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242)

그가 누구도 믿지 않고 그저 군림하기만 했던 때, 믿음을 나눠 주었듯이 페르디키온도 룬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동등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기묘한 정적이 둘 사이에 맴돌았다.

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나름대로 방비는 해두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페르디키온이 보기엔 무모한 일이었겠지.’

어둠 일족의 힘을 회수하는 것.

신체적으로 어릴 뿐, 정신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그는 실패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점쳤다.

하지만 계획한 일이 완벽하게 성공한다고만 확신할 수는 없는 법.

‘잘 해결될 일이라 생각해 굳이 알릴 필요를 못 느낀 것뿐이지만……. 이건 안일했군.’

무섭게 화를 낸 페르디키온이지만, 그 기반에 깔린 염려와 걱정.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던 상황이라는 점에 화가 났을 뿐이라는 사실을 룬은 빠르게 눈치 챘다.

‘불의 인장을 넘길 정도로 친하다 생각한 자가 기별도 없이 행동했으니 말이야. 어찌 보면 미안한 짓을 했지.’

그는 머쓱한 얼굴을 해 보였다.

“충분히 이해했어. 걱정시켜서 미안해, 형.”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물론이야. 게다가 형이 날 염려해준다는 것도 잘 알겠던걸.”

룬은 희미하게 웃으며 페르디키온을 향해 말했다.

“고마워, 형. 그리고 진심으로 미안해.”

페르디키온은 입을 다물었다.

한참 어린 아우가 이렇게 순순히 시인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룬은 저를 빤히 보는 그 앞에서 잠시 침묵을 지켰다.

‘페르디키온은 자기 영역 안에 들어온 자들을 생각하는 녀석이지. 아직 어려서 감정 조절이 미숙할 뿐 크면서 차차 다듬어질 부분이고. 어찌 보면 화를 내는 게 좋은 신호야. 가치 없는 상대에게 저렇게 크게 동요할 수 없으니.’

긍정적으로 판단한 룬은 페르디키온이 스스로 화를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렸다.

타인을 제 아래에 두기 위해 화를 내는 녀석들도 있긴 했지만, 적어도 페르디키온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친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화가 나는 법.

불의 일족 장로후계와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므로, 룬은 여유로웠다.

‘저 단순한 녀석이 욱해서 화를 낼 만큼 나에 대한 신뢰가 두텁다는 소리야. 그렇다면…….’

오히려 할 말을 잃고 당황한 페르디키온.

그를 보며 룬은 이를 어떻게 이끌어갈지 결정했다.

“나한테 형님이 있어서 다행이야.”

“……!”

감정의 격화로 실수가 나온 상황에서 자신보다 훨씬 어린 룬이 겁먹지 않고 추켜세워 주기까지.

페르디키온이 눈에 띄게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녀석의 분노에 맞서지 않고 역이용한다.’

룬은 또박또박 설명을 이어갔다.

“비록 화를 냈지만, 그건 그만큼 나를 생각해주기 때문이라는 거 알아.”

“…….”

‘역시 부정하지는 않는군.’

페르디키온에게 시선을 주던 룬은 천천히 이어 말했다.

“사실은 나도 크리스티나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말인데, 내 얘기를 한번 들어볼래?”

“말해봐라.”

룬은 크리스티나를 배웅하던 날, 그녀에게 심해에서 나오는 요리재료를 공수해달라고 부탁한 일을 설명했다.

분노를 누른 채 가만히 들어주던 페르디키온이 핵심만 골라 읊었다.

“……크리스티나 님께서 물의 일족이 다스리는 곳에 방문하도록 유도했었군.”

“응. 그리고 만약의 경우, <마력 열쇠>를 이용해 빠져나오기만 해도 될 거라 생각했거든.”

사실 크리스티나가 물의 일족에게 향하도록 설계한 이유는 오랫동안 저주에 고통 받은 아멜리아 일가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해두는 편이 안전성을 확보해 뒀었다는 뒷받침이 될 수 있었다.

‘뭐, 최악의 경우 그런 식으로 안전하게 퇴로를 확보하려던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팔짱을 끼고 영 못마땅한 눈을 했다.

“한데, 그 열쇠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성체인 드래곤에게 순식간에 당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당연히 사전에 미리 여러 번 검증해봤지.”

룬의 대답에 페르디키온은 못마땅한 눈을 했다.

무어라 덧붙이려는 걸 보고 룬이 먼저 선수를 쳐 말했다.

“애초에 위험하다 싶었으면 함부로 나서지도 않았을 거야. <폐광 던전> 때도, 내가 무모하게 행동한 적 없잖아?”

물론 했다.

마지막에 나온 히든 보스를 혼자서 잡았지만, 페르디키온은 그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 목적은 흑미의 사냥 본능을 제대로 활용하게 해주는 것.

즉, 애초에 룬은 흑미가 전투 경험을 쌓도록 멀찍이서 구경이나 하면 되는 판이었다.

‘따지고 보면 진짜로 무모한 건 없었지. 보스 빼고는 나오는 놈들이 너무 자잘하다보니 힘을 드러낼 일도 없었고.’

그런 룬의 속내를 모르는 페르디키온은 마지못해 납득했다.

“적어도 안전에 대해 고민했다는 사실까진 인정하마. 그러나 성체인 블루 드래곤을 둘이나 정면으로 상대한 일이 무모했다는 건 틀림없어. 다신 그런 생각은 하지 마라.”

“응, 그럴게.”

흑미를 비롯한 다른 일행이 있었다고 해봤자 역시 성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며 잔소리 해댄 페르디키온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마침 연락수단도 생겼겠다, 앞으로 어디 갈 때는 나한테 연락 해둬라.”

“알았어.”

페르디키온이 동행해 준다면 크리스티나에게 이유를 대기도 쉬웠다.

무엇보다 이렇게까지 걱정해 주는 녀석을 보니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조만간 같이 가고 싶은 장소가 있었으므로, 룬은 속으로 잘됐다고 여겼다.

‘안 그래도 조만간 <저주받은 던전>에 가 볼까 했는데.’

물의 영역에 아직 남아있는 <저주받은 던전>.

룬이 블루 드래곤 레어에 가자는 말을 어떻게 꺼낼지 고민하는데, 페르디키온이 먼저 슬그머니 물어왔다.

“크리스티나 님께서 오시면 어쩔 셈이냐? 분명 쉬이 넘어가시진 않을 거다.”

“대비는 해뒀는데…… 각오해야겠지.”

‘아멜리아가 부탁한대로 잘 설명해주어도 쉽게 넘어갈 리는 없겠지.’

설명을 들은 후에도 뒷수습을 하고 오게 될 터.

아직 약간의 시간은 있었다.

고민에 빠진 룬을 바라보던 페르디키온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나 님이 오실 때 까진 내가 같이 있어주마.”

“……그쪽 일 수습하고 오실 거 생각하면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데.”

“그럼 더더욱 혼자 두면 안 되겠군.”

단호한 대답은 더 이상의 반론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너무 걱정은 마라. 넌 아직 어리다. 아마 그리 심하게 혼내시진 않을 거야.”

끄덕.

‘글쎄다.’

겉으로는 수긍했으나, 룬은 속으로 혹독한 결과를 예감했다.

하지만 안심시키려는 페르디키온의 진심은 확실히 느껴졌다.

룬은 새삼 어린 녀석이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으며 무척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의지할 어른도 없고, 속을 터놓을 곳도 없던 녀석이었으니.’

아직은 서툴지만, 진심으로 마음 써 주려는 페르디키온에게 나름대로 ‘잘하고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거면 되려나.’

뭔가를 떠올린 룬이 근처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형, 잠깐만 앉아봐.”

타이밍이 좋았군

“왜?”

페르디키온은 갑작스런 요청에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룬은 어린 강아지 쓰다듬듯 페르디키온의 머리위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뭐하는 거냐?”

“그냥. 해주고 싶어서.”

페르디키온은 약간 놀란 눈을 했지만, 이내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다스렸다.

“크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런 건 어린 네가 형인 나한테 하는 게 아니다.”

“그래?”

‘그런 것치곤 얌전한데. 진짜 싫었다면 내 손부터 쳐냈겠지.’

룬은 굳이 그 생각을 말하지 않고 손을 떼었다.

쓰다듬을 받으며 눈을 데구루루 굴리던 페르디키온이 어색하게 말했다.

“이건 크리스티나 님에게 배운 거냐.”

“응. 자주 해주시거든.”

요람에 있었을 적, 어린 해츨링인 룬을 무척 아낀다는 듯 쓰다듬어주던 행동에서 힌트를 얻었다.

룬은 문득 그가 처음 크리스티나와 지내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게 그 행동이 옮은 걸지도 모르겠군. 매번 귀엽다, 귀엽다 하면서 뭐만 하면 머리를 쓰다듬어줬지.’

그러다 문득 한 가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룬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보다가,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거, 생각보다 잘 넘어갈 수 있을지도?’

룬이 뇌리를 스친 묘안에 대해 곱씹는 동안, 페르디키온은 고민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룬. 내가 무섭지는 않았냐?”

“……?”

잠시 생각해 본 룬은 페르디키온이 이러한 질문을 한 이유를 눈치챘다.

페르디키온은 과거 폭정으로 드워프들을 다스려 레어 주민들과 갈등이 깊었던 녀석이었다.

그때처럼 혹시라도 룬에게 화를 냈던 일이 두려움과 혐오를 불러일으킬까, 마음에 걸린 게 틀림없었다.

‘어째 녀석답지 않군.’

룬은 이내 그 생각을 부정했다.

‘페르디키온은 측근을 아끼는 녀석이지만 고작 드워프들에게 신임 받지 못한다고 눈치를 보진 않았단 말이지.’

이유 모를 질문을 생각하며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자 페르디키온이 은근슬쩍 말을 덧붙였다.

“난 형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충고였다고 생각하지만, 어린 네가 그걸 불쾌하게 여기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기분이 나쁘다면 지금 말해라.”

룬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늘 군림자의 모습을 보여야 했던 페르디키온,

솔직하게 자신을 보여주는 일이 아직 어색하고, 서툰 게 당연했다.

기술의 숙련도와 다르게 제 감정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잘 모를 만도 했다.

‘어리기도 하고, 요령의 문제이니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겠지.’

룬은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페르디키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이 화를 낸 일이 기분 좋을 건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불쾌하지도 않았어.”

“정말이냐?”

“응. 형이 보기에 정말 위험해보였고, 걱정되어서 그런 거잖아. 순간적으로 화가 날 만도 했고.”

안타깝게도 살면서 늘 좋은 감정만 품고 살 수 없는 법.

때론 껄끄럽고 느끼고 싶지 않은 기분을 마주하게 된다.

“원하는 걸 이룰 수단으로 분노를 사용하거나, 타인을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겁을 주는 종류라면 나쁘다고 여겼겠지만, 그냥 솔직하게 화가 나는 감정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렇군.”

그 뒤로 페르디키온은 아무 말 없이 한참 생각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다.”

어딘지 개운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대견하네.’

룬은 페르디키온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이제까지 옳다고 믿어왔던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

그러나, 미래의 불의 일족 장로가 될 녀석은 잘도 제 속을 꺼내 보여주고 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젠 폭력을 통해 지배하려 했던 모습이 어떻게 내게 비칠지 고민도 하고 말이지. 좋은 징조야. 장로후계라 해도 아직 덜 여문 꼬마인데 말이지.’

물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로 페르디키온이 화를 낸 이유는 룬이 판단하기에 정당했다.

인간으로 치면 서당에도 못 들어갈 어린 해츨링이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장소에 무서움도 없이 들락거리는 거나 다름없었기에.

그때였다.

“그러고 보면, 넌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군.”

“나?”

룬이 눈을 둥글게 뜨고 의문 어린 시선을 두자, 페르디키온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네가 아직 어리다는 걸 생각하면 특이한 일이다. 드워프들은 내게 좋지 않은 시선을 던지곤 했다. 비록 내 앞에서 허리는 숙여보였지만, 그들의 공포나 경멸은 감춘다고 감춰지는 게 아니었어. 그런데.”

페르디키온은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네게서는 그런 부정적인 느낌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어.”

그랬다.

물론 그 이유는 룬이 평범한 해츨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흔한 투정이나 화 한번 낸 적이 없었지. 너무 똑똑하고 착했다.”

“……?”

‘그렇게 해석된다고?’

진심이 담겨있는 말이었다.

더욱 할 말을 잃어버린 룬은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룬이 화를 낸 적이 없는 건 그의 정체가 천년 가까이 산 이무기였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큰 어른이 아이에게 진심으로 분노하지 않듯, 페르디키온에게 화가 날 일이 딱히 없었다.

‘사실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룬을 지그시 보던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구겼다.

“룬, 넌 너무 순해서 탈이다.”

“내가 순하다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의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화룡족 꼬마는 붉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그 점이 영 걱정스럽군. 혹시라도 네 그런 성질을 이용하려드는 이들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이놈이 날 순둥이 취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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