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242)

어이가 없어진 룬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급기야 페르디키온은 낮게 시선을 깔며 뭔가 중얼거렸는데, 읽어낸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설마 그 물의 일족 놈들이 내 아우의 순수함을 이용해 먹은 건…….

룬은 자신이 그의 입모양을 잘못 봤을 거라 믿고 싶었다.

왠지 페르디키온의 눈빛에 불꽃이 튄다고 느꼈을 때, 룬은 그를 말려야겠단 생각부터 들었다.

“이용하다니. 그런 자들 없어. 아멜리아도 친해져서 도운거야.”

“그게 그 블루 드래곤 족 경솔한 녀석의 이름이냐.”

페르디키온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지는 것이 역효과를 가져온 게 틀림없었다.

“고작 얼마나 봤다고 친하단 거지? 설마…… 나보다 친하다는 말이냐?”

‘일났네.’

여기서 대답 한번 잘못했다간 또 다시 분노가 타오를 기세였다.

“후아암. 어? 페르디키온 님이다!”

“삐!”

때마침, 흑미가 하품을 하며 이동마법진을 넘어오는 바람에 이야기가 적절하게 끊겼다.

‘마침 타이밍이 좋았군.’

룬은 태연히 흑미에게 인사했다.

“꽤나 피곤해 보이더니, 다 쉬었냐?”

“네에! 냐하암…….”

대답과 다르게 하품이 이어졌다.

백야도 눈을 반쯤 감은 채 부리를 우물거렸다.

한 손으로 크게 벌어진 입을 가렸던 흑미가 눈을 꾹 감더니 반짝 떴다.

그리고는 두 팔을 기지개켜듯이 번쩍 치켜들었다.

“웅! 진짜 깼다!”

“뺘아!”

흑미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백야가 흑미를 따라하듯 두 날개를 펼쳤다.

모습을 지켜보던 룬에게 좀 전보다 훨씬 명랑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룬 님이랑 페르디키온 님은 뭐하고 있었어요?”

“대화 중이야. 내 걱정이 되어서 들르셨대.”

“걱정이요?”

순진무구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한 흑미가 페르디키온을 보며 검지를 입술 밑에 대었다.

“걱정할 거 없었는데! 바닷속 진짜 재밌었거든요!”

“삐. 삐.”

백야가 흑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울자, 페르디키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같이 놀았으면 좋았을 텐데. 혼자만 두고 가서 미안해요, 페르디키온 님!”

“삐!”

“…….”

악의 없는 말이었지만 타격감이 제법이었다.

룬은 페르디키온의 눈초리가 싸해지는 걸 느끼고, 얼른 끼어들어 말을 돌렸다.

“저녁에 뭐 먹고 싶은지나 말해봐. 만들어볼 테니.”

“와아!”

크리스티나와 함께 만든 며칠간 먹을 음식은 모두 블루드래곤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그들에게서 어둠의 힘과 저주를 떼어 내 흡수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남아있는 먹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마력 음식은 기력의 보충에 무척 탁월했으므로, 룬은 힘을 회수하는 데에 공헌한 이들에게 나름대로 치하해 주고 싶었다.

“형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크리스티나에게 배운 요리 대부분은 할 줄 알아.”

무해하게 웃는 룬을 지그시 노려본 영 페르디키온은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하지만 흑미와 백야까지 있는 자리여서인지 대답해 주었다.

“정 그러면 고기가 있으면 좋겠군. 다들 피곤해보이기도 하니. 디저트는 레몬 케이크나 애플파이 정도면 충분하다.”

“흑미는 딸기 초코 파르페랑 치즈케이크가 먹고 싶어요! 파르페에는 막대 초코 과자 올라간 걸로요. 그리고 치즈 크레커랑……아, 고기파이도 맛있을 것 같아요!”

“삐!”

룬은 그들의 다양한 주문을 들으며 속으로 목록을 다시 체크했다.

‘뭐, 메뉴를 따로 고민할 필요는 없으니 그건 다행인가. 피로회복에 효과 있는 재료들은 꽤 많이 남아있고.’

룬은 냉장고의 상태를 떠올리며 몇 가지 음식들을 후보에 올렸다.

문득 룬의 시선이 듀라한 쪽으로 향했다.

안타깝지만 크리스티나와의 약속이 있으니, 그는 이곳에서 자리를 지켜야했다.

‘저 녀석에게 이 장소가 꽤 편해 보이기는 한다만, 아무것도 없이 그냥 넘어가려니 좀 걸리는군.’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채 녹빛의 눈만 음울하게 깜빡이는 듀라한.

잠시 고민하던 룬은 페르디키온을 불렀다.

“형. 식사 후에 시간 좀 내줄래? 흑미에게 했던 것처럼 듀라한의 상태를 봐줬으면 좋겠어.”

“알겠다. 네 권속이기도 하니.”

이야기를 듣던 듀라한은 페르디키온과 시선이 부딪히자 은은한 녹빛을 빛냈다.

페르디키온 역시 호승심이라도 느낀 건지 둘은 몇 초간 서로를 응시하며 따가운 시선을 교환했다.

‘좋아하고 있군.’

듀라한의 상태를 체크한 룬이 그들이 말한 음식목록을 읊어주었을 때였다.

“룬, 너도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니냐.”

“괜찮아. 생각보다 피곤하지 않더라고.”

어둠의 힘을 온전히 지니게 된 덕분인지, 생각보다 피로가 적었다.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고개를 저어 보이더니 턱짓을 했다.

“그만 두라고 해도 들을 기세는 아니니…… 안내해라. 네가 요리할 장소로.”

“주방에 오게?”

“그래. 한 번쯤 그 마력요리라는 게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고 싶기도 했던 차다. 설마 안 된다고 할 셈이냐?”

“그건 아니지만.”

‘요리하면서 <소생> 언령을 수련하지 못하는 게 좀 아쉬워서 그렇지.’

룬은 고개를 흔들어 승낙의 뜻을 표했다.

***

룬은 자신의 방에서 수면 중이던 그의 아바타를 아공간 주머니로 다시 회수했다.

다시 한 번 페르디키온의 시선에 등이 따가웠으나, 룬은 모른 척 부엌으로 이동했다.

“여기야.”

“흠.”

재료를 놓는 선반에 크리스티나가 연구하던 레시피 종이가 추가되어 있었다.

한쪽에 따로 방을 튼 작업실에는 깔끔한 새로 제본된 책들이 장을 채우고 있었다.

그걸로 보아, 단순한 연구로 끝나지 않고 기록으로 남길 만한 결과물을 상당수 일궈낸 것이 틀림없었다.

잘 키웠네.

‘조만간에 레시피 전집이라도 만들 기세군.’

페르디키온은 신기한지 주변을 돌아보며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고작 조리실이라기보다…… 이 마나의 충만감은, 마치 마법 연구실 같군.”

도마를 깔고 마리네이드용 기름병과 소금을 집어든 룬이 페르디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아. 요리를 만든 후에 마력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여기 있는 모든 재료들이 마법시료라 보면 돼.”

슈칵!

룬이 드래곤 본으로 만든 칼로 고기를 썰어냈다.

“혹시 연금술에 대해 알아, 형?”

“이야기 정도는 들어봤다. 돌을 금으로 바꾼다 하고. 현자의 돌, 생명의 엘릭서 따위를 만든다지.”

“엄밀히 따지면 다르기는 하지만…… 비슷해.”

결국 시료들의 배합에 따라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연금술과 요리는 닮은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페르디키온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가 엄지를 입가에 대었다.

“그렇군. 듣고 보니…….”

속말로 중얼거린 그가 흥미로운 시선을 던지며 룬이 썰어둔 고기와 반짝이는 소금 따위를 바라보았다.

“나도 한번 해보마. 재료를 나눠 다오.”

“형님이?”

‘하긴, 가장 순수한 불의 근원을 다루는 녀석이니.’

룬은 은근한 기대감을 가지고 냉장고에서 손질을 마친 미노타우로스의 고깃덩어리를 꺼내왔다.

조리실 화덕에서 화룡의 불이 거세게 타올랐다.

그리고 흥미로운 눈으로 보던 룬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바뀌었다.

“형, 불!”

설마 불의 지배자라 불리는 일족이 조리에 적합한 화력을 맞추지 못하는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기에, 룬의 표정은 날것의 당혹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를 본 페르디키온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불을 조절했다.

“크흠! 실수가 있었던 것 같군. 화력을 좀 줄이마.”

그런데 이번엔 불길이 푸른빛으로 변해가는 걸 보며, 룬은 어이가 없어졌다.

“불의 세기만 줄었고 온도는 더 뜨거워졌잖아.”

“해본 적 없어서 그런 거다. 하다보면 나아져.”

‘무슨 불의 일족이면서 불 조절이 안 돼. 네가 무슨 양반댁 도련님이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불을 더 강하고 뜨겁게 타오르도록 할 순 있지만, 재료가 적당히 익는 정도로 조절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

초가집을 통째로 태우는 게 훨씬 쉽고, 짐승 털 하나만 골라 모양이 유지되게 태워보라면 곤혹스러워 하는 모양새였다.

그렇다고 익숙해 질 때 까지 기다렸다간, 잘못하면 요리하려다가 주방 태워먹을 기세였다.

‘이대로라면 하루 종일 주방에 붙어있어도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드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고 당장 손 떼라 할 수도 없다면…….’

고민하던 룬은 빠르게 양파와 당근 따위를 썰어내고, 고기를 토막 내었다.

“형! 지금부터 아주 중요하게 맡길 일이 있어.”

“무슨 일이냐?”

룬은 썰어놓은 재료를 가리키며, 찬장에서 작은 접시 십수 개를 꺼내었다.

“정확한 배합을 위해서는 들어가는 재료의 양과 비율도 아주 중요해. 형님이 저울에 이걸 재서, 8 : 5 : 2 의 비율로 작은 접시에 따로 구분해 줘.”

“……이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란 말이냐?”

룬은 천연덕스럽게 미소 지었다.

“물론이지! 중요한 거니까 실수하지 않도록 3번씩 확인해 줘. 부탁할게.”

‘어차피 진짜 수련하러 온 것도 아니니, 당장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주는 게 낫지. 아까운 재료를 날리는 건 그렇다 쳐도, 불 조절이 안 되는 건 너무 치명적이잖아.’

다행히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겠다며 야채와 고기가 썰려 올라가있는 도마 쪽으로 향했다.

‘좋아. 이 틈에 최대한 빨리 요리를 끝낸다.’

페르디키온이 그가 준 과제를 끝내고 도우러 오기 전까지.

동체시력과 손 감각이 좋은 페르디키온보다 먼저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어야 했다.

룬의 열의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타다다닥!

빠른 칼질과 능숙한 손놀림으로 룬이 순식간에 요리를 만들어냈다.

페르디키온은 그런 룬을 보며 감탄했다.

“룬, 그동안 수련을 열심히 했군.”

“그렇지 뭐.”

요리에 집중하느라 대충 대답했지만, 페르디키온은 아우를 기특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흥이 생긴 눈으로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나도 분발하겠다. 감자 조각이 조금 부족하니 더 썰어 넣도록 하지.”

‘벌써?’

식칼을 검지에 걸고 휘리릭 돌린 페르디키온.

손에 칼이 착 붙는 소리가 남달랐다.

힐끔 손에 잡힌 식칼을 본 화룡족의 꼬마는 제법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꽤 좋은 식칼이군.”

촤라라락. 착착착!

순식간에 감자껍질이 회오리 모양으로 벗겨지고 잘 정련된 검로가 감자의 몸통을 조각냈다.

요리에 쓰기 아까울 정도로 뛰어난 검술이 감자와 당근, 양파, 고기에 거침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페르디키온은 조각난 재료들을 늘어놓은 채 흐뭇하게 룬을 돌아보았다.

“어떠냐.”

“어, 잘했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 정도쯤 쉬운 일이다. 다음엔 뭘 하면 되겠나.”

“좀 어려울지도 모르는데, 이거 한 번 해볼래?”

칭찬을 듣고 기분 좋아져 의기양양한 얼굴인 페르디키온에게 룬은 다른 기술을 알려주었다.

식칼을 다시 잡은 페르디키온은 당근에 꽃 모양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조각은 다소 어려운지 꽤나 집중하게 된 덕분에 룬은 편안한 기분으로 요리를 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유난히 화려한 식탁을 본 흑미가 감탄을 터트렸다.

“와아아! 오늘 우리 잔치해요? 굉장해요!”

호화로운 요리가 식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버터가 아낌없이 들어가 진득한 감촉을 품은 메시드 포테이토.

꾀꼬리 버섯으로 장식한 소고기 스테이크.

거기에, 메인메뉴로 돼지고기 요리인 포게르타까지.

“당근 장미꽃이다! 이건 토끼!”

“……그건 토끼가 아니라, 개다.”

“앗 진짜요? 으항항! 너무 귀여워요!”

페르디키온의 대꾸에 흑미의 눈에 즐거움이 가득 어렸다.

심지어 빛을 반짝이며 다가온 라이와 백야까지도 당근과 사과 조각들을 보며 관심을 보였다.

[ㅇ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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