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뀨, 뀨후……!”
“괜찮아. 천천히 네 몸 주변에 정화의 능력을 사용해.”
능력까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으므로, 아멜리아는 몸을 살짝 떨면서도 자신의 몸 주변으로 정화의 언령을 발동시켰다.
어둠과 저주로 눈이 가려진 블루 드래곤들은 본능적으로 정화가 뿜어내는 빛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 잘 하고 있어. 네가 가진 힘을 보여주기만 해.”
‘지금이다.’
룬은 빛 아래에서 드래곤들에게 찐득하게 스며든 어둠의 힘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쿵!
쿵!
블루 드래곤이 몸을 일으켰다.
마치 빛에 이끌리듯, 두 드래곤은 저마다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천천히, 지치고 무거운 발걸음을 끌며 아멜리아를 든 룬 쪽으로 다가왔다.
-아……멜…리아.
[아, 아빠……? 엄마?]
아멜리아를 부르는 두 개의 소리가 잔뜩 뭉개져서 들려왔다.
놀라 굳어버린 아멜리아가 룬의 손을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루, 룬. 나 가야 해. 엄마, 아빠가……!]
“진정해.”
아멜리아가 다가가기엔 어둠이 아직 짙었다.
무엇보다, 가까이 다가오려는 두 성체 블루 드래곤의 몸에는 저주가 가득했다.
속으로 혀를 찬 룬이 바동거리는 해츨링을 진정시키기 위해 더욱 꽉 잡았을 때였다.
-크르릉!
날 것의 저릿한 살기와 분노가 룬을 향해 쏘아졌다.
‘이런.’
콰앙!
룬이 서 있던 장소에 순식간에 거대한 블루 드래곤의 꼬리가 내리쳐졌다.
“룬 님! 백야! 언니!”
캬앙 소리를 내며 흑미가 달려왔다.
“진정해.”
고저 없는 룬의 목소리에 흑미가 제자리에 섰다.
바다에 잔뜩 번진 모래와 자잘한 돌들이 가라앉으며 룬과 아멜리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룬은 자신의 주변에 오색 빛의 작은 불티가 반짝이는, 투명한 막 안에서 아멜리아를 든 채 서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투명한 물빛의 돌고래.
그 안에 비쳐진 룬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에 오기위해 계속 기다려 왔군.”
대답처럼 돌고래 몸체에 박힌 은하수가 반짝였다.
“큐후……?”
[이, 이게…… 뭐야?]
아멜리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들을 감싼 반투명한 돌고래를 살폈다.
“물의 정령이야. 좀 더 정확히는 바다의 정령이랄까.”
[정……령?]
단순한 꼬리치기 타격이었을 뿐이라 한들, 무려 성체 드래곤의 공격을 정면에서 방어한 돌고래.
적어도 최상급 정령이었다.
룬은 차분히 물의 정령을 살펴보았다.
“그래. 바다가 정화되니 이제야 찾아올 수 있었던 모양이야.”
‘애초에 바다에서 물과 관련된 정령을 전혀 볼 수 없었던 게 이상한 일이었어.’
블루 드래곤은 물의 친화력을 타고난 일족.
한데, 레어 안쪽은 물론이고 필드에 몬스터와 해양생물뿐이라는 점에 룬은 진즉 이상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깊은 바다 속만큼 물의 정령이 머물기 좋은 장소는 드물었다.
정령에게 위협이 될 존재도 없고, 속성의 근원인 물이 가득한데다 충만한 마력까지.
여러모로 정령이 살기에 매우 좋은 조건이 갖춰진 장소였다.
‘어둠의 힘과 저주 탓에 정령이 머물 수 없는 장소가 되었던 거지.’
심해 정화는 아멜리아의 부모용을 상대하기 편한 장소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러니 어둠이 걷힌 이 자리에 언젠가 정령들이 돌아오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 돌고래 정령은 전부터 레어에 들어오려고 기다리고 있던 녀석임이 분명했다.
한편, 아멜리아는 정령을 올려다보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신기……해. 처, 처음 보는데 왠지…… 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기분이 들어.]
“……그럴지도 모르지. 네 부모님이 너를 부탁한 정령일 테니까.”
크리스티나 역시 어린 룬에게 빛의 정령인 라이를 붙였다.
정령은 배신을 모르니 아멜리아를 맡기기에 이보다 더 좋은 대상이 없었으리라.
‘최상급의 물의 정령이라지만 고작 하루 만에 여기 올 정도다. 이미 아멜리아를 알고 있었다고 봐야겠지.’
그 순간, 돌고래가 룬과 아멜리아를 향해 등을 내밀었다.
[타, 타라는 것 같은데…….]
그래도 될지 전전긍긍한 아멜리아를 데리고 룬이 냉큼 돌고래의 등에 올라탔다.
깜짝 놀라는 아멜리아와 룬을 태운 돌고래는 쏟아지는 브레스를 빠르게 피해 다녔다.
‘운이 좋았군. 정령이 광증에 빠진 자들과의 계약이라 해도 끝까지 지키려 들다니.’
돌고래와 계약된 대상은 필시 두 마리의 블루 드래곤 중 하나일 터.
계약을 제대로 유지할 상태도 아니건만, 그들의 부탁을 수백 년간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는 뜻이었다.
‘정령이라…….’
룬이 그 충직함을 인상 깊게 여기는 동안, 돌고래는 다른 일행이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안전거리에서 큰 움직임 없이 블루 드래곤들을 경계하며 기다렸다.
룬은 한쪽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이 녀석의 도움이 있다면 생각보다 일이 편하겠어.’
룬은 돌고래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 ?
고개를 갸웃하는 돌고래를 확인하고, 룬은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이제까지 모아온 온갖 간식을 꺼내들었다.
크리스티나가 만든 과일잼이 올려 진 쿠키, 푸딩, 젤리, 사탕.
사이사이에 룬이 시험 삼아 만든 엿, 꽈배기까지.
크리스티나와 룬의 마력이 깃든 마력음식들이었다.
“이걸 먹여서 네 계약자인 저들을 되돌릴 거야. 너도 협조해.”
- …….
회심의 협상이었으나 돌고래의 눈이 영 구미가 안 당긴다는 눈으로 바뀌었다.
‘저게?’
룬이 돌고래와 눈싸움을 하고 있자, 아멜리아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둘 사이에 끼었다.
[정령아. 나, 나도 부, 부탁해. 우리…… 부, 부모님을 깨우고 싶어…….]
아멜리아의 말을 들은 돌고래가 지그시 그녀를 보더니 못이긴 척 슬슬 헤엄쳐 블루 드래곤들의 근처로 날아올랐다.
[허, 허락해 준 모양이야!]
“……그래.”
탐탁지 않았지만 룬은 평정을 찾고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건 골드 드래곤의 축복이 담긴 마력 음식이야. 먹으면 저주를 풀 수 있어.”
[이…… 이 음식들이?]
“그래.”
블루 드래곤들은 강력했다.
하지만 룬이 준비한 건 마차에 한 짐 가득 실을 정도의 마력 요리.
심지어 골드 드래곤 장로의 힘이 담긴 마력 요리였다.
‘여기에 들어간 크리스티나의 힘을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을 테지.’
하지만 아멜리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귀, 귀한…… 걸. 이렇게나 많……이 줘도 괘, 괜찮아?]
“원래 남의 집에 가면서 빈손으로 오는 건 정 없는 짓이지.”
‘이걸로 네게 빚을 얹어놔야 나중에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거든.’
어둠의 힘을 회수하는 건 원래 그의 힘이었던 걸 가져가는 일일뿐.
룬은 물의 일족에게 은혜를 입혀 그들이 가진 물의 인장을 받아낼 셈이었다.
“다들 준비됐어?”
일행들은 직관적으로 그들이 할 일을 깨닫고 눈을 빛냈다.
“네!”
흑미가 양 손 가득 블루베리 쿠키를 쥐고 서며 웃었다.
돌고래는 일행들을 데리고 블루 드래곤의 얼굴을 향해 헤엄쳤다.
마침 브레스를 쏘기 위해 드래곤이 아가리를 쩍 벌리는 순간, 룬이 외쳤다.
“지금! 전부 쏟아 넣어!”
일행들은 그 거대한 입 안에 작은 간식거리를 던져 넣었다.
마치 소인국 사람들이 거인의 배를 불리기 위해 음식을 던져 넣듯, 과자들은 전부 블루 드래곤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블루 드래곤들의 뱃속에서 골드 드래곤 장로의 마력이 터져 나왔다.
파앗!
간식에 깃든 금빛의 축복이 블루 드래곤의 몸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그중에, 룬이 만든 엿은 진한 블랙 드래곤 일족의 근원을 찾아내 과녁처럼 표시했다.
블루 드래곤의 심장 옆.
드래곤 하트의 마력에 붙잡혀 있는 어둠 일족의 힘!
‘저기 있군.’
룬은 목표물을 노려보았다.
“아멜리아, 지금!”
“큐우!”
해츨링 모습의 아멜리아가 앞발을 뻗으며 정화의 빛을 뿜었다.
파앗!
블루 드래곤들의 몸이 축복과 정화에 한가득 감싸였다.
-쿠아아악!
마치 체한 것처럼 몸을 뒤틀기 시작한 블루 드래곤들.
심지어 타고난 정화능력까지 본능적으로 발동되자, 어둠의 힘과 저주가 자연스럽게 분리되어 안정되기 시작했다.
‘지금인가.’
룬은 분리되어 나온 어둠과 저주를 불러들였다.
-캬아악!
두 블루 드래곤의 아가리 밖으로 부름에 이끌린 어둠의 근원이 튀어나왔다.
‘됐다!’
룬이 손을 뻗자 근원들이 손 안에 흡수됐다.
사실대로 답해
그 순간, 맥이 탁 풀린 블루 드래곤의 눈동자에서 동공이 꺼지고, 몸이 무너지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웅!
쓰러진 드래곤들은 잘게 몸을 떨며 헐떡였다.
놀란 아멜리아는 돌고래와 함께 블루 드래곤들에게 다가갔다.
“큐, 큐우우!”
[어, 엄마, 아빠!]
아멜리아가 블루드래곤의 콧등을 문지르며 열심히 정화를 시전했다.
크리스티나의 축복이 남아있는 몸이 아멜리아의 정화를 받아들이자, 저주로 곪아가던 블루 드래곤의 몸에서 새 살이 돋기 시작했다.
‘골드 드래곤의 축복은 대상을 회복시키고 활력을 주지.’
룬이 직접 겪었으니 효과는 확실했다.
블루 드래곤들은 안에 있던 독이 완전히 빠져나가고 치유가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다만 광증과 저주에 노출된 기간이 길었던지라 완전 회복까지는 시일이 꽤 필요할 터.
나머지는 아멜리아와 그들의 능력에 따른 일이었다.
그리고 룬은 자신의 몸 안에 자리 잡은 깊고 진한 어둠을 느끼고 속으로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드디어 손에 넣었어.’
처음부터 제게 와야 했던 어둠 일족의 힘.
그 근원을 삼킨 그는 블루 드래곤들을 보며 잠시 아쉬운 기분을 느꼈다.
‘당장 전력으로 시험해 볼 수 없다는 건 좀 아쉬운데.’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이 힘을 선보이는 건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뭐, 비장의 카드를 숨겨두고 있다 생각하면 마냥 아쉬운 일은 아니지만.’
룬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아멜리아.”
부모의 상태를 살피며 조바심 내던 아멜리아가 룬을 돌아보았다.
[으, 응?]
“곧 여기에 빛의 일족인 골드 드래곤의 장로가 올 거야. 만나게 되면 도움을 청해.”
룬은 앞으로 아멜리아가 해야 할 일을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큐후!”
[알겠어……!]
‘조만간 이쪽 문제도 해결하고, 잘하면 물의 던전에도 가볼 수 있겠군.’
룬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기대하며 일행들을 챙겼다.
‘그런데…….’
다만, 그저 기대만 품고서 돌아가기엔 문제가 아직 남아있었다.
정확히는 물의 영역이 아닌, 룬 자신에게.
‘아멜리아가 잘 말해줘야 할 텐데.’
곧 이 상황을 전부 알아차리고 진노할 크리스티나를 떠올리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그는 부디 무사히 넘어갈 수 있기만을 기도했다.
***
룬과 그 일행들은 마력 열쇠로 만든 통로를 통해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