뿜기 시작했다.

그는 깃털이 물에 젖지 않도록 방수 마법을 건 뒤, 스노우볼 옆에 깃을 놔두었다.

아멜리아의 시선이 불사조의 깃털과 스노우볼에 고정되었다.

‘그러고 보니 제드의 조언이 은근히 쓸모가 있군.’

최근 밉상 짓을 하긴 했지만, 조언들이 잘 맞아 떨어져 유용했다.

깃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아멜리아.

오늘은 이 정도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룬이 백야를 앞으로 내밀었다.

“우린 이제 가 볼게. 백야, 너도 인사해.”

“삐약!”

[아…….]

아멜리아는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하늘거리는 지느러미가 달린 꼬리 끝을 미미하게 떨어 보일 뿐.

인어는 떠나가는 룬 일행을 제지하지도, 인사를 하지도 못했다.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행동에 룬이 먼저 한 마디 했다.

“그러고 보니, 스노우볼은 마음에 안 들었나보네. 치워줄까?”

인어가 고개를 느리게 도리질했다.

그리고 말을 갓 배운 사람처럼 느리게 단어를 하나씩 골라 입에 올렸다.

[마음에…… 들어. 거기에. 두면, 네, 네가…… 올 테니까.]

‘호오.’

아멜리아의 대답에 룬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날 기다렸다니. 예상치 못한 수확인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했다.

블루 드래곤 해츨링의 거주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폐허.

물건은커녕 당연히 있어야할 해츨링의 보호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물 속성 드래곤이라도 주변이 저 지경이면 온기가 그리울 만했다.

‘심지어 아직 어린 녀석이니.’

룬은 여유롭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 상황을 보아하니, 인어에게 신뢰를 얻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았다.

“그래? 그럼 다음에 또 와도 괜찮다는 거지?”

[…….]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인 아멜리아를 보며 룬은 미소가 떠오르려는 걸 감추기 위해 애썼다.

“그래. 그럼 슬슬 가봐야겠다.”

[…….]

어쩐지 아쉬워하는 표정의 아멜리아.

하지만 진짜로 가야할 시간이었기에 대화는 여기까지 해야 했다.

‘성과도 있었지.’

룬은 아멜리아가 비언어적인 표현으로나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긍정적인 신호로 여겼다.

아직 경계심이 남아있다는 걸 감안하면, 친밀도가 상당히 올라갔다는 말이었으니까.

“다음에 또 보자, 아멜리아.”

“삐얏!”

두 날개를 활짝 편 백야가 몸을 쭉 위로 뻗어 올리며 날갯짓을 해보였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주저하다 살짝 한 손을 들어 느릿느릿 흔들어주었다.

‘좋아.’

룬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벌써부터 옳다구나 하고 어둠을 넘겨달라고 덤빌 만큼 무모해선 안 되었다.

‘다음에 볼 때에는 더 괜찮은 물건을 가져와봐야겠군.’

귀여운 걸 좋아하는 듯하니 그점을 더 공략해 볼 생각이었다.

‘근데…… 이래서 언제 힘까지 돌려받지?’

갈 길이 멀어보였다.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보상이 큰 작업이었다.

‘그래, 얻을 힘이 큰 만큼 신중해야지.’

룬은 힘을 갖춘 후의 자기 모습을 상상하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한편, 아멜리아는 룬이 가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느리게 하얀 깃털이 있는 장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건 못 참지!

[……룬. ……백야.]

방문자들의 이름을 잊기라도 할까 하나씩 읊어본 인어.

그녀는 물갈퀴가 있는 손을 뻗어 빛을 뿌리는 하얀 새의 깃을 쥐었다.

차가운 손에 처음으로 닿은 온기와 마른 깃털의 보드라움이 느껴졌다.

[따뜻, 해…….]

인어는 깃털을 하얀 뺨에 살며시 대 보았다.

차가운 심해에서 느낄 수 없었던 온기는 그녀의 몸을 좀 먹고 있는 아픔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만들었다.

***

드디어 장인 대회 결승 날이 되었다.

룬이 등장할 차례는 맨 마지막 순서였다.

대회의 공정성을 위해, 그에게는 일체의 정보도 공개되지 않도록 전날부터 드워프들의 접근이 모두 차단된 상태였다.

‘덕분에 편했지.’

기지개를 켠 룬은 방에서 대기했다.

얼마 후,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드워프가 밖에 서서 룬의 차례를 알렸다.

“룬님, 슬슬 준비하시랍니다.”

“그래.”

흑미는 개혁파 드워프들이 손수 만들어 준 귀여운 치마를 입고 방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학예회 할 때 입을만한 부드러운 소재로 된 치마였다.

‘드워프들과 즉석으로 축하 공연 준비한다더니.’

어제 급히 대회 말미에 추가된 흑미의 엔딩 공연.

어쩌다 살라만더들과 재미있게 춤을 추자는 기획이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흑미가 무척 즐거워보였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낮부터 지치지도 않고 리허설을 하고 온 흑미는 볼까지 빨갛게 상기되어 열이 올라있었다.

“룬 님! 이 옷 예쁘죠!”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어. 잘 어울리네. 안 그래도 연습 열심히 하는 것 같더라. 공연은 대회 끝날 때 선보인다고?”

흑미는 양 볼에 손을 대고 헤실 웃었다.

“맞아요! 룬 님도 보실 수 있게, 흑미 차례를 룬 님이 우승자 결정한 다음으로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잘했어.”

‘살라만더와의 호흡을 맞춘 춤이라니, 흥미롭긴 하군.’

드워프들에게 벌써 ‘정령의 춤’이라는 프로그램 이름까지 붙어서 홍보되고 있을 정도였다.

‘가볼까.’

룬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깃을 점검하고 결승 무대로 향했다.

워낙 폐쇄성 강한 마을이라 해도, 거의 대부분의 드워프가 모인 연병장은 인산인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허례의식 없이 바로 작품을 선보이는 최종전.

적절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룬 님께서 입장해 주시겠습니다!”

룬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박수갈채와 함께 모두의 기대감 어린 눈들이 그에게 쏠렸다.

“자! 그럼 대망의 결승전! 이제부터 룬 님의 선택으로 최종 우승 드워프 장인이 결정됩니다!”

심사위원이자 사회자인 베르딘은 뱃속에서부터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공정성 있는 평가를 위해 룬 님에게는 작품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럼, 첫 번째 작품을 공개하겠습니다!”

촤악!

두꺼운 천이 단번에 걷히자 드워프들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붉은 비단이 깔린 단 위에 단출하면서도 시선을 끄는 고급스러운 금빛의 무늬가 유려하게 새겨진 창과 방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룬 님의 비늘을 사용하여 사용자와의 최적화에 강점을 둔! 작품명 <무엇이든 꿰뚫는 창과, 무엇이든 막아내는 방패>입니다!”

“오오오오!”

간간히 욕지기와 저게 말이 되냐는 아우성이 들렸다.

하지만 실력이 상당한 드워프들 중 설명에 특화된 자들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명장의 작품 구조를 뜯어보며 저들끼리 분석하기 시작했다.

“역시 쿠안인가!”

“1회차 ‘위대한 대장장이’의 실력은 여전하군.”

“마력석을 제련한 솜씨 좀 보게. 저 문양 하나하나가 마력석을 녹여 새겼어! 덕분에 저 무구 전체에 마력을 순환하게 만들고 있지.”

하나같이 대단하다는 말과, 그 이유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물론 비웃음 섞인 평도 있었다.

“뭐든 뚫는 창과 뭐든 막는 방패라니. 저게 말이야, 방구야?”

“오래 사시더니 감을 잃으셨나보군.”

그 말을 들은 드워프가 도끼눈을 뜨고 기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네놈들 어디 공방 출신이야?”

“말뽄새 한 번 더럽네.”

“뭐! 해보자는 거야?”

저 뒤쪽에서는 벌써 주먹질까지 오가고 있었다.

다행히 익숙한 일인 듯, 베르딘의 눈짓으로 고르반과 우드가 뛰어나갔다.

그리고 싸우는 드워프들의 머리를 적절하게 어루만지며 기절시켰다.

“다음, 두 번째 작품을 공개합니다!”

촤악!

“저게 뭐야?”

“그냥 돌 같은데? 조각?”

“무구를 만드는 게 아니었어?”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인 와중에, 개혁파에 속한 대장장이들은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었다.

“마찬가지로 룬 님의 비늘을 사용했으며, 드워프족의 발전을 위한 기능성을 중점에 두었죠! 바로 작품명 <전쟁이 아닌 진정한 번영을 위하여!>입니다.”

“힘이 있어야 점령하던 야만의 시대는 끝난 지 오래!”

“암, 이젠 자기만의 생각과 사상을 존중받는 시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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