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242)

“왔니?”

“응. 좋은 아침,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가 가죽으로 된 레더 아머를 입고 미리 나와 있었다.

활동성과 기동성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디자인으로 가벼운 체술에 적합한 차림이었다.

‘역시 무리하지 않고 새벽 운동 정도 하려나.’

그렇게 생각하자 다소 아쉬운 기분이었다.

하지만 룬은 이 기분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손깍지를 끼며 가볍게 뚜둑 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지. 어린 해츨링 상대로 장로인 크리스티나가 진지하게 상대해주기도 우스운 노릇이니.’

스트레칭 후, 가볍게 방어 자세를 잡아주는 크리스티나를 룬은 잘도 따라했다.

‘아멜리아도 이 정도는 쉽게 해냈으니, 이상하진 않겠지.’

룬은 일전 아멜리아가 보였던 수준을 참고하여 준수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어머나, 룬. 자세를 잘 잡는구나. 타고난 센스가 제법 좋은걸?”

‘이 정도야 우습지. 너무 쉬우면 재미없잖아.’

겉으로는 무해하게 웃으면서, 룬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그가 보인 건 어느 신체 부위를 사용하여 공격할지 방어할지에 따라 힘과 축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센스 정도였다.

본능적으로 이 감각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룬이 받을 수업의 난이도가 어느 정도 올라가리라.

역시나, 크리스티나는 미소와 함께 룬에 대한 평을 담았다,

“마냥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제법이구나.”

싱긋.

순간, 룬은 크리스티나의 미소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 공기가 달라졌다.’

그 무의식적인 감지가 룬을 살렸다.

팟!

빠르게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나자, 크리스티나가 칭찬이라도 하듯 진한 미소를 그렸다.

‘뭐지?’

무서운 게 아니었다.

존재할 뿐인데도 상대를 찍어 누르는 감각.

숨 쉴 때마다 공기가 부족해 허덕이게 만들었다.

‘본체화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압박감이라고……?’

마치 거대한 산이 그를 향해 걸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크리스티나가 기특하다는 얼굴로 허리에 한 손을 얹었다.

“감이 좋구나. 그 거리에서 한 발만 더 다가오면, 내 공격범위거든.”

상냥한 목소리와 달리 주변의 공간은 단 한치도 내주는 곳이 없었다.

룬은 가볍게 호흡을 정리했다.

‘정신 차리자. 공격해 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굳을 수는 없어.’

결심하는 사이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숨 막히는 긴장감을 해소하고픈 욕구 때문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룬은 주먹을 자연스럽게 쥐며 침착하게 욕구를 참았다.

‘조바심일 뿐이야. 오히려 앞뒤 없이 잘못 들어가면…… 끝난다.’

죽일 리 없다는 믿음?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언제든 약자를 죽일 수 있는 맹수의 심기를 거스를 멍청이는 없으니까.

땅!

‘그저 배고픈 맹수가 아니라 여유로울 뿐이지. 저러다 손짓이라도 한번 그으면.’

죽는다.

생각을 마친 룬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생존본능을 건드렸을 때 보이는 반응이 냉정하리만치 침착했다.

‘……이런 긴장감은 오랜만이야.’

본능까지 태워 집중하게 만드는 고양감.

온 힘을 다해 몰입하게 만드는 전율.

세포 하나까지 일깨워 내는 감각은 묘하게 중독적인 맛이 있었다.

뚜둑.

룬은 손아귀의 관절을 가볍게 꺾어 풀었다.

‘조금만.’

진심을 다해 싸우고 싶은 마음을 참기 위해 그는 스며드는 웃음을 감추며 호흡을 내쉬었다.

해츨링인 그가 드러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힘.

딱 그 정도까지만 활용해야 했다.

검지와 중지 끝에 소리 없는 어둠이 맺혔다.

그 모습을 본 크리스티나가 감탄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제 갓 어둠을 자각하고 다루기 시작한 아이가.’

밤하늘의 끝자락이 농롱했다.

그 어둠에 크리스티나의 시선이 잠시 홀렸다.

탓!

틈을 놓치지 않고 룬은 빠르게 사각으로 파고들었다.

갑작스럽게 대상의 거리감이 바뀌는 것을 노려, 즉시 반응하기 어려운 각도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좋은 타점을 노렸다.

‘목.’

후욱!

어두운 빛의 꼬리가 그녀의 목을 정확히 찔러들었다.

그 순간.

툭.

크리스티나가 손으로 룬의 손목을 쳐 내며, 제압을 위해 반대편 손을 뻗었다.

룬은 그 손이 다가오는 걸 기다렸다가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젖혀 피했다.

그리고 피하는 반동을 이용해서, 유연하게 뒤로 공중돌기를 했다.

작은 몸집이 빠르게 돌며 회전력이 실린 발끝이 그를 잡으러 오는 손을 견제해 쳐내고, 다른 발이 크리스티나의 턱을 노렸다.

그녀의 얼굴에 어쩔까 고민하는 여유로운 표정이 스치더니, 룬과 같은 방식으로 고개를 젖혀 피했다.

더 압박하지 않고 봐주는 모양새였다.

‘좋아. 역시 아이의 몸이라 적당히 봐주려는 모양이지.’

강자의 여유를 이용하여 기회를 잡아야 했다.

룬은 곧 바닥에 착지해 반격할 생각으로 몸을 탄력 있게 튕겼다.

“판단은 좋았어, 룬.”

착지하여 재정비할 시간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고개만 살짝 젖혀 피했던 크리스티나가 아직 공중 돌기를 하는 룬의 등을 노리고 손을 뻗었다.

펑!

거죽 터지는 소리.

쫙 펴진 크리스티나의 손바닥이 룬의 등짝을 때렸다.

“……!”

발을 땅에 딛지 못한 룬은 그대로 날아가 나무를 부러뜨리고서야 멈췄다.

“끄으.”

앓는 소리를 내며 부러진 나무 위에서 몸을 일으킨 룬과 달리, 크리스티나는 아이의 등에 장(掌)을 날린 손을 내려다보았다.

“흐응.”

그러더니 이내, 흥미로운 미소를 띠며 가볍게 장권을 날린 손을 털었다.

“룬, 드래곤 스킨(Dragon skin)은 언제 익힌 거니?”

인간의 살이 아닌 두텁고 단단한 방패를 친 느낌.

크리스티나는 장권치기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일어난 룬의 등은 옷이 터져나가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장권의 진짜 무서움은 겉이 아니라 인체 내부에 가해지는 파장.

그러나 룬은 찰나의 순간, 단단한 ‘드래곤 스킨’을 발동해 오히려 상대에게 역으로 통증을 돌려보냈다.

한편, 룬은 암담한 기분에 빠졌다.

상쇄와 카운터를 통해 피해를 최소화한 것치곤 그가 받은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설마 몸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일 줄이야.’

공중에서 맞았지만 분명 대비를 한 상태였다.

심해의 압박을 견디기 위해 자연스럽게 사용했던 능력이 순간적으로 몸을 보호했으니까.

‘아멜리아를 만나러 다니면서 무의식적으로 발현하곤 해서, 발동 타이밍은 정확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이 터져나갈 정도의 파괴력.

그 안으로 얼핏 은은한 비늘 모양이 슬쩍 보였다가 사라졌다.

“이 정도면 조금 더 힘을 실어도 괜찮겠구나.”

룬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크, 크리스티나……?”

눈꼬리를 살며시 내리며 미소 짓는 금발의 미녀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렴, 룬. 나는 내 치유 능력의 효과를 아주 잘 알고 있단다.”

“…….”

평소 친절한 모습이 무시무시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룬은 그제야 페르디키온의 충고가 떠올랐다.

‘무조건 살아남을 생각만 해.’

식은땀이 등줄기를 적셨다.

훈련은 이제 막 시작일 뿐이었다.

***

“히엑!?”

시름시름 앓는 얼굴로 식사 자리에 앉아있는 룬의 얼굴을 본 흑미는 호다닥 달려와 이리저리 그를 살폈다.

“룬 님, 왜 이렇게 폭삭 나이 먹은 거 같아졌어요?”

“…….”

걱정과 조바심이 섞인 눈으로 흑미가 까치발을 해 룬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없는데에……. 무서운 꿈 꿨어요?”

룬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실제로 그는 피곤하고 잔뜩 지친 모습이긴 해도, 이상할 정도로 외상이 없었다.

이미 완벽한 치유를 받은 후였기 때문이었다.

‘설마하니 다칠 때마다 치유하고 다시 팰 줄이야…….’

독하다 못해 질릴 정도였다.

치명상이 되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고 치유.

그리고 다시 반복.

덕분에 룬은 온몸에 장권이 찍혀서 바닥을 뒹굴어야했다.

그제야 룬은, 왜 그녀가 훈련시간을 새벽으로 지정했는지 깨달았다.

‘식사 시간 이후에 이 짓을 했다간 다 올렸겠지.’

게다가 룬이 정말로 정신적으로 타격 받은 건 그게 아니었다.

‘어이가 없는 건 크리스티나가 쓴 기술이 장권뿐이라는 거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장권은 상대를 제압하기 유용한 무술.

기본적으로 손바닥을 쓰기에 시전자도 다치지 않고, 상대도 치명상을 입지 않게 조절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도 작정하고 쓰면 내상을 크게 입었다.

10년생 해츨링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실력을 발휘해 봐야, 3천 살 넘는 신수와 대등할 수 있을 리 없으니 크리스티나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진짜 화가 나는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고.’

룬은 축 늘어진 채 들었던 크리스티나의 말을 떠올렸다.

이러다 딱 죽겠다 싶은 지점.

정확히는 수련을 때려치우고 싶을 법한 시점에서 크리스티나가 물어왔다.

‘룬. 스스로 강해지겠다고 말한 네가 이대로 물러날 셈이니?’

여기서 수긍하면, 자존심과 의지를 스스로 꺾는 짓이나 마찬가지.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던 룬은 어떻게든 힘을 짜내어 몸을 일으켰다.

패배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마음대로 호락호락하게 흘러가던가.

‘……한심하게 기절 따윌 해버리다니!’

그 생각만 떠올리면 뒷목에 열이 오르며 탄식이 절로 터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물론, 상대방 탓을 할 수도 없었다.

룬은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들린 크리스티나의 말을 떠올렸다.

‘룬. 너는 절대 죽어서는 안 되는 아이야. 만에 하나라도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보다 민감하고 능숙하게 대처해야만 해.’

치유의 빛이 몸을 감쌌다.

축 늘어진 룬을 안아 올린 크리스티나가 햇살처럼 따뜻하게 속삭였다.

‘그러니, 죽을 지경까지 가더라도 봐주긴 힘들겠구나. 물론 정말 죽지는 않겠지만.’

‘…….’

회상을 마친 룬은 퀭한 눈으로 앞에 놓이는 푸딩그릇을 내려다보았다.

강해지기 위한 훈련을 자처한 건 분명 자신이었지만, 이렇게나 등짝만 터지는 신세가 되다니.

심지어 실력은 착실하게 늘고 있다는 점이 그를 어이없게 했다.

‘수업은 열흘에 세 번이었지.’

첫날부터 지옥문을 연 기분이었다.

“자, 후식은 초콜릿 푸딩과 바닐라 푸딩이란다.”

탱글.

그의 속도 모르고 앞에 놓인 달달한 초콜릿 풍미 가득한 푸딩이 빛깔 좋게 흔들렸다.

반쯤 자포자기 심정이 된 룬은 수저로 반들반들한 겉면을 푹 파서 입안에 넣었다.

‘……! 맛있어.’

초콜릿의 단 맛과 밀키한 부드러움.

은은한 벌꿀향의 푸딩은 마력은 물론 내상까지 회복시키며 그의 기분을 다독였다.

푸딩을 다 먹을 즈음,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이 정도로 포기할 내가 아니지.’

룬은 스푼을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곱씹을수록 열이 오르는 크리스티나의 도발성 짙은 질문.

이건 이미 순수한 수련이 아니었다.

999년을 혼자 거친 섬에서 수련해왔던 이무기, 그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다.

어린 블랙 해츨링은 의지를 불태웠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그의 도전욕구와 의지는 수업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등짝이 터져가며 착실히 수업을 따라간 룬.

비록 크리스티나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채찍을 휘둘러 달리기 시키는 꿈까지 꾼 사실만큼은 비밀로 묻어야 했지만, 그는 원했던 대로 착실히 강해지고 있었다.

***

땅!

<아이고, 룬 님! 이제야 겨우 사용법을 알려드리게 됐네요!>

며칠 후, 드디어 흑미가 제드로부터 연락용 아티팩트 이용 설명서를 받아왔다.

사용법 자체는 직관적이어서 룬 역시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마력석 판을 두드려서 글자를 확인하고, 쓰고 싶은 글자는 손끝으로 적어간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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