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242)

“룬, 음식은 어떠니?”

“……맛있어. 근데 등 터진 새우를 보니 새벽 수련 때 생각이 나네.”

말하고 보니 새벽 수업 때 등짝 터지던 감촉이 은은하게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먹기 좋게 등에 칼집을 낸 새우가 어쩐지 아련했다.

“푸훗.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이를 본 크리스티나가 작게 웃으며 시선을 흑미에게 돌렸다.

“그럼, 흑미는?”

심해를 연상케 하는 요리였기에, 룬은 긴장을 숨기고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벌써 새우를 네 마리째 물고 있던 흑미가 눈을 깜빡였다.

“맛나요! 고소하고 짭조름해서 좋구요!”

“후후. 바다에서 나는 생물이라 낯설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새우는 처음 먹어보지?”

“네!”

“삐약!”

흑미와 백야의 상태를 보며 룬은 속으로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미리 입단속들 시켜두길 잘했군.’

만약 언질이 없었다면 새우요리를 반찬 삼아 심해와 아멜리아 이야기가 나왔을지도 몰랐다.

그럼 모르긴 몰라도, 더 이상 룬의 자유도를 지키기는 힘들 터였다.

‘적어도 지금은 안 되지.’

룬은 양념 생선구이를 한 조각 입안에 넣으며 자유로운 3일 간의 심해사냥을 위해 만든 제작품 1호를 떠올렸다.

<인형 제작(중급)

품명 : 중급 제작자의 미끼인형

-제작자가 입력한 행동을 반복하는 미끼용 인형.

-숙련도에 따라 원본과의 일치도가 높아진다.

* 행동 목록 : 수면/스트레칭/식사>

<저주 도구 만들기 세트> 로 만들 수 있는 저주 인형을 응용한 작품이었다.

마침 저주 능력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였기에 초급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쿨쿨 잠자거나 먹는 수준이긴 하다만. 고급 수준의 결과물이었다면 스스로 먹을 것도 만들어 먹을 수 있었겠는데.’

약간 아쉽긴 했으나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상관없나. 지금 상태로도 목적을 이루기에는 충분하니.’

크리스티나는 무리겠지만, 하급 정령인 라이 정도는 충분히 속일 수 있을 법했다.

‘나와 닮은 인형이라니, 뭔가 찜찜하긴 하다만……. 며칠을 비우는 일이니 할 수 없지.’

룬의 권속 중 누구 하나 두고 갈 수도 없었기에, 혹시라도 크리스티나가 왔을 시 알람 역할과 핑계도 되어 줄 수 있었다.

‘만들어놓고 보니 제법 쓸 만하단 말이야.’

이래서 제드가 맨날 이상한 걸 만드는 건가, 하고 내심 생각했을 정도였다.

디저트로 나온 체리를 집어 먹으며, 룬은 때를 기다렸다.

자잘한 이야기가 오가더니 자연스럽게 크리스티나의 외출 이야기가 나왔다.

“룬, 알다시피 일이 있어서 3일 간 레어를 비울거야. 라이가 곁에 있을 테니 내가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이야기하렴. 바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알겠어. 아침에 가?”

“그렇단다. 혹시 요리 수련을 하고 싶다면 내 몫은 빼고 하면 돼.”

‘아침 식사시간 전에 가겠다는 뜻이군.’

룬은 자연스럽게 크리스티나의 출발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식사는 같이 안 먹는단 말이지. 그럼 있잖아, 내가 도시락 만들어 줘도 돼?”

“어머나,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니?”

“뭐……. 내가 외출할 때도 많이 도와줬으니까.”

사실은 흑심이 있긴 했다.

그는 살짝 찔리는 양심을 적당히 달래며 순하게 웃어보였다.

“기쁘네. 그럼, 그렇게까지 말하니 부탁할게.”

‘좋아. 계산대로 흘러가는군.’

다음날, 룬은 도시락을 만들어 건네며 크리스티나에게 소소한 부탁을 하나 얹어두었다.

약간 의문스러워하기는 했지만, 크리스티나는 어렵지 않은 일이라며 수락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한 판을 하나씩 점검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심해 필드를 정화하며 모아 둔 재료를 흑미를 통해 제드에게 보낸 다음날.

새벽부터 제드의 모코지석에는 독보적으로 많은 글자가 잔뜩 와 있었다.

-룬 님! 정말 너무하십니다요! 어떻게 저를 빼고 그런 귀한 던전엘 가신단 말입니까? 심해라니! 블루 드래곤 레어의 던전! 심해 던전 재료…….

한 번에 다 보이지도 않은 부분까지 눌러보자 뒷말이 마저 펼쳐졌다.

-……라니! 바다를 보지 못하는 드워프에게 이런 재료 하나가 얼마나 귀한데요! 으아아아!

‘귀찮은 녀석 같으니.’

뒤로도 끝없이 서러움을 토로하는 말은 싹 무시하고 룬은 제 할 말을 보냈다.

-시끄러워.

역효과였다. 따돌림과 미지의 재료에 대한 한을 품은 드워프의 곡소리가 장문의 글자가 되어 폭격기처럼 쏟아졌다.

한 귀로 적당히 흘린 룬은 그의 손놀림에 약간 감탄하며 문장을 적어 보냈다.

-심해 지역 재료를 더 가지고 싶으면, 너희 드워프팀의 제작 실력을 올려 둬. 너희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게.

잠시 아무런 글자로 뜨지 않던 모코지석.

이내 대답이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다녀오실 때까지 맡겨주십시오!

글자에 의욕과 씩씩한 어투가 그대로 묻어났다.

룬은 입 꼬리를 올리며 글자를 적었다.

-곧 좋은 소식 가져다줄게.

‘좋아. 미끼는 던져놨고.’

뭔가 답변이 더 돌아왔지만 그는 알람을 끄고 모코지석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탐욕이 많은 녀석이니 재료를 얻을 만한 능력을 가지라는 말. 잘 알아들었겠지.’

기다리기만 하면 알아서 흥미로운 물건을 만들어 낼 개혁파 드워프들.

묘하게 기대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며 룬은 다음 할 일을 체크했다.

식량 확보를 위해 주방에 가보니, 이미 3일치 간식이 잔뜩 만들어져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꽤 넉넉하게 만들어놨군.’

그는 눈앞의 디저트를 전부 아공간 주머니 안에 밀어 넣었다.

거기에 더해 자신만의 레시피로 3일치의 마력요리를 넉넉히 준비하고, 검은 방으로 향했다.

철컥!

가슴에 한 손을 올려 인사하는 듀라한에게 고개를 끄덕인 룬은 흑미의 본체인 마계장미를 찾아갔다.

‘이 녀석도 배고플 일 없게 관리해 둬야지.’

현재 룬의 권속으로 연결되어 있는 흑미의 마계장미.

어쩌다 보니 검은 방은 새까맣고 싱싱한 장미로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이 묘하게 정돈된 느낌인데. 흑미의 솜씨인가?’

장미덩굴은 싱그러운 줄기와 잎,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검은 방을 예쁘게 꾸며주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룬은 팔만 해츨링의 것으로 바꾸었다.

장미는 분신인 흑미를 통해 룬의 힘을 얻고 있지만, 본체 스스로가 버틸 만큼 양분도 챙겨주어야 했다.

‘성체 드래곤을 상대하게 될 테니, 그땐 오히려 본체에서 힘을 끌어오게 될지도 모른다.’

룬은 자신의 비늘과 검은 마력석을 장미 뿌리에 잔뜩 쌓아두었다.

그때였다.

“룬 님!”

“삐!”

이동마법을 통해 공간을 훌쩍 넘어온 흑미는 등 뒤에 유난히 큼직한 짐을 메고 있었다.

“그 짐은 다 뭐냐?”

“이거 옷이에요! 아멜리아 언니 추워보여서 흑미 옷 가져왔어요!”

배낭이 아주 빵빵했다.

기실 수룡인 아멜리아가 추위를 탈 리 만무했다.

단, 흑미의 옷이라면 예전 페르디키온의 레어에서 드워프 장인이 손수 만든 것들이 꽤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것저것 마법효과가 붙어있는 의상들.

무려 입으면 능력치가 상승하는 아티팩트였다.

‘착용자에 따라 사이즈까지 맞춰지는 옷이었지.’

흑미가 생각에 잠긴 룬을 보며 헤실 웃어보였다.

“흑미 잘했죠?”

‘소심한 아멜리아 녀석에게 순수한 마음이 담긴 선물이라……. 자신감을 심어주기 좋겠어.’

그렇게 결론내린 룬은 흑미의 머리를 토닥이며 칭찬했다.

“그래. 아주 잘했다. 착하네.”

흑미가 기분 좋은 듯 귀를 쫑긋거리며 손에 머리를 비벼왔다. 그러더니 품에 있던 백야를 번쩍 들어보였다.

“백야도 같이 골랐어요! 칭찬해 주세요!”

“삣!”

노란 눈을 깜빡이는 새를 본 룬은 세 가닥 솟아있는 백야의 머리 역시 부슬부슬하게 쓰다듬었다.

상과 벌은 차별 없이 줘야 하는 법.

“잘 했다. 백야.”

“삐!”

백야가 하얀 날개를 펼쳐 보이며 몇 번 더 지저귀었다.

뒤에서 듀라한이 묵묵히 우울한 안광을 빛내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가자.”

준비를 마치고, 지체할 필요 없이 룬의 <마력 열쇠>가 통로를 만들었다.

얼른 옷을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에 흑미가 백야를 끼고 냉큼 앞장섰다.

물의 경계선 너머에는 이미 아멜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화를 해둔 탓인지, 심해의 어둠이 상당히 걷혀있어 멀리에서도 인어의 실루엣이 보였다.

“언니!”

냉큼 달려간 흑미가 아멜리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물빛 소녀가 기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 흑미야.]

흑미가 곧장 배낭에서 옷을 꺼내들었고, 아멜리아는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흑미가 가져왔어요!”

[와……. 이, 이게 다…… 뭐, 뭐야?]

“이건 프릴 원피스구요, 볼레로도 이뻐요. 그리고 이건 블레이저랑 랩 드레스예요!”

흑미의 가방에서는 옷이 쑥쑥 집혀 나왔다.

‘안 그래도 드워프 녀석들이 흑미 아이템과 옷에 유독 진심이더라니.’

특히 여성 드워프들의 작품은 섬세함의 극치였다.

아멜리아의 꼬리를 생각한 건지, 흑미가 고른 의상들은 주로 인어 모습일 때도 입을 수 있도록 전부 치마 계열 하의였다.

지키기 위한 싸움

“빨리 입어 봐요!”

[그, 그럼…… 얼른 입, 입고 올게.]

“같이 가요, 언니!”

아멜리아는 흑미와 함께 심해 안쪽으로 들어가서는 옷을 바꿔 입고 왔다.

[이런…… 거, 처음이라. 어, 어때? 나, 이, 이상한 거 같기도…… 한데.]

처음으로 옷을 선물 받은 탓인지 어색해했지만, 룬은 긍정적으로 판단했다.

‘옵션을 잘 골랐네.’

아멜리아가 선택한 하얀 드레스는 마력증가 옵션뿐 아니라, 방어력과 공격력 증가가 함께 붙은 옷이었다.

‘게다가 옷에 서브 옵션으로 붙인 클린 마법에 엄청난 진심이 담겨있는데?’

심혈을 기울인 작품에 더러움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드워프들의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괜찮아. 그거 잘 어울리네.”

잘 어울리는 옵션이라 생각한 룬이 긍정해주자, 표정이 환해진 아멜리아가 흑미에게 작게 ‘고마워.’라고 소곤거렸다.

룬은 아공간 주머니를 뒤져 마력 사탕과 젤리를 일행들에게 나눠주었다.

“일시적으로 각자에게 필요한 능력치를 높여주는 간식이다. 이건, 내가 신호하면 먹으면 돼.”

룬의 지시로 일행들은 심해 깊은 골짜기로 곧장 이동했다.

어제의 소란스러운 필드 정화작업 덕분에, 그들은 블루 드래곤의 마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까지 단번에 내려갔다.

듀라한과 함께 길 안내를 맡은 아멜리아가 빠르게 해구를 돌파했다.

-둥……둥.

압력을 뚫고 올라오는 심음.

거대한 몸체에 딱딱해 보이는 갑피.

끈적거리는 저주와 새까만 어둠이 바다보다 높은 밀도를 지닌 골짜기 안.

서로 몸을 기대고 있는 두 마리 블루 드래곤을 본 아멜리아의 눈에 투명한 물이 맺혔다.

하지만 이내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창 ‘멜’을 꾹 쥐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룬 역시 잠든 블루 드래곤들을 살폈다.

‘물의 일족이라.’

크리스티나의 전승 지식에 따르면, 본래 저들은 푸른 몸체를 빛내며 자체적으로 자정 능력을 발휘하고 있어야했다.

그런데 지금은 검게 기름때라도 낀 듯 끈적이는 저주와 어둠에 파묻혀있었다.

‘치명적인 어둠과 저주를 끌어안고 그대로 수면기에 들어버렸던 건가.’

룬은 머릿속을 스치는 몇 가지 가설 중 하나를 떠올렸다.

알이었던 아멜리아에게 어둠의 일족의 힘을 전부 밀어 넣으려했던 그들.

하지만 생각과 달리, 힘은 제대로 보관되지 못하고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해츨링이 어둠을 모두 감당하기 어렵다는 걸 안 이들이 택한 마지막 수단.

바로 힘을 조절하는 능력이 최대한 증폭되는 시기, 수면기에 드는 것이었다.

성체인 아멜리아의 부모용은 가장 치명적인 힘, ‘저주’라는 독을 대부분 품에 안고 잠들었다.

그 덕분에, 힘은 레어 밖으로 번지지 않을 수 있었다.

‘과연. 이들은 아멜리아가 성체가 될 때까지 시간을 벌 셈이었어.’

아멜리아를 보호하고, 블루 드래곤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한 희생이었다.

‘덕분에 어둠과 저주가 이 이상 번지지 않고, 아멜리아도 무사히 성장해올 수 있었던 것이로군.’

룬 역시, 10년 동안 수면기를 거치며 자연스럽게 힘과 체력을 상승시켰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갓 태어난 흑미가 양분으로 삼기에 충분한 어둠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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