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242)

놀란 룬이 그녀를 불렀다.

황금으로 감싼 갑옷과 투구.

거대한 랜스를 들고 나타난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레어를 침범한 삿된 침입자에게 일갈했다.

[마왕의 끄나풀 따위가 감히 누구 영역에 침범하느냐!]

잔뜩 분노한 그녀는 자신의 레어 한가운데에서 튀어나온 듀라한을 향해 랜스의 끝을 겨누었다.

그 순간, 레어 전체를 관통하는 마력이 움직이며 고대 언령 마법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골드 드래곤 장로의 분노와 함께 폭사할 힘의 전조.

위기를 직감한 룬의 등줄기가 오싹하게 비늘을 세웠다.

“뀨, 뀨아아아!”

[안 돼! 크리스티나! 내가 백 번도 넘게 실패하다 이제 간신히 살렸단 말이야!]

필사적으로 전음을 날린 룬이 자신의 듀라한을 와락 끌어안았다.

[‘살렸다’고……?]

싸늘한 시선이 룬에게 향했다.

절로 몸이 긴장하여 소름이 돋을 정도로 크리스티나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두 번 얻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수하를 이런 일로 잃을 수는 없었다.

[룬, 네가 살렸다고 말했니?]

[맞아. 이 녀석 내가 살렸어.]

금빛 눈썹이 꿈틀했다. 잠시 침묵을 지킨 크리스티나가 둘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설명하렴.]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엄한 목소리였다.

룬은 망설이다, 결국 망자의 뼈를 얻게 된 경위를 자초지종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노한 크리스티나가 굳은 목소리로 엄하게 꾸짖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니? 위험한 장소에는 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위험한 장소는 아니었어. <폐광 던전>은 광석 던전이나 마찬가지고, 거기에 있는 몬스터들은 드워프들이 쉽게 상대하는 놈들이었다고. 그런데 하필 <히든 던전>이 생성되는 바람에…….]

[히든 던전? 룬!]

“뀨우…….”

룬은 크리스티나의 부름에 놀란 듯 어깨를 좁힌 채 낑, 하고 고개를 움츠렸다.

마치 혼난 강아지 같은 모습.

하지만 단단히 화가 난 크리스티나는 룬을 봐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쯤 되자 룬은 식은땀이 났다.

‘이건…… 살려면 무조건 빌어야한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털썩!

룬은 즉시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봉인까지 해둔 마왕의 기사를 부활시킨 마당.

위험한 장소에 가지 말라 한 말도 어겼다.

크리스티나의 분노는 타당했으며, 룬 역시 몰래 묻어가려 하였기에 잘못한 게 맞았다.

그때였다.

철그럭!

그런 룬의 모습을 지켜보던 듀라한 역시 룬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놈은 왜?’

양 손을 갑옷 무릎위에 착실하게 올리고 있기까지 한 듀라한은 사죄하는 듯 상체를 숙였다.

그 모습은 어딘가 침울해보였다.

“…….”

둘의 모습을 본 크리스티나는 랜스를 물렸다.

갑옷과 투구, 랜스가 모두 빛 속으로 투명하게 스며들었다.

어느 새 무구는 사라지고, 공중에 떠 있던 그녀가 내려와 룬과 듀라한 앞에 섰다.

“하아, 룬.”

깊은 한숨이 느껴지는 부름에 룬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압박감은 많이 사라졌지만 피부를 찌르는 시선은 그대로였다.

“그래. 사정은 알겠어. 그렇다고 용서하겠다는 말은 아니야.”

“……뀨우…….”

“외출금지 1년이야. 이것도 굉장히 봐준 거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룬은 한숨을 포옥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정도가 어디냐.’

한동안은 얌전하게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룬은 듀라한을 힐끗 돌아보았다.

어두운 녹빛의 혼이 눈처럼 깜빡거리다 슬그머니 룬을 향했다.

서로 시선이 마주치자 룬이 먼저 크리스티나 몰래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망령의 기사는 웃지 못했지만, 묵묵하게 녹빛만 깜빡였다.

“다행히 충성심은 있어 보이는구나. 하지만 빛의 힘을 품은 레어에서는 네 새로운 수하가 자유롭게 다닐 수 없을 텐데. 어쩔 셈이니?”

팔짱을 끼며 묻는 말에, 룬은 생각해 두었던 방법을 입에 올렸다.

“뀨우.”

[이 녀석은 당분간 검은 방에 둘 생각이야.]

사적인 감정을 떠나, 마왕의 기사였던 듀라한이 크리스티나의 레어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만들 수는 없었다.

한때 마족과 큰 전쟁을 치른 드래곤의 입장에서 보면, 원수의 자식이 멋대로 활보하게 두는 기분일 터.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검은 방>은 크리스티나의 레어에서 유일하게 짙은 어둠의 마력이 감도는 곳.

또한 블랙 드래곤의 보물과 검은 마력석이 남아있는 장소였다.

이를 지킬 기사가 하나쯤 있는 건 무척 좋은 일이었다.

마침 어둠이 가득한 이 장소라면 듀라한이 머물기에도 딱 좋았다.

룬의 대답을 들은 크리스티나는 적절하다 여기곤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풀었다.

“그래, 괜찮은 생각이구나. 네 권속이니 필요할 때 소환하면 될 일이고 말야.”

그러더니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듀라한을 바라보았다.

“룬, 만약을 위해 이것을 여기에 두어도 될지 확인 정도는 해두고 싶구나. 괜찮겠니?”

[응. 그렇게 해.]

크리스티나의 푸른 눈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자랑스러워 하렴

그녀의 시선을 받은 듀라한이 몸을 끼걱거리며 꺼림칙한 듯 조금씩 꼼지락 거렸다.

“불의 마력……. 게다가 이 생명력, 매개물로 백야의 힘을 사용했구나.”

“꾸우.”

룬이 고개를 끄덕이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좀 더 차분히 시선을 집중했다.

듀라한은 어딘가 불편한 듯 고개를 피했으나 크리스티나의 눈빛은 모든 걸 관통할 듯 빛났다.

룬은 주먹을 꾹 쥐고 조금만 참으라며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듀라한의 육체를 부활하게 만들었지만 그 핵은 위대한 인간의 혼……. 그래, 그렇기에 불사조의 깃털과 융화될 수 있었구나.”

혼나는 중에도 흥미로운 분석에 룬은 쫑긋 귀를 세웠다.

크리스티나의 말이 이어졌다.

“삿된 몸을 입었지만 정신만큼은 강대한 자의 것. 오히려 오염되어 가던 그의 혼을 불사조의 힘으로 정화시켰어.”

좁혀졌던 미간이 풀리며 목소리에서 분노가 점차 가셨다.

위대한 혼.

비록 육신은 저주받은 망령기사의 것이었으나, 그 정신만큼은 골드 드래곤의 장로조차도 감탄스러울 만큼 잘 정련되어 있었다.

분석이 끝난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라면 얼음처럼 차가웠을 그의 심장이 지금은 누구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구나. 그는 네게 고마워하고 있단다. 은혜를 입은 혼은, 너를 충직하게 따를 거야.”

‘그 정도일 줄이야.’

룬의 붉은 눈이 반짝였다.

여러모로 기대하지 않았던 수확이었다.

“……아무리 어려도, 블랙 드래곤이구나. 역시.”

“뀨?”

룬은 되묻는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침 그를 보고 있던 크리스티나의 시선은 어딘가 아련했다.

마치, 먼 옛날을 회상하듯이.

“블랙 드래곤은 어둠을 지배하는 일족이지. 어둠속에서 묵묵히 움직이는 자들, 부서지고 상처 입은 이들, 용감하게 싸웠으나 패배한 자들의 구원이 되어주곤 했단다.”

“…….”

“이상하지. 운명을 타고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늘 그래왔으니.”

그 말을 하는 크리스티나의 시선은 슬퍼 보이기도 하고, 그리워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크리스티나……?]

싱긋.

슬퍼보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그녀가 기특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룬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었다.

“자랑스러워 하렴, 룬. 누가 뭐래도 너는 훌륭한 블랙 드래곤이란다.”

깊은 눈동자에 담긴 이야기는 룬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먹먹한 그리움이 담겨있었다.

***

룬의 예상보다 후폭풍은 크지 않았다.

비록 1년간 외출금지와 듀라한이 레어 내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다는 점은 감수해야했지만 생각보다 나쁜 처사는 아니었다.

다시는 무모한 짓 하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지만 사실상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한 숨 돌린 룬은 복제 <마력 열쇠>로 아멜리아에게 향하는 통로를 걸어가는 중이었다.

다만, 그의 곁에는 듀라한이 함께였다.

‘아멜리아가 이놈을 무서워하지 않도록 소개해야 할 텐데.’

최근 아멜리아는 전보다 훨씬 용기 있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듀라한이 호감을 살 만한 외형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물의 경계선 앞에 도착한 룬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힐끔 듀라한을 보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찰박.

심해의 깊은 곳.

룬이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아멜리아가 다가왔다.

반갑게 인사하려던 인어는 룬 뒤에 백야가 아닌 검은 덩치가 함께 있는 걸 보고는 흠칫 제자리에 멈춰 섰다.

[루, 룬……? 누구……?]

어두컴컴하고 검은 어둠 속 녹빛의 안광이 번뜩였다.

[힉!]

아멜리아는 즉시 바위 뒤로 몸을 숨기고 살그머니 고개만 내밀었다.

룬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듀라한을 앞발로 가리켰다.

“뀨우, 뀨.”

[내 기사야. 듀라한이라고 해.]

[……! 룬……의 기사?]

아멜리아가 조금 더 몸을 내밀었다.

그러다 무서운 기분이 드는지 다시 바위 뒤에 몸을 움츠렸다.

룬은 어깨를 으쓱였다.

“뀨웃.”

[응. 태어난 지는 하루밖에 안됐지만.]

[고, 고작 하루……?]

인어가 다시 빼꼼 몸을 내밀었다.

룬은 씨익 미소 지으며 듀라한의 갑옷을 앞발로 통통 쳐 보였다.

[앞으로는 이 녀석과 전투 연습을 할 거야.]

[전투……?]

깜짝 놀란 아멜리아와 듀라한이 동시에 시선을 룬에게 향했다.

두 시선에 응답하듯 룬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뀨우.”

[그래.]

‘으, 으아아.’하고 창을 든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멜리아와, 묵묵히 녹빛의 혼을 깜빡이는 듀라한.

씨익.

룬이 입 꼬리를 올렸다.

심해에서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인명피해가 없다.

오히려 압박 때문에 평소보다 힘이 더 들고, 원하는 공격을 하려면 더 많은 힘을 사용해야 했다.

이러한 수련환경 속에서 서로에게 좋은 자극과 성장을 기대할 수 있을 터였다.

‘아멜리아는 무예에 재능 있는 드래곤이다. 하지만 가진 재능에 비해 실전경험이 거의 없지.’

대련해보지 않은 자는 막상 실전에 맞닥뜨렸을 때 몸이 굳게 마련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듀라한은 수련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부분을 메우기 딱 좋은 상대였다.

어둠의 힘에서 태어난 존재이자, 초인의 혼을 계승한 자.

심지어 강한 전투 능력까지 가진 녀석이었다.

크리스티나에겐 듀라한을 <검은 방>에 두겠다고 해놓았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도 않을 장소를 우직하게 지키게 두다니.

그야말로 보석을 썩게 두는 짓이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아멜리아의 수련에 써먹는 편이 훨씬 낫겠지.’

룬이 앞발을 모아 팔짱을 꼈다.

[아멜리아, 이 녀석은 네게 딱 맞는 최적의 상대야. 네가 온 힘을 다 해도 죽지 않고, 어둠에 먹히지도 않아. 심지어 상처가 나도 되살아나는 몸을 가졌거든.]

[그, 그래?]

다행히 소녀는 룬의 말을 신뢰하는 눈치였다.

내친 김에, 룬은 듀라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비록 생긴 건 이래도 옛날에 위대한 초인이었다고 해. 아주 용맹하고 대단한 녀석이었던 모양이야.]

[그랬……구나.]

[무엇보다, 꽤 착한 놈이더라고.]

룬은 크리스티나의 진노 앞에서 룬의 옆에 함께 무릎을 꿇었던 듀라한을 떠올렸다.

분명 버티는 것만으로도 타격이 컸을 터.

그럼에도 룬의 옆자리를 지킨 충직한 녀석이었다.

그런 룬의 눈빛을 본 아멜리아는 창을 꼬옥 쥐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미안, 해. 듀라……한. 겉모습만…… 보고 내가 노, 놀라……서.]

철그럭!

듀라한이 한 손을 저어보였다.

그 태도가 꽤 정중해보여서, 아멜리아는 살풋 웃음을 지었다.

아멜리아는 떨림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지만 이내 물갈퀴가 있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듀라한!]

듀라한이 묵묵하게 그 손을 잡고 흔들었다.

깜짝 놀라 어깨를 좁혔던 아멜리아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보다…… 안, 차가워…….]

“뀻.”

[그건 불사조의 힘이 깃든 탓일 거야.]

차가운 갑옷임에도 장갑 너머로 쥐어지는 손은 아늑한 체온을 전달했다.

불의 마력과 생명력으로 움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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