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242)

크리스티나가 룬이 저주와 어둠을 흡수할 수 있는 적정 나이를 언제로 점칠지도 알 수 없었다.

500년?

천 년?

기약도 없는 세월을 기다려야 할 터.

‘역시, 내가 방법을 찾아내는 게 맞겠어.’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건 최후의 보루로 둘 생각이었다.

어둠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아멜리아 일가를 위해서도, 빨리 강해지고 싶은 룬 자신을 위해서도 어떻게든 그가 직접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해결을 봐야했다.

룬은 답답한 마음에 꼬리를 바닥에 탕탕 내려쳤다.

그때였다.

-모콕!

룬의 모코지석이 알람을 울리더니 마력으로 글자가 떠올랐다.

‘아멜리아로군.’

룬은 그가 떠난 이후 소녀가 적어 올렸을 짧은 문장을 바라보았다.

<룬. 나 아멜리아야. 이 글자가 잘 전달됐을까? 케이크 맛있었어. 고마워. 내가 보답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줘.>

직접 대화할 때는 말을 많이 더듬었는데, 모코지석으로 연락해 온 아멜리아의 문장은 그런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룬은 답장을 보냈다.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네.>

활력을 불어넣는 크리스티나의 마력 음식.

잠시지만 어둠을 제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아픔까지 잊게 만들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문득, 룬은 자신이 실마리를 잡았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 방금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룬은 자신이 가진 크리스티나의 전승 지식을 자세히 살폈다.

‘이건…… 위험하지만 해볼 만해.’

잘만 하면 물의 일족으로부터 신뢰를 얻고, 서번트와 아멜리아까지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팔짱을 낀 룬은 찬찬히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혼자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결과야. 문제는…… 아멜리아에겐 시련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인데.’

어차피 시간을 끌면 끌수록 어둠과 저주 속에 물드는 시간만 늘어날 뿐이었다.

룬은 눈을 뜨고 결심한 눈빛을 드러냈다.

‘녀석의 부모를 구하는 과정이다. 선택은 아멜리아에게 맡겨야겠지.’

그는 모코지석에 글자를 적었다.

<조만간 내 다른 권속과 인사시켜 주고 싶은데, 괜찮아?>

고민이 길었는지 한참 뒤, 모코지석으로 파란 글자가 떠올랐다.

<응. 괜찮아.>

‘좋아. 흑미와도 친해지고 나면 적당한 시기를 봐서 물의 지역을 청소하는 거야.’

그리고,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다음 날 아침, 크리스티나가 며칠 자리를 비울일이 생긴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룬은 즉시 아멜리아에게 모코지석으로 그와 흑미의 방문을 알렸다.

“와아! 여기 뭐예요?”

룬에게 불려온 흑미는 핑크로즈빛으로 반짝이는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고 복제 <마력 열쇠>로 만들어낸 통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비밀 통로. 다른 이들에게는 발설하지 말고.”

“앗, 네! 룬 님이랑 우리끼리 비밀!”

쉿! 하고 검지까지 제 입술 앞에 댄 흑미가 까만 꼬리를 신나게 살랑거렸다.

통로를 걷는 동안 룬은 심해에서 버틸 수 있는 보호마법을 흑미에게 걸어주었다.

거부감 없이 마법을 받아들인 흑미가 문득 앞장서서 날아가는 백야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백야도 알고 있었어?”

“삐!”

백야가 날개를 파닥이며 대답했다.

최근 백야는 비행시간이 부쩍 길어졌다.

평소 룬의 머리나 어깨, 흑미에게 찰떡처럼 얹혀가던 녀석이 스스로 날아서 가는 때가 늘어난 것이다.

‘해류를 타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그게 비행실력을 키웠나?’

날개가 몸뚱이에 비해 작은 백야의 비행은 어딘가 ‘난다’기에는 아쉬운 면이 있었다.

날개를 파닥여 좀 더 높은 곳으로 뛰거나, 반대로 높은 곳에서 뛰어 완만하게 착지하는 정도.

하지만 지금은 요령을 터득하고 공기의 흐름을 탈 줄 알게 되었다.

‘저 녀석도 나름대로 뭔가 했군.’

룬은 백야를 기특하게 여겼다.

본래 혼자 날기보다는 자기가 아는 이들에게 가서 치대고 싶어 하던 어린새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슬금슬금 날아다니는가 싶더니 이젠 날개를 펴고 당당하게 비행하는 스스로를 무척 뿌듯해하는 기색이었다.

“백야 멋지다아! 깃털도 이뻐지구, 엄청 잘 날아!”

“삐야앗!”

차앗!

백야가 자신의 하얀 날개를 더욱 멋지게 펼쳐 보이며 머리 깃이 돋보이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란히 걷던 듀라한이 소란스러움에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성장했다고 봐야하나?’

꼭 강해져야만 성장이라 볼 수는 없으므로, 룬은 백야가 노력했음을 인정했다.

‘나중에 감자칩 상을 줘야겠군.’

철컥, 철그럭!

물의 경계선 바로 앞.

“와! 벽에 물이 붙어있어요!”

흑미는 처음으로 본 물의 경계를 보며 연신 신기해, 라며 살폈다.

잔뜩 흥분한 상태인 흑미에게 룬이 일렀다.

“이 너머에 있는 자는 물의 일족, 블루 드래곤의 해츨링이야. 인사 잘하고, 불의 정령들은 버티기 힘들어 할 테니 절대 나오지 않도록 해라.”

“네에!”

한 손을 번쩍 든 흑미가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룬은 일행들에게 심해에서 불편하지 않도록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는 변신용 아티팩트를 빼고 해츨링의 모습이 되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촤악!

‘아멜리아는 아직 오지 않은 건가?’

룬은 통로 앞에 둔 스노우볼을 작동시켜 희미하게나마 빛이 들도록 했다.

그러자 흑미와 백야, 듀라한이 뒤이어 들어왔다.

룬은 숨을 꾹 참으려고 볼을 부풀린 흑미를 보며 말했다.

“뀨우.”

[그냥 숨 쉬어도 돼. 아까 마법 걸었으니까.]

“파하!”

숨이 쉬어진다는 사실에 급히 숨을 내쉬고, 흑미가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아. 이게 다 물이에요?”

“뀨뀨우.”

[그렇지.]

심해 속을 손으로 휘저어보며 물소리에 귀도 기울이고, 해류에 몸을 맡겨보기도 하는 흑미를 백야가 다가와 챙겼다.

“삐이.”

하얀 새는 놀이 방법을 알려주듯 흐름이 강한 지점으로 가 자연스럽게 해류를 탔다.

“오옹. 그렇게?”

해류를 타고 움직이는 백야를 보며, 흑미가 비슷하게 따라했다.

워낙 운동신경이 좋은 탓에 금세 해류의 움직임을 타며 즐겼다.

다행히 처음 겪는 심해의 어둠을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하긴, <폐광 던전>에서도 내 어둠이 깔리자 잠을 자던 녀석이었으니.’

룬은 듀라한에게 둘을 감시하도록 지시하고 아멜리아가 자주 오던 쪽으로 가 기다렸다.

문득, 룬은 자신의 까만 앞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슬슬 이 모습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본체화는 블랙 일족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함과, 초반에는 아멜리아가 도망가지 않도록 마음을 놓을 만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제 아멜리아도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새로운 일행을 소개하는 자리이니 만큼 오늘은 아멜리아에게 익숙한 해츨링 모습을 유지하기로 했다.

‘한 명은 소심하고, 한 명은 쾌활하군.’

완전히 다른 성격인 둘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가늠해 봐야 했다.

적어도 룬이 생각하는 방법은 서로가 잘 통해야 제시할 수 있는 수단이었으니까.

‘둘의 성격이 잘 보완되면 좋겠는데…….’

이미 모코지석을 통해 물빛의 소녀에게 흑미에 대해 어느 정도 전달해 두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또 다른 느낌일 터였다.

‘흑미 녀석 성격 상 상대를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 올 확률이 훨씬 높을 텐데. 소심한 아멜리아와 활달한 흑미의 합이라.’

그의 예상으로, 조심스럽고 신중한 아멜리아에게 흑미의 살가움과 적극성은 큰 도움이 될 가능성이 컸다.

잘 된다면 함께 하는 전투에서도 기대이상의 효과가 있을 터였다.

‘게다가, 아멜리아는 여태껏 힘든 훈련을 잘 소화해 왔다. 성격적인 부딪힘만 없다면 문제없어.’

룬이 재차 확신하는 그때였다.

[느, 늦어서 미안……!]

다급하게 꼬리를 흔들며 멀리서 아멜리아가 헤엄쳐왔다.

해류를 타보던 흑미가 아멜리아가 오는 방향을 보곤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와아, 엄청 예쁜 인어 언니다아!”

순식간에 도착한 아멜리아에게 흑미가 다가갔다.

살짝 긴장한 아멜리아가 다가온 흑미에게 조심스레 인사했다.

[아, 안……녕.]

“헤헤. 안녕하세요! 흑미라고 해요!”

손을 번쩍 든 흑미가 여우 귀를 쫑긋 거리며 밝게 웃었다.

신이 났는지 까만 꼬리까지 살랑거리며 반겼다.

[으응. 나, 난…… 아멜리아, 야.]

“우웅. 그럼 아멜리아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어, 언니?]

물빛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지더니 이내 눈을 깜빡였다.

[으응……. 그, 그렇게 해.]

“네! 언니도 흑미라고 불러주세요!”

아멜리아가 입술을 몇 번 오물거리더니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흑……미?]

“맞아요!”

처음 본 인어의 모습이 흑미에겐 무척 신기하고 예뻐 보였다.

흑미가 아멜리아의 비늘이나 하늘거리는 지느러미를 보며 눈을 빛냈다.

“와아. 하늘하늘 흔들리는 게 투명하고 예쁜 물빛 옷감 같아요!”

[…….]

둘을 지켜보던 룬은 괜찮은 흐름이라 여겼다.

‘첫인상은 듀라한이 훨씬 버거웠지.’

그에 비하면 흑미는 차라리 귀여운 축이었다.

흑미는 인어 모습의 아멜리아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주변을 맴돌며 조잘거렸다.

아멜리아는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몰라 했으나, 바위 뒤를 힐끔거리면서도 용케 도망가지는 않았다.

룬은 그 즈음 끼어들 타이밍을 쟀다.

‘이쯤에서 슬슬 떨어뜨려야겠군.’

[자. 인사는 그 정도면 되겠지? 앞으로도 종종 보게 될 거야. 차차 알아가도록 해.]

소극적인 아멜리아에게 처음부터 너무 과하게 다가갔다간 오히려 튕겨나갈 수도 있었다.

‘첫 만남이 부담스러워선 안 되지.’

“오옹. 알겠숩니다!”

흑미가 힘차게 대답했고 아멜리아는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시작이 괜찮네.’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된 후, 룬이 본론을 꺼냈다.

[오늘은 해양 몬스터 사냥. 즉 실전 수업을 할 거야.]

‘사냥’이라는 단어를 들은 듀라한의 눈빛이 형형하게 번뜩였다.

평소에는 과묵하지만 전장에서는 누구보다 강렬하게 활약하는 녀석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무대의 주인공은 네가 아니야. 알고 있겠지?’

시선을 받은 듀라한이 투지의 기운을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적당히 갈무리된 열의를 본 룬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놈이라 다행이군. 저 녀석은 됐고.’

보석처럼 눈을 반짝이는 흑미와 속눈썹을 살며시 내린 아멜리아.

둘을 향해 룬이 지시했다.

[듀라한이 선봉에서 탐색해줄 거야. 나랑 백야는 최후방. 실질적으로 싸우는 건 흑미와 아멜리아, 너희 둘이야.]

덜컥 겁먹은 아멜리아가 긴장한 눈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우……리 두, 둘이서?]

그 순간, 흑미가 아멜리아의 손을 꼬옥 잡았다.

왜 눈을 그렇게 떠?

“할 수 있어요! 언니, 강해!”

[나, 난……. 안 그런데…….]

“으응? 아니에요! 흑미 이런 거 잘 맞추는걸! 언니 엄청 강해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분홍 장밋빛의 눈이 아멜리아의 물빛 눈동자를 투명하게 들여다봐왔다.

아멜리아는 그 눈빛을 본 순간, 흑미에게 잡힌 손을 꼬옥 쥐었다.

순수한 신뢰.

무조건적인 믿음.

주변에 타인이라고는 없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이들.

티 없이 순수한 그들은 그녀가 충분히 할 수 있다며 믿음을 심어주었다.

‘이상해. 난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라고 생각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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