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242)

‘다행히 서로 잘 맞겠군.’

끄덕.

둘을 보고 안심한 룬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 꽤 강해. 아마 상대하기 좀 힘들긴 할걸.]

그는 악동같이 씨익, 웃었다.

[여러 번 설명하기보다 한 번 경험해보는 편이 낫겠지? 둘 다 준비해.]

악수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묵직한 분위기가 듀라한의 몸에 감돌았다.

아멜리아도 자신의 창인 ‘멜’을 꾹 쥐며 마음을 다졌다.

‘나, 나도. 그 동안 열심히 했어!’

룬의 말대로 성정은 충직하기 그지없는 듀라한.

하지만 막상 전투자세를 갖추자 날선 기운이 피부를 찌르듯이 넘실거렸다.

‘무서워…….’

그저 기합일 뿐임에도, 아멜리아는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상대의 강함을 느낄 수 있는 감각.

아멜리아가 전투적 재능이 출중하다는 증거였다.

‘이길 수 있을까?’

분명 무기 하나 없는 맨손임에도, 듀라한의 자세엔 파고들 빈틈이 없었다.

아멜리아가 창을 세우고 몸을 긴장시킨 순간.

쿵!

듀라한이 어둠을 두르고 발을 굴렀다.

심해에 지진이 일어난 듯 발밑에 울림이 느껴졌다.

상대의 힘을 느낀 아멜리아도 긴장하여 어깨를 움츠렸다.

우웅!

갑옷 속에서 녹빛의 혼이 아멜리아를 도발했다.

맨 손과 창.

원래대로라면 리치가 압도적으로 긴 창을 쥔 아멜리아가 훨씬 유리했다.

하지만 어린 블루 드래곤 해츨링은 함부로 덤벼들지 않고 신중을 기했다.

이를 지켜본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겁을 먹은 게 아니었다.

집중한 아멜리아는 듀라한과의 실력 차이를 느끼고 단단한 방어태세로 창을 세우고 서있었다.

심지어, 주변 해류의 흐름까지 이용해 듀라한의 압박에 맞섰다.

쿠르르르.

거대한 물길이 아멜리아의 긴 머리카락을 흔들며 수호하듯 굽이쳤다.

소녀의 의지에 따라 해류가 듀라한의 정면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 발짝 움직이는 것조차 해류를 거슬러 가야하는 압박감이 듀라한을 압사시킬 듯 몰아쳤다.

이어진 듀라한의 선공은, 그런 그녀의 판단에 대해 스스로 진 핸디캡이자 칭찬이었다.

‘……! 올 거야.’

빠르게 발 디뎌 온 듀라한의 움직임을 예감한 아멜리아.

그녀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콰앙!

해류를 가르듯 쏘아진 듀라한이 그대로 스트레이트로 주먹을 뻗었다.

눈을 홉뜨고 주먹의 궤도를 끝까지 본 아멜리아는 주먹을 창으로 쳐내려했으나 힘이 워낙 강해 밀렸다.

그러나 창대로 그를 미끄러뜨리고는 방어태세에서 날렵하게 몸을 돌렸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회피한 그녀가 즉시 반격했다.

좋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 수를 미리 예측한 듀라한이, 주먹을 거두며 몸을 함께 회전시켰다.

퍽!

거친 타격음.

[……!]

듀라한의 갑옷에 타격 당한 아멜리아가 뒤로 밀렸다.

그를 보고 있던 룬이 생각에 잠겼다.

‘끝났네. 실력차이가 심해.’

한 합으로 룬은 그들의 실력을 점쳤다.

공격을 끝까지 지켜본 아멜리아는 정직하게 들어오는 주먹을 직전까지 기다렸다 리치가 긴 창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힘에서 밀렸고, 그 뒤로 아멜리아가 기민하게 반응하긴 했으나 이미 듀라한의 대응범위 내였다.

‘공격이 들어오는 길을 확신하고 카운터를 준비했건만, 그걸 역으로 이용했군.’

주먹을 피해 카운터를 날리려던 아멜리아의 눈앞에서 주먹이 사라진다.

그 대신 예상치 못한 거대하고 단단한 몸통이 돌진해왔다.

하지만 아멜리아 역시 즉시 몸을 뒤로 물리며 충격을 최소화했다.

이만큼 재능이 있다면,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 터.

‘창을 쓰다 보면 자신에게 유리한 거리와 전투방식까지 익히겠지.’

듀라한은 이미 상당히 봐주면서 상대해주는 중이었다.

하지만, 심해의 무거운 압박감 속에서 몸을 가누는 것은 그에게도 기본기 훈련을 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그 증거로 듀라한은 제 손을 한두 번 꾹 쥐어보더니 검은 기운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불길했다.

‘……괜찮겠지? 미리 초보자 수준으로 상대할 수 있게 일러두긴 했으니.’

어두운 기운을 풀풀 풍기기 시작하는 듀라한.

지금은 그를 앞에 두고 기합에 밀리지 않기만 해도, 사실상 아멜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었다.

이 정도야 우습지

전투가 끝난 뒤 룬은 기진맥진해진 아멜리아에게 회복수를 섞어 만든 오렌지 주스를 건넸다.

마무리로 몇 번의 스트레칭과 기본 훈련 뒤, 귀환을 위해 듀라한과 마력통로를 걸었다.

철컥, 철컥!

듀라한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룬의 뒤를 따라왔다.

“그렇게 좋냐.”

팔찌를 끼고 인간 모습으로 걷는 룬의 뒤에서 듀라한이 녹빛을 깜빡거렸다.

비록 말이 통하는 건 아니지만, 씩씩한 걸음에서 개운함이 느껴졌다.

‘하기야, 오랜만에 제대로 된 육신을 지닌 채 움직였으니.’

녹빛의 혼이 깜빡이는 게 아주 상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룬 역시 이무기 시절, 무를 익히고 즐겼던 자.

그 기분을 모를 리 없었다.

‘나까지 몸이 근질근질하네.’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툭툭 건드리며 룬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1년간 외출금지령을 받은 상황.

적어도 그 기간 동안엔 내부에서 간단한 체력 단련 정도로 아쉬움을 풀어야했다.

‘이 녀석하고 제대로 대련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크리스티나가 언제 볼지 모르는 레어 안에서 할 수는 없고, 아멜리아가 보기에도 수상해 보일 거란 말이지.’

아무리 아멜리아가 심해 속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살았다지만 10년생 해츨링이 몇 백 년은 연상인 아멜리아보다 능숙하게 싸운다면 이상하게 여길 게 뻔했다.

그렇다고, 룬이 서번트인 듀라한에게 가르침을 받자니 그건 그거대로 내키지 않았다.

‘잠깐만. 진짜 불가능한가?’

외출금지라곤 해도 룬이 강해질 수 있다면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던 크리스티나였다.

‘생각해보면 전승도 완벽하게 안전한 건 아니었잖아. 내가 강한 드래곤이 되기 위해 필요하다 여겨서 해 준거였지.’

고민하던 룬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솔직하게 말하자. 더 강해지고 싶다고.’

그날 점심.

베리류의 달달한 쨈과 고소하고 짭짤한 버터를 함께 바른 빵.

가끔 치즈를 더해 먹어보는 맛의 조합은 무척 훌륭했다.

거기에 따끈한 우유까지 한 모금 들이키자 포만감과 함께 맛의 완벽한 조화를 맛볼 수 있었다.

‘슬슬 운을 떼볼까.’

룬은 한 입씩 먹어보면서 뭔가 기록하는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빵 위에 크림치즈를 발라내던 크리스티나가 시선을 느끼고 룬을 바라보았다.

“룬, 혹시 맛이 없니?”

“아니. 이 과일 잼이랑 버터를 함께 발라먹는 것도 맛있고. 다 좋아.”

실제로 흑미는 눈 앞에 있는 훈연한 닭 날개구이, 매콤한 소스와 토마토 조각을 버무린 샐러드, 신선한 버터향이 나는 크루아상을 맛있게 먹으며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룬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빵과 우유를 삼켰다.

“크리스티나. 나 부탁 하나 해도 돼?”

“무슨 부탁이니?”

“나한테 격투술을 알려주면 좋겠어.”

“흐음.”

크리스티나는 살짝 고민하는 눈치였다.

드래곤들도 운동 삼아 가벼운 격투나, 몸을 쓰는 법을 익히곤 했기에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크리스티나가 보기에 룬은 생각보다 호전적인 기질이 강했다.

‘생각해보면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지.’

룬은 태어나자마자 몸을 열심히 움직이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이동 마법을 써서 레어 밖에 나가질 않나, 강한 힘을 품은 약초를 먹고 탈이 나서 약 기운에 고생하질 않나…….’

덕분에 크리스티나가 깜짝 놀랄 일이 몇 번이나 생겼다.

‘그 덕에 페르디키온의 마음을 치유하게 되기도 했지.’

아버지의 뜻을 정확히 따르고 제시된 목표만을 달성하며 산 페르디키온.

룬은 그와 정반대의 성향을 가졌다.

크리스티나가 보호하고 있는 10년간, 이 아이는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곤 했다.

사고뭉치 같았다가도, 때론 순수하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찔러 오질 않나.

무엇을 할지 정하고, 확정되지 않은 결과를 가장 좋은 걸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남다른 아이였다.

‘분명, 이 격투술을 배우고 싶다는 말도 네가 원하는 결과를 위한 거겠지.’

그 진심에 호응해주고 싶었다.

크리스티나는 잠시 룬을 바라보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좋아. 훈련을 도와줄게.”

“……!”

룬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해냈다!’

한번 정한 결정을 바꾸지 않는 완고한 그녀가, 그를 위해 마음을 바꿔주었다.

최소한 갑갑한 생활에서는 벗어났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 없었다.

“수련은 내일부터 하자꾸나. 네 상태에 따라 일정을 잡을 테니 스스로 몸을 잘 챙기도록 하렴.”

“물론이지! 고마워, 크리스티나!”

어지간히 기분 좋은 모양이라며, 크리스티나가 살풋 웃음을 지었다.

그날 저녁, 룬의 외출금지령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페르디키온이 저녁을 함께 하러 크리스티나의 레어에 왔다.

그는 룬이 크리스티나에게 격투수업을 받기로 했다는 말에 미간을 구겼다.

“……크리스티나님에게 격투술을?”

“응. 왜?”

페르디키온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그, 크리스티나 님이 온화해보이시지만……. 생각보다 흉포, 흠흠! 엄한 분이라는 사실을 네가 제대로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페르디키온의 말에 룬은 크리스티나가 듀라한 사건 때 보인 모습을 떠올렸다.

“그야…… 작정하면 무섭긴 하지.”

크리스티나가 흑미와 잡담 중인 걸 확인하고 페르디키온만 들리게 소곤거리자, 페르디키온 역시 말소리를 최대한 줄였다.

“실은 나 역시 크리스티나 님에게 검술 수업을 받은 적이 있었다.”

룬은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차서 물었다.

“오! 어땠어, 형?”

페르디키온이 폐광 던전에서 <힘이 약해지는 저주 비약>으로 일시적으로 드래곤의 힘을 거의 사용하지 못했을 때 보인 검술은 상당한 실력이었다.

즉, 크리스티나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도가 상승할 근거가 되어주었다는 말이었다.

한데 페르디키온의 반응이 조금 묘했다.

“……그건.”

거의 먹던 음식을 토할 지경으로 변한 얼굴을 보며, 룬 역시 싸한 예감에 사로 잡혔다.

“그건?”

‘대체 뭔데?’

궁금증이 상승한 그 순간.

“얘들아! 후식으로 딸기 케이크와 레몬 쉬폰이 있는데, 둘 중 어떤 걸로 먹고 싶니?”

“흑미는 딸기케이크요!”

“삐잇!”

크리스티나의 물음에 흑미가 먼저 손을 번쩍 들었다.

백야는 케이크 대신, 새 먹이용 간식 과자가 따로 준비되어있었다.

크리스티나가 흑미에게 간식을 나누어 건네는 모습을 눈으로 힐끔 본 페르디키온이 나직한 목소리로 조언했다.

“룬. 절대 이기려고 들지 마라. 무조건 살아남을 생각만 해.”

“……뭐?”

페르디키온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흔들며 조용히 레몬 쉬폰을 선택했다.

룬은 딸기 케이크를 입 안 가득 베어 물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많이 깐깐한 편인가……?’

늘 룬의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크리스티나였다.

그렇다면 훈련 과정에도 다치지 않게끔 세심하게 신경 써 줄 터.

페르디키온의 의미심장한 반응에 더 걱정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케이크 맛있네.’

입 안에 쑥쑥 들어가는 바닐라 향의 달콤함.

화룡점정으로 올라간 과육이 가득 씹히는 딸기.

“너무 달콤해요! 폭신폭신해!”

한 입 먹을 때마다 양 손으로 볼을 쥐고 행복해하는 흑미에게 그 또한 동감했다.

크리스티나는 ‘천천히 먹으렴. 체할라.’라고 걱정스레 흑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저런 크리스티나가……?’

룬은 내심 피식 웃었다.

난이도가 상승해봤자, 어차피 전생의 이무기 시절 해왔던 수련보다 험난하겠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페르디키온이 아무리 컸다 해도 해츨링. 어린아이가 느끼기엔 검술 수업이 퍽 힘들었을 수도 있겠지. 아멜리아도 고작 꼬리 단련 따위에도 힘들어했고.’

그래서 페르디키온에겐 첫 스승인 크리스티나가 더 무섭게 느껴졌던 게 아닐까.

……그 생각은 오산 중의 오산이었다.

푹 자고 난 다음날 새벽.

크리스티나가 훈련 시간으로 지정한 때였다.

평소에는 어지간하면 푹 잠을 자도록 권하는 그녀였기에 이 제안은 의외의 선택이었다.

하품을 하며 일어난 룬은 해가 제대로 뜨지도 않은 새벽하늘을 보며 터벅터벅 걸었다.

‘새벽부터 훈련이라니……. 나야 좋긴 하다만.’

해가 완전히 뜨기 전부터 몸을 풀고 먹는 식사는 분명 맛있을 것이다.

첫 수업을 개시한 날은 본래 의욕이 최고점을 찍는 법.

룬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낭비 없는 알찬 하루의 시작이었다.

‘바깥 냄새 좋네.’

훈련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레어 마당에도 나오지 못했으리라.

룬은 신선한 공기를 들이키며 기분을 전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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