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242)

심해에서는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와서 확인해 보니 벌써 이튿날 오후였다.

“흐암. 흑미 졸려요…….”

“그래. 가서 좀 쉬어라.”

흑미는 연거푸 하품하더니 백야를 품에 안고 방으로 향했다.

성체의 드래곤을 정면으로 맞닥뜨렸으니 체력도, 심력도 상당히 소모되는 건 당연했다.

‘애초에 삼 일을 예상했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린 셈이지.’

룬은 아바타의 신호부터 살폈다.

딱히 움직임이나 위급상황도 아니고, 수면 상태로 확인됐다.

‘크리스티나의 귀가는 예정된 시일보다 더 후의 일이 될 테니, 그동안 회복하고 수련도 편하게 할 수 있겠어.’

룬은 자신의 아바타를 회수하기 위해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예상치 못한 손님이 와 있었다.

“룬.”

“……형?”

‘페르디키온이 왜 여기에?’

당혹감이 스친 룬의 얼굴을 본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왜 이따위 인형이 네 행세를 하고 있는 거냐.”

그의 시선 끝에는 룬을 닮은 아바타가 침대에 누워 곤히 숙면 중이었다.

‘젠장.’

룬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그건 내가 만든 인형이야. 처음 만든 건데 잘 작동하네.”

룬은 무해하게 웃으며 물었다.

“형님은 여긴 어쩐 일로 왔어?”

“내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오는 자인가.”

꼬였다.

룬은 그렇게 직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지. 그래도 형님 오는 줄 알았다면 기다렸다가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내 방에서 갑자기 마주치니까 놀라서 그래.”

페르디키온은 룬을 지그시 노려보더니 첫 질문에 대해 답했다.

“크리스티나 님께서 며칠 부재하신다기에. 수련 빼먹지 않고 제대로 하는지 확인이나 할 겸 왔다.”

아닌 척 은근 챙기려드는 그의 성격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룬은 상황을 바로 이해했다.

한마디로, 혼자 남은 룬을 챙기러 왔다는 소리였다.

‘이미 수업이나 식사 초대 때문에 자주 오가던 녀석이니 크리스티나에게 일일이 말하고 올 필요는 없긴 하지.’

룬은 페르디키온의 눈빛을 보고 인형에 대한 의심을 읽어냈다.

“그럼 내 차례군. 이런 인형만 두고 넌 어디에 있다 온 거냐? 사실대로 답해.”

‘이거, 그냥 넘어가긴 글렀군.’

그의 물음에 룬은 볼을 긁적였다.

“크리스티나 님의 정령인 라이는 네가 잠들었다고 믿고 제 빛이 방해될까 방 밖에 있었기에 전혀 몰랐던 모양이더군. 작정하고 그걸 노린 거라고 보이는데.”

조용히 침대에 자고 있는 아바타를 보고 있던 페르디키온이 팔짱을 낀 채 싸늘한 눈빛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크리스티나도 알게 될 일이니 상관없나.’

크리스티나가 외출하던 날, 룬은 도시락을 만들어 주며 순도 높은 물의 마력을 가진 요리재료를 구해다줄 것을 부탁해 둔 터였다.

룬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블루 드래곤들의 상태를 살필 수 있도록 해 둔 조치였다.

‘목표로 했던 어둠의 힘은 얻었으니까.’

근원이 되는 어둠은 그가 흡수했으나, 광증의 여파에 오래도록 시달린 그들에게는 크리스티나의 도움이 필요할 터였다.

“실은…… 물의 일족이 사는 곳에 다녀왔어.”

“뭐라고?”

황당해하는 페르디키온에게 룬은 순순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제드에게 암시장 열쇠를 마력 실뜨기로 본을 뜬 과정부터, 블루드래곤의 상태를 알게 된 이야기까지.

페르디키온은 듣다 참지 못하고 중간 중간 기함을 터트렸다.

“대체 넌 왜 그렇게 무모한 거냐! 아직 백 년도 안 된 해츨링이 광증에 빠진 어른을 상대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이냐!?”

“어차피 내가 거둬가야 할 힘이었는걸. 블루 드래곤의 해츨링인 아멜리아도 꽤 착한 녀석이었고.”

“착해? 그 녀석은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널 대책 없이 그런 위험한 곳에 오게끔 놔뒀어. 드래곤 족이라기엔 수치스러운 꼬마로군.”

‘뭐 이렇게까지 화를 내냐.’

룬이 어린 건 맞았지만, 결국 아멜리아도 도움이 절실한 어린 해츨링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솔직히 말하기에는 눈에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한 모습이 위험해보였다.

‘일단 격해진 감정을 가라앉히는 게 우선이겠는걸.’

룬은 큼, 하고 가볍게 헛기침을 하곤 아공간 주머니에서 붉은색의 모코지석을 꺼냈다.

“너무 화 내지 마 형. 정말 다친 곳 하나 없고, 무사히 잘 다녀왔으니까. 참, 깜빡할 뻔했다. 이거 받아, 형. 특별히 형님을 위해 준비한 거야.”

“……이게 뭔데?”

분노가 완전히 사그라지지는 않았으나, 일단 무사한 걸 눈으로 확인한 그는 룬이 준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모코지석이라고 해. 제드를 통해 만든 연락용 아티팩트야.”

“연락용 수정구라도 필요로 했던 거냐? 가지고 싶었다면 진작 챙겨 줄 수 있었건만.”

“수정구랑은 달리, 이건 글자만 주고받을 수 있어.”

드래곤은 마력이 넘쳐나는 종족이기에, 페르디키온은 마력이 거의 없는 자들도 연락이 가능하다는 점에는 메리트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부재중일 때 문자를 남겨놓으면, 수신자가 그에 대한 답을 나중에라도 할 수 있다는 점에는 제법 흥미로워했다.

“그래, 그러니까…… 이걸로 네 녀석에게 바로 연락도 가능하고, 나중에라도 확인할 수 있단 말이지?”

페르디키온에게서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왜 오랏줄을 든 포졸 같은 얼굴이지?’

“뭐, 그렇지.”

룬은 속마음과 달리 겉으로는 아이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알겠다. 앞으로 내가 보낸 문자는 바로바로 답장하도록 해. 알겠냐?”

“……내가 확인이 좀 늦는 편인데…….”

“알겠냐?”

“……노력할게.”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는 시선을 슬쩍 회피하며, 룬은 다른 미끼를 던졌다.

“마침 크리스티나도 자리 비웠는데, 내 방에 한번 놀러오지 않을래?”

“네 영역이라고?”

“엉. 검은 방이라고 해. 내 일족이 남긴 장소야.”

예상대로 페르디키온이 흥미를 보였다.

‘역시, 멸족한 블랙 드래곤에 대한 호기심 정도는 있군. 불의 일족 장로가 될 녀석이니만큼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지.’

룬은 자신의 ‘검은방’에 대한 가치를 측정했다.

크리스티나가 대리로 관리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검은방의 모든 것은 블랙 드래곤의 것.

실제로 본 적 없는 ‘어둠의 일족’에 대해 직접 보고 자취를 만져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크리스티나와 룬의 허락 없이는 구경조차 불가능한 장소였다.

“비록 정식 레어는 아니지만, 내 영역이니 한 번쯤 형님을 초대하고 싶었어.”

“……나 말고 또 누가 초대받았지?”

“현재로선 형님이 최초야. 크리스티나의 레어에 거주하고 있는 내 권속들이야 자주 오갔지만.”

“크흠, 그렇단 말이지.”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룬은 페르디키온의 분위기가 풀렸음을 직감했다.

그는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 깔끔한 얼굴로 수락했다.

“일족의 후계자로서 어둠 일족의 영역에 정식으로 초대되는 건 귀한 기회로군. 가자.”

“좋아.”

“그렇다고 멋대로 위험한 곳에 가는 걸 그냥 넘길 생각은 아니다. 알아둬.”

은근히 노려보는 그에게 룬은 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통할 줄 알았지. 하지만 바로 가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이 기회가 꽤 탐났나보군.’

단순한 성미를 가진 불의 일족다웠다.

분노도 잊은 채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는 페르디키온을 등지고, 룬은 자신의 마력을 움직였다.

‘하긴, 어둠 일족에 대해선 저 녀석도 전해들은 이야기가 다일 테니 궁금했을 만해.’

룬은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걸 만족스럽게 여기며 검은방으로 가는 이동마법을 시전했다.

***

룬과 페르디키온은 장미향이 가득한 검은방에 도착했다.

“어때?”

“생각보다 꽤 편안하군.”

어둠과 저주의 힘이 깃든 장소이니만큼 어색해할 만도 하건만, 페르디키온은 태연히 대꾸했다.

실제로 그는 블랙 드래곤의 유산과 저주받은 물건들을 살피고 있었다.

“여기가 네 영역인 거냐.”

“그렇지. 물건들이 좀 정신없이 있어. 이해 좀 해줘.”

“이 정도면 충분해. 개의치 마라.”

룬은 온 김에 마계장미의 뿌리에 양분을 챙겨주었다.

한쪽에서 듀라한이 몸을 일으킨 것을 보고 페르디키온이 관심을 보였다.

“저 녀석은?”

“아. 형은 처음 보지? 얼마 전에 권속이 된 내 기사, 듀라한.”

“듀라한이라면, 크리스티나님께서 직접 봉인한 마왕의 기사 말이냐?”

“응. 그런데 이젠 내 기사야. 크리스티나도 허락해 줬고.”

페르디키온은 미심쩍은 눈으로 듀라한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생각보다 불쾌한 기분이 들진 않는군. 희미하지만 불의 기운도 느껴지기 때문인가.”

룬은 페르디키온의 말을 들으며 내심 감탄했다.

‘제법이네. 크리스티나만큼은 아니겠지만 자신과 같은 불의 속성은 잘 감지하는 모양이지.’

잠깐만 앉아봐

불사조의 깃털이 듀라한의 심장에 깃든 탓에 불의 기운이 존재하긴 했다.

아주 미량이지만.

그걸 아직 해츨링인 페르디키온이 제대로 느낀다는 건 천부적인 재능 탓이었다.

룬의 생각을 모르는 페르디키온은 듀라한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다른 권속들은?”

“쉬러. 오늘 하루 정도는 푹 자야해.”

“성체인 블루 드래곤을 상대했기 때문에?”

“……맞아.”

페르디키온의 미간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룬. 전부터 생각했다만 넌 너무 무모해.”

‘딱히 무모한 일은 아니었는데.’

대답하지 않는 룬에게 페르디키온은 시선을 던졌다.

“잘 들어라. 네가 어둠 일족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일족의 힘에 고통 받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크리스티나 님에게 제대로 의논했어야 했어.”

“그건 그렇지.”

‘내가 평범한 해츨링이었다면.’

광증에 걸린 성체의 드래곤을 상대하려 드는 10년생 해츨링.

그야말로 범 앞에 나대는 어린 강아지 꼴이었다.

페르디키온의 말을 긍정한 룬이 이어 말했다.

“그렇지만, 아멜리아의 일가가 내가 성체가 될 때까지 버틸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어. 크리스티나가 조치를 취해줄지도 모르지만, 그게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 판단이 옳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이냐. 넌 어른이 아니야. 아직 어리고, 보호받아야 할 해츨링이란 말이다.”

물론 그랬지만, 실상 그 속에 깃든 건 천 년 가까이 수련해 왔던 신수였다.

이 사실을 모르는 페르디키온이 충분히 할 만한 이야기였으므로, 룬은 물끄러미 그를 마주보았다.

“……만약 내가 사실대로 말했다면, 크리스티나는 그들을 위해 날 거기 데려가 주었을까?”

“그건 당연히!”

페르디키온은 그 물음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 술 더 떠서, 좀 전까지 어리게만 보였던 아우의 시선이 그보다 훨씬 깊어보였다.

“어려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난, 정말로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해냈는걸.”

아직 어리지만, 페르디키온 역시 불의 일족 후계자로서 룬의 잠재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아우는 블랙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어둠의 지배자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다.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자 앞에 선 기분은, 자신의 아우라 해도 때때로 열등감과 호승심.

때론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룬이 나타나기 전에는, 페르디키온은 누구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고 여겨지던 후계였으니까.

하지만.

‘한때 이 녀석을 두고 못난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재능이 부럽기도 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내 아우가 된 룬이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언제나 누군가의 위에 있어야만 한다는 훈육 속에서 자랐던 그가, 처음으로 그런 기준 없이 누군가를 대하는 법을 알게 해준 특별한 존재였다.

하지만 이를 알려준 제 아우는 페르디키온에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의논조차 하지 않는다.

그 사실이 화가 났다.

룬에게 그의 존재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느껴졌으니까.

“네 능력이 출중한 건 안다. 네 말이 사실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게 잘못을 가려주진 않아.”

“잘못이라니?”

페르디키온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네가 상대한 자들은 광증에 빠져 피아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성체의 블루 드래곤 둘이다. 그 일을 누구 하나 알고 있던 자가 없었어. 만약, 일이 잘못되면 네 행방에 대해 알 자는 하나도 남지 않았을 게 아니냐!”

이성줄? 이미 얇아져 툭 건드리면 끊어질 지경까지 왔다.

어떻게든 이성의 끈을 조금 더 잡고 있었을 뿐, 페르디키온은 진작에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놀란 눈으로 룬이 입을 살짝 벌리고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지나치게 격분했음을 깨달은 붉은 머리의 소년은 시선을 룬의 발끝으로 떨어뜨렸다.

“……화내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내 아우가 무모한 짓을 하는 게 염려스러웠어.”

그저 룬이 자신을 믿을 수 있는 형으로 여기길 바랐다.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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