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글.
소리 없이 감탄을 터트린 아멜리아의 눈이 몇 번 깜빡거렸다.
[느, 늘…… 나한테, 이런 걸…… 가져와줘서, 고…마워.]
“천만에.”
어둠 일족의 힘을 회수하기 위한 밑 작업이었지만, 사실대로 말해 줄 수는 없었다.
내친 김에 룬은 우승 작품들을 모두 꺼내 보여주었다.
“혹시 여기에서 더 마음에 드는 거 있어?”
잠시 머뭇거리던 아멜리아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물건들을 구경했다.
살금살금 눈치를 살핀 물빛 소녀가 조심스럽게 하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이거.]
“……이거라고?”
룬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멜리아의 손끝이 가리키는 건, 다름 아닌 전통파 드워프의 야심작 <무엇이든 뚫는 창>이었다.
“너 이거 다룰 줄 알아?”
아멜리아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룬이 보기에도 이 소녀는 무기라고는 식칼도 잡아 본 적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창을 고르다니.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인가.’
어쨌든 잘 된 일이었다.
생각이 많을 때는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게 도움이 되는 법이니까.
“내가 창 쓰는 법 가르쳐줄까?”
“!”
아멜리아의 볼에 홍조가 피어오르며 눈까지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어깨가 축 내려가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보였다.
“이유가 뭔데?”
인어가 시선을 모로 내리깔며 기운 없이 입을 열었다.
[그랬다간……. 너, 너도, 내가 가진 어둠에…… 잡아먹힐… 거야.]
‘어둠에 잡아먹힌다고?’
어떤 힘이든 자연스럽게 제 것으로 만드는 룬과 달리, 아멜리아는 순수한 물의 마력을 가진 블루 드래곤 해츨링이었다.
어둠의 마력을 제대로 융화할 수 없는 해츨링에게, 이는 독으로 작용했음이 분명했다.
‘어릴 때부터 어둠을 품기만 했을 뿐 제대로 다룬 게 아니었군. 어둠을 완전히 자기 힘으로 흡수하진 못했어.’
룬에게 이는 희소식이었다.
그가 어둠의 힘을 가져가도 아멜리아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으니까.
룬은 씨익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그럴 일 없으니까.”
[무……슨?]
“그러고 보니, 내 본모습 본 적 없지?”
백 마디 설명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확실한 법.
룬은 폴리모프 아티팩트인 황금 팔찌를 손목에서 빼냈다.
파앗!
“뀨!”
‘봐라! 이게 진정한 나다.’
빨간 눈동자를 가진 까만 해츨링.
룬은 아멜리아가 자신의 몸을 제대로 볼 수 있게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는 눈이 동그래진 인어에게 전음을 보냈다.
[자, 보다시피 나는 블랙 드래곤 족 해츨링이야. 어둠은 내 일부나 마찬가지라고.]
[……!]
아멜리아는 블랙 드래곤인 룬의 본모습을 보고 무척 놀랐다.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는 말이 이런 뜻이었다니!
아멜리아는 눈에 띄게 반색하는 한편, 염려가 드는 바람에 다시 되물어왔다.
[정, 말……이야? 너, 넌…… 이, 렇게 작은데……도, 괜찮아?]
[물론이지. 내가 아직 좀 어리긴 하다만, 그렇다고 어둠의 일족이 아닌 건 아니잖아?]
이야기하는 동안 룬의 꼬리가 기분 좋게 흔들거렸다.
그걸 본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살짝 제 입을 막았다.
‘앗, 귀여워!’
반면 룬은 아멜리아가 너무 놀라서 입을 막았다고 생각했다.
‘흠, 또 무서워하다 달아나기라도 하면 안 되는데. 어쩌지?’
룬은 아멜리아가 겁먹지 않도록,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얌전한 모습을 취했다.
바로 네 발을 모아서 엎드린 자세였다.
거기에 더해 백야까지 불러 머리 위에 내려앉게 했다.
“삐약!”
“뀨우.”
‘어떠냐. 이 정도면 무섭지는 않겠지.’
룬은 슬슬 흔들리는 꼬리를 내버려 두고 무해한 얼굴로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놈이야
다행히도 이 계획은 잘 통했다.
아니, 오히려 아까보다 더 기껍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역시로군. 작고 무해한 걸 더 편하게 여긴다면 아무래도 이 모습이 잘 먹히겠어.’
묘하게 경계심이 내려간 아멜리아의 모습을 확인한 룬은, 슬그머니 생각해둔 제안을 입에 올렸다.
“뀨우.”
[보아하니 어둠 때문에 많이 힘들었던 모양인데, 내가 좀 도와줄까?]
[……! 으, 응.]
블루 드래곤이 태생적으로 물을 다루듯, 블랙 드래곤 역시 어둠을 손쉽게 다룬다.
당연한 상식을 떠올린 아멜리아의 고개가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위 아래로 작게 흔들렸다.
“뀨우, 뀨우.”
[잠깐만 기다려.]
룬은 백야에게 심해에서도 충분히 버틸 수 있도록 마법을 걸어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어린 새의 안전을 확보한 그는 드디어 앞발로 창을 끌어안고 두 발로 섰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서, 아멜리아는 어쩐지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꾹 참았다.
“뀨귯.”
[그럼 그쪽으로 건너갈게.]
룬이 전음을 통해 말하자 소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좋아. 이제 수련을 핑계로 어둠의 힘을 회수하면 되겠어.’
속으로 일석이조라 생각하며 흐뭇해진 룬이 뒤뚱거리며 물의 경계선을 건넜다.
촤앗!
‘압박이 상당하네.’
어느 정도 방비는 했지만 물의 압력이 워낙 강하다 보니 몸이 무거워졌다.
중력이 온몸을 압박하는 와중에 손과 발에 훈련용 모래주머니까지 채운 것 같았다.
‘이런 심해에서 수련한다면 성장폭이 아주 크겠는걸.’
대충 던진 제안이었는데 의외로 환경이 수련하기에 아주 적합했다.
룬은 흡족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풍선처럼 동그랗게 마력의 벽으로 둘러싸인 백야.
녀석은 해류에 몇 번 쓸리는가 싶더니 금세 적응하여 물속을 누비고 다녔다.
새라서 그런지 균형 감각이 좋아보였다.
마음을 놓은 룬은 빙그르르 돌아다니기 바쁜 백야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자, 이거 받아.]
상대의 방어력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힘을 지닌 창.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여차하면 룬은 다음 장인 대회의 상품을 노리면 될 일이었다.
‘제 몸이 상하면서도 어둠의 힘을 지금껏 간직해온 녀석이니, 이 정도는 답례는 해둬야겠지.’
룬은 한 쪽 앞발로 아멜리아에게 <무엇이든 뚫는 창>을 건넸다.
[와아……!]
뽀글.
물빛 소녀는 창을 소중하게 받아 안으며 진심으로 기쁜 얼굴을 했다.
꼬옥.
[고…… 고마워. 룬.]
“뀨.”
룬은 이무기 시절, 섬에 제물로 바쳐진 인간들을 수련시켜주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느낌이 드는 녀석들이 몇 있었지.’
순진하고 재능 있는 제자들 생각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이제 그걸 들고, 빈 허공에 가로로 선을 긋는다는 생각으로.]
스읏!
[이렇게 움직여 볼래?]
간단한 적성 테스트였다.
짧은 앞발로 시범을 보이는 룬을 유심히 지켜본 아멜리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들린 창을 물끄러미 쳐다본 아멜리아는 이윽고 창대를 잡고 룬을 등졌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은 인어는 창을 뻗어 바다를 가르듯이 가로로 휙 그었다.
사앗!
아니, 진짜로 갈렸다.
‘깔끔하네.’
물길이 위 아래로 잠시나마 양단되어버릴 정도로 완벽한 선.
‘이게 창을 처음 잡는 자의 움직임이라고?’
단단하게 쥔 손. 자연스러운 직선.
너무나 당연하게 천재의 영역을 보여준 아멜리아를 보며, 룬은 속으로 감탄했다.
‘이거……. 진짜로 재능이 있는 녀석이었어.’
아무리 소심해 보이지만 역시 드래곤이었다.
백년을 수련한다 해도 가지지 못하는 자가 수두룩한 ‘재능’이 거기에 있었다.
그 사이 소녀는 창을 쥔 채 소심하게 돌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나……. 자, 잘 한 거야?]
[엄청.]
즉답이었다.
어?라고 되물어보는 아멜리아에게, 룬은 앞발을 꼬아 팔짱을 꼈다.
[잘 됐다. 너 재능이 있어. 창술은 금방 늘 거야. 그리고 그건 이제 네 무기니까, 이름은 네가 지으면 돼.]
[내, 내가……?]
고개를 끄덕인 룬에게서 시선을 돌린 아멜리아가 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게 웃으며 속삭이듯 입을 달싹였다.
[그럼…… ‘멜’. 멜이라고 할래.]
“뀨욱.”
누가 봐도 자기 이름에서 따왔음이 느껴졌다. 그만큼 애착을 두기도 쉬울 거라 생각하며 룬은 말을 이었다.
[좋아. 멜을 사용하기 전에, 우선 네 몸에 깃든 그 어둠부터. 내가 확인 한번 해 봐도 돼?]
[어……떻게?]
[손 좀 빌려줘.]
룬이 자신의 까만 앞발을 스윽 내밀었다.
적당히 통통하고, 분홍빛 젤리가 있는 까만 앞발.
그립감이 매우 좋아 보였다.
아멜리아는 그를 빤히 보다가 손으로 조심스레 앞발을 잡았다.
한편, 블루 드래곤 해츨링에게 깃든 어둠을 가늠해 본 룬은 미간을 구겼다.
‘……망했는데?’
오랜 기간 지녀온 탓에 어둠이 아멜리아와 상당 부분 융화되어있었다.
억지로 한 번에 빼내려 들다간 신체가 쥐어뜯기는 고통을 겪어야 할 터.
드래곤이 강하다곤 하나, 생살을 뜯기는 감각을 아직 어린 녀석이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뀨후우우.”
뽀글 뽀글.
그는 한숨을 쉬며 바닥에 털썩 앉았다.
아멜리아는 고민에 몰두하느라 앞발에 턱을 대고 있는 검은 해츨링을 빤히 쳐다보았다.
고민 끝에 룬은 결단을 내렸다.
‘이건……. 이 녀석이 스스로 힘을 다뤄서 조금씩 꺼내게 해야겠네.’
끄덕.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이 방법뿐이었다.
룬은 앞발을 흔들어 아멜리아에게 이리 앉으라고 손짓했다.
인어를 닮은 소녀가 꼬리를 옆으로 접어 앉으며 얌전히 룬에게 시선을 두었다.
룬은 네 발로 바닥을 딛고 허리를 펴며 바른 자세를 취했다.
[기운을 잘 순환할 수 있도록 돕는 자세와 호흡법을 가르쳐줄게. 꼭 나랑 같은 자세를 취하지 않아도 되니까, 자신에게 가장 편안한 자세로.]
그 말에 아멜리아가 머뭇거리더니, 창을 허벅지 위에 가로로 두고 허리를 세웠다.
[좋아. 이제 잘 봐.]
스읍. 하.
잔잔하고 깊은 호흡이 밀려들어갔다가, 이내 몸 전체를 일주하고 입으로 느리게 흘러나왔다.
“뀨후우, 뀨후우.”
[들숨에 물의 기운을 실어서 너에게 흡수시키고. 다시 빈 호흡을 내보낼 때 널 힘들게 하는 어둠을 실어 보낸다고 생각해봐.]
[응.]
날 때부터 마력을 숨 쉬듯 운용할 줄 아는 드래곤의 후예다웠다.
아멜리아는 살며시 눈을 감고 물의 마력을 느끼며 차분히 숨을 들이마셨다.
스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