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마력에 반발하듯 어둠의 마력이 격렬하게 저항하려 들었다.
폐부를 찌르는 고통이 완전히 몰려오기 전.
후우-.
아멜리아는 물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몸에 흡수했다.
그리고 내뱉는 숨에 어둠을 모아 입 밖으로 천천히 밀어냈다.
‘됐다.’
조용히 지켜보던 룬은 기회를 노려 아멜리아가 꺼낸 어둠을 자연스럽게 흡수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작은 알갱이 같은 어둠을 몇 번이나 흘려낸 아멜리아가 편안한 얼굴로 물빛 눈을 들어보였다.
[신기해……. 조금…… 편해졌, 어.]
“뀨!”
[그러게. 잘하더라.]
룬 역시 씩 웃어주었다.
그러나 다시 엄한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도 자세나 기운을 계속 봐줄게. 나랑 수련할 때마다 이 호흡법으로 시작하자.]
[으, 으응…….]
몸을 짓눌러온 고통을 덜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아멜리아가 기쁜 듯이 두 손을 꼭 모아 쥐었다.
그리고 어둠에 휘말렸던 이들을 떠올렸다.
‘다들, 조금만 기다려 줘요……. 내가 금방 깨워줄 테니까.’
아멜리아는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
페르디키온의 레어는 오늘따라 분주했다.
특히, 드워프성 이동 마법진이 있는 방에는 오랜만에 많은 인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벌써 가려는 거냐?”
“응. 볼 일도 끝났고, 크리스티나의 레어에 돌아가야지.”
페르디키온은 영 아쉬운 표정이었다.
“자주 놀러가마. 아우님.”
“응. 언제든지 환영해, 페르디키온 형.”
룬의 대답에 페르디키온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무어라 콕 찍어 말하기 어려웠지만, 장인대회 때 파안대소를 터트리던 이후 표정이 훨씬 풍부해진 느낌이었다.
“그래. 크리스티나님의 레어까지는 내가 마중하마.”
‘페르디키온 녀석. 요 며칠 분위기가 좀 바뀌었네. 거칠 게 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늘 짱짱하게 당겼던 활시위가 느슨하게 풀어진 느낌이었다.
최근 페르디키온은 대화를 하며 즐겁게 호응하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어 집중하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자신의 분위기로 상대를 끌어들이는 매력이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놈이야.’
룬은 페르디키온이 좋은 성군이 되리라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들 갈 준비 됐어?”
“녭! 룬 님!”
룬의 물음에 제드가 가장 먼저 대답했고, 다른 개혁파 드워프 서넛 역시 긴장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합이 들어간 대답과 달리 그들은 무척이나 떨려보였다.
늘 대범했던 드워프족인 그들은 드물게 긴장한 눈빛으로 쑥덕였다.
“내가 들어보니, 이동 마법에 오를 때 신발을 벗고 한 번에 뛰어 들어가야 예의라던데?”
“아닐세. 무사히 도착하기를 빌며 마력의 기류에 휩쓸리지 않게 옆 사람 손을 꼭 잡고 있으랬네.”
“어허. 다들 제대로 알아온 놈들이 없는 모양이군! 내가 마도공학을 좀 아는 놈에게 좀 들었지. 그 놈 말이, 이동시 기압의 차이가 있어서 크게 하품을 한번 하고 타야 한다더군.”
처음으로 타보는 이동마법진에, 그들은 서로 어디선가 주워들은 엉뚱한 팁을 나누고 있었다.
바로 룬과 함께 레드 드래곤의 레어를 떠나는 제드.
그리고 세 명의 개혁파 드워프들이었다.
이에 관련된 논의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명목상 이유로는 룬을 주인으로 따르기로 했다는 서번트 계약 핑계.
그러나 사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인간계에 나가 드워프의 문물을 전파할 속셈이었다.
“좋아! 개혁파 선발대, 가자!”
“우오오!”
막중한 사명을 띤 개혁파 드워프들의 눈빛에 열의가 가득했다.
“흑미도 준비 다 됐어요!”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며 인기를 독차지 하던 흑미는 드워프들의 아쉬움을 샀다.
이곳에 모인 드워프족 대부분은 흑미를 배웅하기 위한 자들이었다.
“흑미 님이 떠나신다니. 크흑.”
“그 동안 본 모습, 잊지 못할 거다!”
“꼬맹아! 또 함께 던전을 깨자! 너에겐 전사의 자격이 있으니 언제든 찾아와라!”
흑미의 인기는 떠나는 날까지 식을 줄 몰랐다.
‘덕분에 덤도 많이 얻었지.’
흑미에게 딱 맞는 온갖 기념품과 장비, 옷.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액세서리는 고이 룬의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갔다.
‘이것들 장인대회 때 제출한 결승과제보다 더 힘쓴 것 같은데?’
묘한 의혹에 휩싸인 룬을 두고, 흑미가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었다.
“다들 다음에 볼 때까지 건강해요!”
흑미는 양손을 모두 들어 드워프들에게 붕붕 흔들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코를 쿨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기다리마!”
“보고 싶을 거야!”
손을 흔들며 까르르 웃는 흑미에게 꼭 다시 오라는 부탁이 쏟아졌다.
그리고 백야는 자연스럽게 흑미의 머리 위에 올라가 앉았다.
꽤 호쾌하네
“다들 안녀엉!”
“삣, 삐약!”
흑미의 명랑한 인사와 백야의 새소리를 끝으로, 페르디키온의 이동 영창이 시작되었다.
은은한 불티와 유황냄새가 사라지고, 맑고 깨끗한 청량함과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햇살과 은은한 허브 향.
금빛이 풍요롭게 흐르고 레어 전체를 아우르는 치유의 기운.
룬은 익숙한 공기를 느끼고 빙긋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네.’
이동 마법의 빛이 사라지고,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풍경에서 그는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때맞춰 청명한 푸른 시선이 온화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렴. 다들 고생했어.”
“다녀왔어.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가 룬의 첫 귀가를 반겨주었다.
‘마중이라.’
룬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간만에 온 빛의 둥지는 왠지 더 반갑고 정겨운 기분이 들었다.
[ㅇㅅㅇ/]
“라이. 너도 잘 있었냐?”
빛 덩어리가 답하듯 두세 번 깜빡였다.
그리고 소리 없이 날아와 백야와 흑미의 주변을 한 번씩 맴돌았다.
“꺄아! 라이다!”
까르륵 웃으며 반기는 흑미와, 부리로 빛을 콕콕 찔러보는 백야.
그 사이 페르디키온도 크리스티나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그래. 그동안 룬을 잘 챙겨줘서 고마워.”
룬은 페르디키온이 중간중간 크리스티나에게 안부를 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츨링을 맡은 불의 레어 주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종종 연락했지만, 특히 신경 써 왔겠지.’
크리스티나는 그 부분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인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모았다.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식사부터 하러 가자꾸나.”
“좋아.”
룬이 대답하자 백야와 흑미는 자연스럽게 따라왔고, 마음의 준비도 없이 무려 빛의 레어의 주인.
골드 드래곤 장로를 마주하고 굳어버린 드워프들은 페르디키온이 인솔했다.
그들은 나중에서야 인사가 늦었다며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으나, 크리스티나는 그에 개의치 않고 고개를 까닥였다.
일개 드워프가 골드 드래곤의 장로를 대면한다?
당연히 머리가 굳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드워프들의 뒤늦은 인사를 우아하게 받아준 그녀는 그대로 무영창 이동마법을 시전했다.
마법에 익숙하지 않은 드워프들은 눈앞이 갑자기 바뀌는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리고 놀란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긴 응접실 식탁 위에 차려진 성찬을 보고야 말았다.
다들 눈을 홉뜨고 입을 벌렸다.
모든 요리에는 은은한 마력이 감돌고 있었다.
버터를 아낌없이 넣어 구운 크루아상, 통째로 훈연한 돼지고기 바비큐.
거대한 솥 째로 올린 고기스튜.
자극적인 맛을 내는 향신료 통이 자리마다 배치되어있었다.
거기에 튀긴 감자나 야채들도 큰 접시위에 가득 올려두었다.
‘크리스티나의 평소 식사차림을 생각하면……. 꽤 호쾌하네.’
거친 식감에 익숙한 드워프들을 고려했음이 틀림없었다.
호밀빵과 바게트, 신선한 우유가 든 병.
비록 맥주는 없지만, 목을 축일 잘 숙성된 포도주까지.
꿀꺽.
드워프 중 하나가 굵직하게 침을 삼켰다.
룬은 간만에 차려진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상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식사의 풍족함이 남다르군.’
게다가 그의 앞에도 과일이 들어간 병이 통째로 내놓아져 있었다.
‘혹시……?’
룬은 그 병을 잡아 살짝 흔들어보았다.
얼핏 코끝에 느껴지는 향은 과실주를 연상케 했다.
‘진짜……?’
어쩌면 드워프들의 문화 덕분에 술에 관대해진 게 아닐까!
룬의 기대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다들 고생했어요. 환영의 의미로 차린 것이니 편히 들어요.”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삣!”
크리스티나의 말에 여기저기서 인사와 함께 부지런한 손놀림이 시작되었다.
룬도 입맛을 다시며 눈앞의 포도주빛 음료를 컵에 따랐다.
‘……!’
목을 시원하게 넘어가면서 탁 터지는 맛!
달달한 과실의 맛이 진했다.
자극적인 달콤함과 상쾌한 목 넘김이 자꾸 입맛을 당기게 했다.
탁.
잠시 후, 룬은 아련한 눈으로 내려둔 빈 잔을 바라보았다.
‘이건 그냥 과일주스잖아!’
술이라곤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과일 샹그리아.
술꾼은 어리석고 같은 기대를 반복한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혹시나 싶은 마음을 품었던 룬.
역시, 그에게 술은 아직 먼 이야기였다.
이런 소소한 아쉬움을 제외하면 식사는 훌륭했다.
드워프들은 배가 터지도록 먹었으면서도, 두 번 다신 없을 성찬에 대한 탐욕으로 한계 이상을 먹어치웠다.
실제로 그들에게 크리스티나의 레어에서 접하는 식사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터였다.
“후훗. 살면서 드워프를 인간세상에 정착하도록 돕는 일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
크리스티나가 흥미로운 듯 우아하게 포도주잔을 기울였다.
제드를 따라온 개혁파 드워프들은 인간계에 가서 자리를 잡기로 했다.
마침 인간계에 대해 잘 알고, 도울 수 있는 수단도 제시할 수 있는 크리스티나가 조력해 주기로 한 참이었다.
덕분에 개혁파 드워프들의 정착 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문득, 룬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크리스티나, 나도 인간계에 같이 가보고 싶어.”
“그게 무슨 말이니?”
크리스티나의 반문은 타당했다.
인간계에 유희를 가기에 10살의 해츨링은 어려도 너무 어렸다.
룬 역시 허가받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인간계는 온갖 정보와, 던전. 종족들이 모인 장소다. 다양한 자들이 자신의 강점을. 약점을 이용해 살고 있지. 그 다양하고 거대한 생태계를 봐둘 필요가 있어.’
거기에 다른 던전을 경험할 기회도 있다면 더 좋았다.
“내 권속이 처음으로 인간계에 나가 자리를 잡는 거잖아. 권속을 거느리는 자가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의욕이 타오르는 대답에 크리스티나가 부드럽게 웃었다.
“기특해. 마음가짐은 여느 드래곤 못지않구나.”
상냥한 칭찬이었다. 하지만 룬은 그 안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을 느끼고 혀를 찼다.
‘이거 텄네.’
아니나 다를까. 표정까지 굳어진 크리스티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래도 그것만큼은 어떤 말을 해도 들어 줄 수 없어. 똑똑한 너라면, 이유는 말 안 해도 알겠지?”
그녀는 관대한 편이지만, 결코 어길 수 없는 부분에서는 타협이 없는 드래곤이었다.
페르디키온의 레어도 상당히 많이 봐준 셈이니.
‘칫. 아쉽네.’
크리스티나와 하루 이틀 있던 게 아니었다.
기특하다며 칭찬으로 운을 뗄 때부터 거절이 오리라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였다.
다만, 이 발언은 엉뚱한 곳에 영향을 끼쳤다.
“룬 님! 크흑, 걱정 마세요. 제가 룬 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안심하고 지내다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룬이 고개를 돌려 제드를 보니, 그의 눈빛은 감동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 네가 왜?’
제드뿐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 제드와 함께 온 개혁파 드워프들도 존경이 가득 담긴 눈으로 룬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