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242)

마찬가지로, 성체인 블루 드래곤의 수면기에는 그들이 지닌 정화의 힘을 계속 뿜어냈을 터.

아멜리아가 성장하여 강해지면 그들의 어둠을 정화해줄 테고, 그럼 원래대로 돌아가리라 여겼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점이 있었다.

어둠 속의 저주에 그들이 역으로 물들리란 가능성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오만이었지.’

룬은 즉시 손을 뻗었다.

“시작한다. 아까 준 간식, 지금 먹어.”

일행들이 사탕과 젤리를 입안에 넣자 새콤달콤한 맛이 가득 번졌다.

아멜리아는 고통을 진정시키는 느낌을 가만히 받아들였고, 흑미는 몸이 훨씬 빠르고 강해지는 느낌에 눈을 반짝였다.

“흑미, 준비됐어요!”

[나, 나도야!]

“좋아.”

룬 역시 입 안에 우유맛 캔디를 물고, 거대한 드래곤의 어둠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새까만 골짜기에 잠겨있던 저주와 어둠으로 뒤범벅이 된 블루 드래곤의 표피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멍이라도 든 것처럼, 검보랏빛으로 변질된 블루 드래곤.

크리스티나의 본체화보다 더 거대한 육체가 간헐적으로 꿈틀거렸다.

- 크르르……. 그륵……!

룬은 그를 지켜보며 긴장감을 높였다.

‘표피가 곪았어.’

군데군데 부식된 드래곤 비늘.

정화의 속도보다 저주에 잠식되는 곳이 더 빠른 표피는 심하게 상해있기도 했다.

룬은 아멜리아를 돌아보았다.

창을 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잘 들어, 아멜리아.”

흠칫!

어깨를 움찔거린 인어에게 룬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 싸우지 않으면, 네 부모는 부식과 광기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해. 넌 그걸 막으러 온 거야.”

아멜리아의 입술이 열리며 탄식이 터져 나왔다.

[미, 미안. 알고…… 있, 있어.]

‘하긴 안다고 다 잘될 리 있나.’

아멜리아는 아직 다 자라지 못한 해츨링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런 사정까지 봐줄 수는 없었다.

룬은 강수를 두기로 했다.

“계속 불안해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못하겠다고 미리 말해. 어차피 잃는 건 없어. 이전으로 돌아갈 뿐이야.”

[…….]

“네가 포기한다면…… 널 빼고 다른 계획을 세우겠어.”

[……!]

곁에서 듣고 있던 흑미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늘 과묵한 듀라한조차 룬을 돌아보며 의중을 확인하려 들었다.

<이 팀에서 제외된다>.

그 말에 아멜리아가 숨을 삼키더니 창을 꽉 쥐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건 시, 싫어.]

그녀가 고개를 젓자, 물빛 머리카락이 좌우로 흔들렸다.

처음으로 동료가 된 이들을 통해 그녀는 제 몫을 해낼 기회와 강함을 얻었다.

그 계기를 잃어버리는 짓만큼은 절대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호, 호흡. 가다듬을게.]

룬에게 배웠던 호흡법에 잠시 몰두한 아멜리아가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다시 침착한 바다색 눈동자를 드러냈다.

[이제…… 괜찮아.]

“다행이다! 룬 님이 너무 무섭게 말했어요! 언니 엄청 놀랐을 텐데, 너무해요!”

룬은 피식 웃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룬을 듀라한이 물끄러미 바라봐왔다.

‘정신 차려서 다행이군.’

<포기해도 괜찮다. 네가 없이도 해낼 다른 방법이 있다.>

그 말은 아멜리아에게 있어 스스로 자기 자리를 선택할 기회를 영영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멜리아가 없이 진행할 계획은 사실 당장 생각나는 게 없다. 아멜리아의 부모용에게서 어둠을 모두 흡수하는 데에는 아멜리아의 도움이 필요해.’

그럼에도 포기해도 된다는 선택지를 준 이유는, 자기 자리를 되찾기 위해 여기까지 온 마음을 역이용한 말이었다.

불행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아멜리아가 마음을 다 잡았다.

‘난…… 다시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지 않아!’

아랫입술을 깨문 아멜리아에게서 정화의 힘이 넘실거렸다.

휙.

고개를 돌린 아멜리아가 룬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불안하던 눈빛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고 깊은 시선이 똑바로 그에게 향했다.

[룬. 신호해줘.]

룬은 고개를 까닥이고 흑미에게 눈짓했다.

‘시작은 흑미의 매혹.’

끄덕.

그동안 숱하게 심해 필드 정화작업에 참여해온 흑미 역시 이미 매혹을 사용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를 확인한 룬이 마지막 봉인을 깨뜨리듯, 블루 드래곤들을 뒤덮고 있는 어둠의 막을 단숨에 거둬냈다.

서큐버스의 <매혹>이 잠깐이나마 먹히려면 정신이 오랜 시간 어둠과 저주에 물든 지금이 적기였다.

“갈게요!”

-화앗!

흑미의 힘이 블루 드래곤들에게 스몄다.

찐득한 어둠에 물든 물의 일족, 블루 드래곤들이 영향 받는 시간은 고작 몇 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멜리아가 정화의 언령을 외쳤다.

[정화하라!]

화악!

하얗게 터진 <정화> 언령이 거체의 드래곤들을 뒤덮었다.

-쿠우우우!

잠들어있던 바다의 지배자가 깨어나 고개를 들어올렸다.

번쩍.

거대한 짐승의 동공이 데록 굴렀다.

비통과 광기에 젖은 눈빛이 그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거대한 두 드래곤의 얼굴이 일행들을 향하자 몸이 굳어진 그들이 불길함을 감지했다.

[시, 실패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멜리아의 말에 룬이 혀를 찼다.

‘쉽진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드래곤 피어(fear)가 발동할 거야. 물러나.”

룬의 신호에 일행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블루 드래곤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피잇!

광역으로 퍼지는 피어(fear)로 블루 드래곤의 힘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며 등 뒤로 식은땀이 맺히는 걸 느꼈다.

‘살벌하군.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건 힘들겠어.’

그러나 말과 달리, 룬의 붉은 눈은 전투에 대한 고양감으로 반짝였다.

‘성체의 피어(fear)를 정면으로 대응 하기는 어렵다. 저들에게 드리워졌던 어둠의 장막을 거둬들였을 뿐. 제대로 어둠 일족의 힘, 근원을 흡수하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해.’

룬은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 틈을 타 블루 드래곤의 몸에 깊이 박힌 어둠을 흡수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에게 힘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룬에게 돌아가려는 힘이 블루 드래곤에게 꽉 붙들려있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던 어둠의 회수.

룬의 당황스러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드래곤이 입을 벌렸다.

“브레스다!”

콰아아아!

머리 하나 더 큰 드래곤이 벌린 아가리에서 용오름이 터져나왔다.

마치 일행들의 도주로를 추적하듯, 쏘아진 자리에서부터 일행들이 있는 곳까지 물기둥이 회오리치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캬앙!”

꼬리털을 바짝 세운 흑미가 본능적으로 브레스 범위 밖으로 빠르게 도망쳤고, 다른 이들도 휘말리지 않고 벗어날 수 있었다.

심해의 땅이 움푹 파였다.

심지어 다른 드래곤도 시간차를 두고 브레스를 뿜었다.

쿠어어어!

콰앙!

집채만 한 크기의 물 회오리가 주변의 물을 빨아들이며 골짜기 벽을 뚫어버렸다.

“히익!”

쭈뼛, 소름이 돋은 흑미가 냉큼 룬 근처로 다가왔고, 듀라한 역시 방어적인 자세로 그들의 앞에 섰다.

빠르게 그들 곁에 온 아멜리아가 반발에 충격을 받았는지 숨을 몰아쉬었다.

“이상해. 저, 정화를 거부…… 해, 했어…… 가, 강한 저항이었어…….”

“정화를 거부했다고?”

되묻는 룬에게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룬 님. 이제 어떻게 해요?”

흑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룬에게 물어왔다.

“특이한 상황일수록 그 이유는 더 특징적이고 분명한 법이야. 그것만 찾으면 일은 쉬울 거다.”

별 다른 동요가 없는 침착함은 아이가 가지기엔 지나치게 차분했으나, 그를 보는 다른 일행들에게 묘한 신뢰를 주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분명히 있다.’

짧은 순간, 룬은 듀라한과 눈빛을 교환했다.

‘교란시켜. 방법은 내가 찾으마.’

철컥!

즉시 듀라한이 일행의 오른쪽으로 뛰쳐나가더니 검은 구멍을 열었다.

-그아아아아!

룬의 마법으로 청력, 심력을 보호받았음에도 끔찍할 정도로 선명한 죽음의 소리.

드래곤들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듀라한에게 몸을 틀었다.

물의 정령

모두 아이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룬은 더욱 침착한 상태로 드래곤들을 살폈다.

룬은 가진 정보들을 조합했다.

‘몸은 이미 곯을 대로 곯았다. 그런 상태에서 정화를 거부하고 독이나 마찬가지인 힘을 쥐고 있으려는 이유가 뭐지?’

블랙 드래곤 일족의 힘을 원해서?

균형자라는 의무감이 강해서?

룬은 떠올린 생각을 바로 부정했다.

‘달면 삼키겠지만 쓰면 뱉어내게 마련이지. 목마른 자는 본능적으로 물을 삼키기 마련이고.’

어둠의 힘을 삼키기엔 저주라는 독이 너무 강했다.

그걸 빼내주려는 룬의 힘을 완강하게 거부한 이들.

그렇다고 균형자로서의 의무감이라기엔 품은 어둠을 안정시킬 아멜리아의 정화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쳐버린 상태라서 사리판단이 안 되는 건가?’

룬은 듀라한과 싸우는 드래곤 둘의 모습을 계속 눈에 담았다.

물보라가 일고, 물의 밀도 차이로 인해 바다 속임에도 해일이 넘실거렸다.

쿠르릉!

어둠의 기사는 먹처럼 검은 대검을 쥐고 밀려드는 해일을 순식간에 갈라내었다.

‘이상하군. 공격이 단조로워.’

관찰하던 룬은 이내 이유를 깨달았다.

드래곤들의 공격은 위협적이었지만, 철저하게 방어적이었다.

듀라한 역시, 본능적으로 깨닫고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대응하기 시작했다.

‘저만한 힘을 가졌으면서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다니. 게다가 자리에서 벗어나지도 않는 것도 이상해. 이런 양상은 뭔가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무엇을?

룬은 섬광처럼 스친 생각에 멍해졌다.

“아멜리아.”

[응?]

가늠하기 어려운 눈을 한 룬이 지시했다.

“본체화 해.”

[지, 지금?]

“그래. 기왕이면 나정도 나이의, 가능하다면 더 어릴 때의 해츨링으로.”

[어릴 때…… 말야?]

아멜리아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지만 창을 내리고 모습을 바꾸었다.

“꺄우…….”

작고 파란 비늘이 반짝이는 블루 드래곤 해츨링.

룬은 흑미와 백야의 중간 크기쯤 되는 해츨링을 데리고 듀라한 앞에 섰다.

깜짝 놀라 굳은 물빛 눈동자가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 있는 성체 블루 드래곤의 눈과 마주쳤다.

“뀨, 뀨후…….”

맨 몸으로 광증에 취한 성체를 마주친 아멜리아의 눈에 맑은 물막이 맺혔다.

룬은 침착하게 상대의 행동을 살폈다.

그리고, 몇 백 년 동안 저주 속에 갇힌 블루 드래곤들의 울부짖음이 귀를 찢었다.

-캬아아아!

물이 진동하며 그들의 내부까지 파동이 전해졌다.

주변의 돌이 깨져 떨어지고, 쌓여있던 퇴적물의 산이 부서져 나갔다.

쿠구구궁!

두 개의 긴 목이 심해를 휘저어대자 해류가 어지럽게 뒤엉켰다.

해류와 드래곤의 꼬리짓에 휘말려 날아오는 바위 따위를 듀라한이 양 손으로 잡아 다른 방향으로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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