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242)

룬은 어색하게 마력판을 툭툭 건드렸다.

<ㅇㅇ>

잠깐의 침묵 뒤, 제드의 글자가 주루룩 올라왔다.

<아하! ‘응’이라는 말씀이시군요! 하긴 아직 손에 익지 않으시죠? 쓰다보면 요령이 늘어나니 너무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자식은 손이 얼마나 빠른 거야?’

룬도 배우는 속도가 늦는 편이 아니건만, 드워프인 제드의 글자 전송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가했다.

손재주가 좋은 드워프 족이기 때문인지, 문장 올라오는 걸 보고 있자면 제드가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흑미는 이거 재밌어요!>

<이야, 역시 흑미 님! 그죠? 캬. 제가 만들었지만 정말 제 스스로의 재능이 두려울 정도라니까요! 제가 이거 만들어 드리면서…….>

올라오는 너무 글자가 길어서 잘려버렸다.

룬은 제드의 자랑과 수다를 자세히 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적당히 넘겼다.

흑미에게 맞장구를 받으며 신나게 늘어놓은 제드의 이야기는 요약하자면 이랬다.

- 인간계에 마법사들이 발명한 연락용 수정구가 이미 있음.

- 하지만 마력을 많이 먹기에 마법사만 사용가능.

하지만 제드가 만든 이 ‘마력 통신석’은 달랐다.

- 일반인도 사용가능!

- 아티팩트에 내장해둔 마력이 남아있는 한, 계속 글자를 보낼 수 있음!

다만 마력을 최대한 아끼는 구조이기에 영상이 아닌 글자만 전송 가능했고, 조만간 글자를 활용하는 기능도 차차 추가할 셈이라는 이야기였다.

‘해서, 앞으로 쭉 개발해서 부재중일 때 남겨둔 글자도 확인할 수 있게끔 하겠다는 건데…….’

초기 개발품치고도 꽤 쓸 만한 물건이었다.

<어떻습니까! 이 제드, 개혁파 드워프의 명성을 드높이기에 좋은 물건을 만든 게 틀림없지요?>

<ㅇㅇ>

아예 마력이 통하지 않는 지역이나, 일부 전송이 실패하는 지역이 있기는 했지만 그쯤이야 차차 개선해나가면 될 일.

‘인정할 건 인정해 줄 필요가 있지.’

제드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좋았는지 발명품에 붙일 이름을 점지 받고 싶다는 티를 슬금슬금 내기 시작했다.

증명할 수 있겠어?

<이야! 룬 님의 인정을 받다니. 뿌듯하군요! 내친김에 이 통신석에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데, 뭐 좋은 이름 없겠습니까요?>

은근슬쩍 룬의 대답을 기대하는 말 뒤로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다행히 흑미의 글씨가 떠올랐다.

<저요! 흑미는 ‘반짝반짝 신기한 마력 통신석’ 하고 싶어요!>

<호오, 아주 귀여운 이름이군요! 그런데 그 귀여운 이름 붙은 물건 만든 게 저라고 밝혀지면 맞아 죽을 것 같은데요!>

<앗! 제드 아저씨 죽으면 안 되는데!>

당황한 흑미와 이상한 감탄사를 섞어가며 호응하는 제드를 보면서 룬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여럿이 모여 놀이판을 여는 걸 지칭하는 단어가 있었는데.’

룬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모코지’ 어때?>

‘……? 글자 인식이 이상하게 됐는데.’

룬은 자신이 올린 단어에서 오탈자가 났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제드의 말이 올라온 뒤였다.

<‘모코지’요? 어감이 괜찮은데! 이거 무슨 의미인가요?>

본래는 ‘모꼬지’라는 단어를 쓰고 싶었으나 이미 올라간 단어를 정정하기엔 상당히 귀찮았다.

그래서 그는 우선 의미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놀이나 잔치로 여럿이 모이는 모습을 뜻해.>

<의미는 딱 통신석에 잘 어울리는군요. 아, 혹시 이게 용언이란 겁니까?>

룬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흑미의 글자가 먼저 훅 치고 올랐다.

<흑미도 들은 거 같아요! 왠지 익숙해! 모코지!>

<역시!? 좋습니다. 그럼 이 통신석의 이름은 ‘모코지석’이라 할까요!>

<응!>

‘…….’

룬이 끼어들 새도 없이, 제드는 순식간에 ‘모코지, 모코모코!’라며 이상하지만 찰진 의성어까지 자체적으로 만들어냈다.

<좋네요! 알림 소리도 ‘모콕!’으로 바꾸면 귀에 콕콕 붙을 거 같군요!>

<모콕! 모콕! 콕콕!>

‘…….’

어딘가 의욕에 불타는 제드와 흥을 탄 흑미를 보던 룬은 통신석의 새 이름 '모코지석'에 동의했다.

‘그래. 이름 따위 아무렴 어때. 실용이 우선이지.’

룬은 거기에 더해 가장 개선되었으면 하는 부분을 천천히 적어 올렸다.

<기왕이면 알람 끄는 기능도 추가해 줘. 우선적으로.>

<아앗. 맞아요! 흑미도 귀가 아팠어요!>

<그래요? 저희 드워프들이야 자장가처럼 익숙한 망치질 소리인데, 생각해보니 인간들에게는 좀 거부감이 들 만한 소리긴 하겠군요! 좋습니다. ‘모콕’으로 소리를 바꾸는 건 시간이 걸릴 테니 알림 끄는 기능부터 추가해보겠습니다.>

‘됐다.’

알람이 올 때마다 모루에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개선된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안 그래도 요즘 제드가 시범용이라고 아침마다 일방적으로 글자를 보내오는 통에 피곤했던 차였다.

‘수업이 끝나고 기절해 있다가 알림 소리에 놀라 깨곤 했지.’

가끔은 모코지석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까지 들 정도로, 그놈의 땅! 소리는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인간계에서 룬에게 연락할 방법을 고민하다 개발했다는 기특함만 없었어도 진작 제드에게 분노를 토로했을 터였다.

<아이구, 이거 개선해야 될 게 은근히 많네요. 그럼, 이제 더 추가할 건은 없으신 거지요?>

<지금 말한 부분이 개선되거든 모코지석 하나 더 만들어 줘. 페르디키온 형에게 선물할 거니까 기왕이면 붉은색 마력석으로.>

<옙.>

‘도착하면 복제해서 아멜리아에게도 주면 되겠어.’

마력석이야 구하기 쉬웠고 둘 모두 마력을 자유롭게 쓰는 드래곤 족이었다.

그러니 한번 가져다주면 마력 걱정 할 일 없이 잘 쓸 수 있을 터.

‘연락을 주고받는 게 편해지면 품을 덜 들이면서 정보를 교환하거나 친밀도를 유지하기도 편해지겠지.’

강자들과의 유대.

룬은 모코지석을 통해 친목을 쌓을 셈이었다.

***

그리고 며칠 뒤.

본체화 한 룬은 개선된 모코지석을 받자마자 블루사파이어 마력석으로 복제 모코지석을 만들었다.

그리고 복제 <마력 열쇠>를 사용해 아멜리아의 레어로 가는 문을 열었다.

페르디키온과 달리, 아멜리아는 다른 이들에게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없기에 만든 ‘복제 모코지석’이었다.

그의 옆에는 듀라한, 그리고 백야가 함께였다.

처음에 크리스티나는 속성이 상반된 백야와 듀라한이 친해진 걸 신기해하더니,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아마, 속에 든 건 불사조의 깃털을 품은 위대한 혼이기 때문이겠지.”

크리스티나는 백야가 ‘내면을 보는 새’라고 말했다. 그 날부터 듀라한에게 제대로 이름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룬 입장에서는 듀라한이 늘 불경한 물건처럼 불리는 것보다 훨씬 낫기는 했다.

다만, ‘내면을 보는 새’ 같은 거창한 존재로 보기엔 너무나…… 아기새였다.

“뀨후우우.”

절레절레.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그냥 새인데.’

그는 마침 제 머리 위에 앉아 부리로 깃을 다듬고 있는 흰 새를 살폈다.

“삐이!”

절그럭! 철컥!

일전에 깃털을 잔뜩 털리고 나서, 한동안 룬만 보면 흑미 뒤로 숨곤 하던 백야.

한데, 전보다 더 좋은 깃으로 바뀌어가자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끔 눈을 반짝이며 룬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하고, 귀엽게 울며 룬의 볼에 제 뺨을 비비기도 했다.

아무래도 새는 룬이 깃털을 잔뜩 수확한 일이 털갈이를 노린 의도된 호재라고 여기는 듯했다.

‘순조롭게 회복되어 가고 있군.’

최근 백야의 털빛은 전보다 더 하얗고 풍성했다.

거기에, 깃털이 길어지며 전에 없던 맵시가 드러났다.

새는 종종 전보다 멋들어진 자신의 꼬리깃을 흔들어보며 만족스러운 듯 눈을 빛냈다.

‘어지간히 새로 난 깃털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룬은 백야가 냉큼 따라온 이유가 새롭게 깃털이 난 모습을 아멜리아에게 자랑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그가 가진 마력석을 전부 걸 수도 있었다.

‘하긴, 새가 자신을 가꾸지 말란 법은 없지.’

백야가 털 관리에 재미를 붙였다는 점은 룬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이제 백야의 털갈이 시기마다 불사조 깃털을 잔뜩 수확할 수 있겠군.’

그는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물의 경계선 앞에 선 룬은 팔찌를 빼고, 해츨링의 모습으로 변해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룬!]

물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아멜리아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어나, 이제는 창을 쥐는 폼에 익숙해진 아멜리아.

‘그러고 보면 이 녀석이야말로 훈련이 꽤 고되었을 텐데.’

처음에는 창이라는 무기를 어색해했다.

창을 다루며 듀라한과 대련을 하다보면 손이 까지기도 했던 소녀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술을 배워보는 건데, 생각보다 잘 따라온단 말이지.’

같은 시기에 룬은 격투술 수업을 견디기도 빡빡한 나날이었다.

체력과 상처는 회복이 된다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은 누적되어갔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치유 마법이 정신적인 부분도 어느 정도 보강해준다 하였지만, 룬의 타고난 속성 탓인지 그 효력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나도 분발해야겠네.'

룬은 속으로 피식 웃고는, 아멜리아에게 모코지석을 건넸다.

“뀨우.”

[우선 이거 받아.]

[이게…… 뭐야?]

“뀨으.”

[이름은 ‘모코지석’이라고 해. 통신용 아티팩트야.]

의문이 담긴 눈을 하는 아멜리아에게 룬은 자신이 가진 모코지석을 꺼내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물속이라 해도 블루 드래곤의 레어. 마력이 풍부한 곳이라 전송에 문제는 없었다.

[그, 그럼 여기……에 글자 적어두면 네가 볼……수 있어?]

“뀨, 뀨뀨.”

[응. 바로 보지 못해도 글자는 보관되어 있을 테니 나중에 확인하고 답장해 줄 수 있어.]

[……!]

아멜리아는 연신 신기해하며 손에 들린 파란 모코지석을 만지작거렸다.

룬은 분위기를 보더니 슬그머니 운을 띄웠다.

[그동안 훈련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어? 무리하고 있는 부분이라든가.]

소녀는 고개를 갸웃,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 없어.]

룬은 순진무구한 푸른 눈동자를 마주 보며 그 말이 진심인지를 가늠했다.

[정말로?]

아무리 무예에 재능이 있더라도 훈련은 늘 어렵고, 따라가기 벅찼을 터였다.

한창 성과를 보는 재미가 있겠지만 실력 향상이란 들쑥날쑥하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아멜리아의 성격이라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스스로를 탓할 가능성이 높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못났다는 생각, 쓸모없다는 생각을 했던 녀석이야.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한들, 믿지 못하면 소용없지.’

그렇기에 무력하다고 느끼지 않게 집중도 높은 훈련 과제를 주었고, 끊임없이 창을 다루게 했다.

하지만 생각이란 금방 바뀌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언제든 훈련이 잘 안 풀리면 원래대로 돌아갈 가능성 역시 있었다.

‘차라리 페르디키온처럼 속내를 편하게 드러내는 녀석이라면 낫겠는데, 이 녀석이 그럴 리가 없지.’

스스로를 탓하는 일이 당연한 녀석이니 이야기를 들어두어야 했다.

물끄러미 쳐다보자, 아멜리아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떨리는 시선을 손에 쥔 창으로 내렸다.

[이, 있잖아. 난…… 룬을 만나기 전까진 죽어가고, 있었……어.]

[…….]

[내, 내 마음……과 몸을, 좀 먹어가는 어둠……이, 아프고 무서웠고, 저주 같았어. 난 왜 이…… 이렇게 태어났을까…… 원망도 했어.]

그 순간 룬은 요람에 있던 시절, 크리스티나가 넋두리처럼 블루드래곤에 대해 걱정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땐 무슨 걱정인지는 못 들었는데, 아멜리아에 대한 염려였겠군.’

어둠 속성의 힘을 알 속에 있던 그들의 해츨링 안에 봉인한 물의 일족.

[그, 근데…… 원망조차…… 소용없어지니까,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저, 정말 숨만 쉬고…… 살았는데. 네가, 말……해줬어. 그동안…… 잘 버텨, 왔다고.]

뽀그르르.

숨을 흡 참았다가 주먹을 꾹 쥐고 내쉰 아멜리아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지금도…… 아프고, 무섭지만…….]

고개를 든 아멜리아가 올곧은 빛을 품고 룬을 바라보았다.

[나, 나…… 훈련, 열심히 받……아서 강, 해지고 싶어. 그리고 언젠가, 어, 엄마아빠를…… 깨울래.]

어둠에 잠식되지 않은 맑은 물빛이 투명하게 드러났다.

룬은 느리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 좋은 마음가짐이네.]

정면에서 마주본 아멜리아의 눈은 이제까지 느껴본 적 없는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제까지 본 모습 중 가장 선명한 푸른색.

어리지만 아멜리아 역시 물의 일족의 차기 수장이었다.

‘슬슬 시도해볼까.’

[아멜리아. 네 말을 증명할 수 있겠어?]

[증……명?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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