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도 힘내겠습니다!”
따라온 다른 드워프가 고개를 푹 숙였다.
“드워프들을 진심으로 헤아려주는 드래곤 족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제대로 믿지 않았었는데……. 이 못난 드워프가 지금까지 룬님을 크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연기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참회하고 있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하고, 존경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
제드와 세 드워프는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룬이 무어라 할 말을 잃고 그들을 바라만 보고 있자,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우님은 속이 깊군. 자기 권속을 아끼는 마음은 반드시 보답을 받기 마련이지. 훌륭해.”
“…….”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룬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모습을 보다 한 마디 얹었다.
“……기대할게.”
“우오오! 개혁파 드워프 힘내자!”
“우오오오오!”
“드래곤의 신의를 얻은 우리 선발대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우오오오오오!”
“가자!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 드워프들이여!”
드워프들은 엄청난 의욕을 불태우며, 앞 다투어 룬에게 충성의 맹세와 포부를 남겼다.
룬은 차마 인간계로 가고 싶었던 사적인 야욕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은 끝내 알리지 못했다.
충성스러워진 드워프들은 그렇게 저들끼리만 크리스티나의 레어를 떠났다.
***
깊은 바닷속, 심해.
아멜리아는 창을 들고 베기와 찌르기를 반복하며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윽……!]
순간순간 버티기 힘들 정도로 몰려오는 고통.
하지만 그녀는 예전처럼 아파하며 주저앉지 않았다.
‘하, 할 수 있어.’
아멜리아는 손에 쥔 창을 꾹 쥐며 아픔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뀨.”
스노우볼과 노란 마력석이 있는 자리.
검은 해츨링, 룬이 하얀 새와 함께 나타났다.
룬은 아멜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백야를 통로 안쪽으로 돌아가게 했다.
크리스티나나 다른 누군가가 오면 바로 알려주는 보초 대신이었다.
[……앉아봐.]
[응.]
해츨링은 아멜리아의 상태를 이미 알아채고 자리를 잡았다.
인어를 닮은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 짓고는 꼬리를 접어 앉았다.
[가르쳐준 호흡, 그대로 하는 거야.]
[응, 응.]
느리게 진정된 호흡. 안정된 숨소리.
작은 기포방울이 입에서 일정하게 새어나왔다.
아멜리아의 호흡에 섞여 작게 부서져 나온 어둠의 조각을 룬이 완전히 흡수했다.
겨우 편안한 얼굴이 된 아멜리아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 이제…… 괜찮, 아.]
[다행이네.]
최대한 빨리 힘을 되찾기 위해, 매일 한 번씩은 아멜리아에게 들러 수련시킨 지도 한 달이 넘었다.
심해의 압박은 룬도 개인적으로 체력을 단련하기 적합했기에, 아멜리아를 가르치는 한편 룬 역시 양질의 훈련을 한 셈이었다.
[고, 고마워.]
호흡법 후 자유 수련으로 넘어가기 전, 아멜리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의례적으로 고개만 끄덕여 준 룬에게 아멜리아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나,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 내, 내가 태어……난 게 잘못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들어서……. 막. 내가……부족한 탓이라는 생각도 들고…….]
[…….]
[뭘 해, 야 할지……. 너, 너무 막막해서……. 그러다 내가, 여기……서 사라져도, 아무도……모를 거 같았어.]
[…….]
[나, 나. 너무 못났……지.]
눈물이 맺히는 아멜리아를 보며 룬은 속으로 혀를 찼다.
살아있어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
아직 어린 해츨링이 홀로 견뎌내기에는 너무나 아픈 생각이었다.
[……힘들었겠네. 비록 네 상황을 온전히 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말이야.]
아무리 입장을 상상해본다 해도 룬은 타인이다.
차마 다 이해한다는 빈말은 할 수 없었다.
어설픈 공감은 전혀 위로가 될 수 없는 법이니까.
폭, 룬이 물빛 머리통 위에 앞 발 하나를 얹고 슥슥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여기까지 잘 버텨왔어. 충분히 잘 했다.]
정말 막막하고 힘들어지는 순간에는 ‘힘내’라는 말조차 부담일 터.
그렇기에 힘내라는 말 대신에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이것이리라 여겼다.
너 진짜 대단하다
[너 잘못되지도 않았고, 못난 존재도 아니야. 누구나 뭘 해내지 않았어도, 숨만 쉬고 사는 것조차 버거운 순간이 있는 법이니까.]
뽀글.
결국 아슬아슬하게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망울져 해류 속으로 흘러나갔다.
룬은 소녀의 일렁이는 눈동자를 마주 보며 담담히 말해주었다.
[……지금껏 잘 해왔네. 고생 많았어.]
아멜리아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가볍게 탄성을 터트렸다.
[고, 고마워…….]
툭툭.
룬은 대답대신 앞발로 소녀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그대로 아멜리아가 잠깐 울도록 두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이거 좀 이상한데. 아무리 드래곤 일족이 독립적으로 산다지만……. 이 정도 일이면 크리스티나가 모를 리 없잖아?’
별로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어린 해츨링인 룬에게 자세한 사정을 굳이 알려주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처지를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하고 있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룬은 아멜리아가 눈물을 손으로 닦아낼 즈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다른 드래곤은 없어?]
[으, 응. 다들…… 잠이 들었어. 나, 나 때문에……. 어둠에 삼켜져서. 누, 눈……을 뜨지, 않아.]
그제야 룬은 사태를 이해했다.
일족을 불문하고 해츨링은 귀하다.
한 일족이 멸족했다 하더라도 다른 일족이 당연히 홀로 남은 알을 보호해 줄 정도로.
하지만 드래곤들이 워낙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 교류가 활발한 편은 아니었다.
‘큰 전쟁도 끝난 마당에 다른 일족이 어떻게 지내는지 별로 관심이 없었겠지.’
그 상황에서 아직 어린 블루 드래곤 해츨링이 심해 속에 혼자 방치되어있다면, 답은 하나였다.
‘아무도 모르고 있군. 아멜리아의 상황을.’
당장 레드드래곤의 레어만 봐도, 누군가 편히 오갈 수 있는 구조는 절대 아니다.
룬도 불의 인장을 얻어야 편히 다닐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그나마 크리스티나의 레어는 상대적으로 제한이 없는 편이었으나, 그럼에도 룬이 본 외부인이라곤 오직 페르디키온뿐이었다.
누군가를 만날 일이 생겨도 밖에서 보고 오는 게 일반적.
별다른 사건이 없다면 레어에 초대해 만날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하긴, 그 천마전쟁 빼면 특별한 사건이랄 게 거의 없는 자들이었지.’
끄덕.
드래곤의 종족 특성이 잘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룬 역시 전생엔 홀로 동떨어진 섬에 살며 바깥 출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신수 이무기였으니.
‘아무튼 세계가 달라져도 신수들 사는 거야 다 비슷하군.’
“뀨후우우.”
룬은 한숨을 푹 쉬었다.
훌쩍이던 아멜리아가 놀란 듯 그를 쳐다봐왔지만, 신경 쓰지 말라며 가볍게 손을 내저어주었다.
‘영원한 잠이 드는 저주는 어둠 계열의 힘이다. 해결하려면 내가 얼른 아멜리아로부터 힘을 되찾는 수밖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는 아멜리아.
룬은 그 파란 눈에 시선을 똑바로 두고 선언하듯 말했다.
“뀨!”
[어둠만 해결되면 다들 깨어날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되도록 도와줄게.]
[으, 응!]
아멜리아의 눈빛에 반짝임이 감돌았다.
절망(切望)보다 더 무서운 게 바랄희망조차 없다는 무망(無望)이랬던가.
무엇도 바랄 수 없는 자가 지금껏 숨을 이어온 그 자체가 대견했다.
룬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뀨우. 뀨뀨.”
[너 진짜 대단하다. 장담하는데, 나중에는 네가 바라기만 해도 뭐든 잘될 거야.]
[그, 그럴 리가…… 없어.]
“뀨후음.”
[음, 내 말이 맞을걸.]
피식.
룬은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수련이나 이어서 할 생각이었으나, 아멜리아의 어떻게 그걸 확신하느냐는 시선이 꽤 집요했다.
룬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네가 나를 만난 순간부터 이미 바뀌기 시작했잖아. 안 그래?]
[……!]
휘익.
짧뚱한 앞발을 물속에서 휘둘러보며 룬은 태연하게 웃었다.
무망함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언제든 생이 끊겨도 좋으리라 생각했던 아이.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스스로 무기를 골라 수련을 하고, 무언가를 다시 바라기 시작했다.
아주 훌륭한 변화의 증거였다.
[뭐해? 오늘은 꼬리근육 강화 운동 하는 날이잖아.]
[아으……. 그, 그거 꼬리 어, 엄청 저리……던데.]
엄살을 부리면서 아멜리아가 어색하게 살풋 웃었다.
물론, 룬이 아멜리아를 봐줄 이유는 없었다.
그는 통로 저 끝에서 망을 보던 백야가 삐약 거리며 뛰어올 때까지 아멜리아에게 가차 없이 전력질주를 시켰다.
***
망보던 백야의 신호에 즉시 크리스티나의 레어로 돌아온 룬은 검은 방에 들어온 크리스티나와 흑미를 맞이했다.
“뀨!”
“어머나. 오늘도 수련 중이었구나?”
봉을 들고 있는 까만 해츨링의 모습은 어딘가 귀엽고 기특해 보이기까지 했다.
페르디키온의 레어에서 여러 좋은 무기를 구해왔다더니, 방해받기 싫다며 검은 방에 몇 시간씩 다녀오곤 했다.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자립심이 강한 아이라는 걸 알고 있던 크리스티나는 제 방에서 수련하는 룬을 응원했다.
“룬 님! 다녀왔어요!”
“뀨웃.”
흑미는 요즘 개혁파 드워프족이 정착한 곳에 드나들며,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룬에게 알려주곤 했다.
‘안부를 확인해 오랬더니 인간계가 더 재밌어진 모양이다만.’
딱히 위험한 적도 없었고, 만약의 경우 여차하면 룬이 소환하면 된다.
걱정할 일은 없었다.
“대화들 하고 있으렴. 하필 오븐에 빵을 넣어둔 참이라 얼른 가봐야 하거든.”
“뀨아.”
룬의 대답에 크리스티나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대화하기 편하도록, 룬은 황금 팔찌를 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래. 그쪽에 별 일은 없고?”
“네! 그리고 제드 아저씨가 이걸 전해달래요.”
“……?”
룬은 뭔지 모를 물건을 흑미에게 건네받았다.
얼핏 보기엔 손 안에 적당히 잡힐 크기에, 편편하고 납작하게 가공한 마력석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마력석이라면 제드가 굳이 룬에게 줄 이유가 없었다.
“이게 뭐냐?”
“몰라요! 아저씨가 흑미한테도 줬어요! 이따 시험할 테니 꼭 가지고 있으래요!”
“시험?”
자세히 보니, 단순한 마력석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도록 마력석 내부에 정교한 마법식이 새겨진 마법 아티팩트였다.
두 개 이상의 마력석을 이어붙인 뒤, 마법식을 집어넣어 완성했다.
그럼에도 깔끔하게 마감을 한 덕에 하나의 물건처럼 느껴졌다.
‘장거리 활용성을 높인 무언가인데…….’
마력 실뜨기를 응용한 마력식 복사를 몇 번 해보면서, 대략적인 구조는 즉시 파악 가능했다.
다만 처음 보는 아티팩트였기에 정확한 용도는 제드의 ‘시험’을 통해 확인해봐야 했다.
그때였다.
-땡!
모루를 망치로 때리는 듯한 소리가 룬과 흑미의 마력석에서 동시에 울렸다.
그리고 판 위에 글자가 스르륵 떠올랐다.
<보이십니까?>
“……?”
<이상하네, 1이 사라졌는데. 보이세요? 룬 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