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242)

“삐?”

냉큼 식탁 앞에 앉은 흑미가 백야를 옆 자리에 앉히고 연신 침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고 싶어 하는 흑미를 본 룬은 간단한 인사로 식사의 시작을 알렸다.

“다들 물의 일족 일로 수고 많았어. 마음껏 먹어.”

“헤헷! 룬 님도 맛있게 먹어요! 잘 먹겠습니다아!”

흑미는 겉면이 바싹 익은 고기를 썰어 뜨거운 속을 입으로 후후 불더니 입 안에 가득 밀어 넣었다.

“흐와앙! 껍질 바삭바삭하고 속은 너무너무 촉촉해!”

어린 소녀는 까만 여우귀를 바짝 세우고 눈에 황홀함을 담은 채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신이 난 흑미를 보며 옆 자리에 앉은 백야가 라이와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미는 따로 레몬제스트를 넣어 만든 파슬리 소스까지 야무지게 쿡쿡 찍어먹으며, 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그런 흑미에게 룬이 말을 얹었다.

“형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특히 그 감자 새와 당근 여우에 신경 많이 쓰셨어.”

“어? 그럼 이거 흑미랑 백야 아니에요? 히힛. 고맙습니다아!”

“큼, 뭐 그 정도 가지고.”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목소리의 톤이 꽤 부드러웠다.

행복하게 웃는 얼굴을 한 흑미가 보내오는 감사인사를 달가워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꽤 호화로운 식사가 되어버렸는걸.’

왕성의 연회를 연상시키는 차림이었다.

코스로 이어져 나올 갑각류 감칠맛이 느껴지는 해산물 국물요리와 식용꽃이 올라간 초콜릿 딸기 케이크에 우유 크림과 골드 칩이 올라간 디저트 레몬 무스케이크까지.

페르디키온도 점잖게 레몬 무스케이크를 조각내 꾸준히 입 안에 밀어 넣었고, 백야는 하얀 식용꽃이 신기했는지 꽃을 부리로 건드려보다 쪼아 먹었다.

특히 제비꽃 얼음 조각들이 살짝 얹어진 딸기 초코 파르페가 나왔을 때 흑미는 감탄에 바로 먹지 못하고 한동안 구경만 했다.

“와! 이런 건 처음 봤어요. 너무 이뻐요!”

흑미는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고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면 다들 충분히 상이 되었겠지.’

룬은 뭉게구름처럼 부드러운 판나코타를 입 안에 넣어보며 만족스러워 했다.

여간 마음에 든 게 아니었는지 페르디키온 몫까지 생각해 꽤나 많은 음식을 준비했음에도, 순식간에 동이 났다.

마력과 기력의 회복, 피로를 치유하는 음식,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음식들은 물의 일족을 상대하고 온 이들의 지친 몸에 한 점 남김없이 흡수되었다.

“후와. 배부르고 나른해요…….”

노곤한 눈으로 귀 끝을 쫑긋거리는 흑미가 꾸벅 거리기 시작한 백야를 끌어안았다.

“먼저 가서 쉬어. 난 여기 정리 좀 하고 갈 생각이니까.”

그러자 반쯤 눈이 감겨있던 흑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들었다.

“룬 님! 제가 쓰레기 치우는 거 도와드릴까요?”

“네가?”

고개를 끄덕인 흑미가 브로치를 들었다.

“얘들아.”

쇽!

쇽!

쇽!

쇽!

쇽!

흑미의 붉은 브로치에서 붉은 불의 도마뱀 모습의 ‘살라만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이에 조금 큰 건지 어린 불도마뱀이었던 녀석들은 좀 더 탄탄한 붉은 피부와 조금 더 커진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꼬리를 멋들어지게 세우고 나란히 줄 선 그들의 모습은 잘 훈련된 군사들처럼 보였다.

“이 음식 찌꺼기들, 모두 삼켜버려!”

화륵!

불길이 피어오르며 불도마뱀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다섯 마리의 불의 도마뱀들이 접시 위로 뛰어오르더니 널린 기름기 묻은 뼈와 자잘한 빵 찌꺼기들을 삼키기 시작했다.

“룬 님, 얘들이 이거 굉장하대요.”

뿌듯한 모습으로 눈을 빛내는 흑미에게 룬은 상황을 이해하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마력 요리의 일부니 정령에겐 양분이 되겠네.”

불도마뱀들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본 페르디키온도 말을 덧붙였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되는군. 심지어 이렇게나 빠른 성장을 보이는 정령이라니.”

감탄하는 페르디키온의 말에 룬이 되물었다.

“원래 성장 속도는 훨씬 더디다는 소리야?”

“물론이다. 드래곤이나 엘프들은 정령친화력이 강하게 태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지만, 보통은 이렇게 빠른 성장을 이끌어 낼 수는 없어.”

“……그렇단 말이지.”

룬이 가볍게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자연스럽게 페르디키온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흑미에게 정령의 성장을 이끌 수 있는 자. 정령사의 자질이 있는 듯하군. 어쩌면 계약조차 하지 않은 불의 정령들에게 사랑받는 자가 될지도 모른다.”

‘심해에서 본 그 돌고래처럼 키울 수도 있다는 말인가?’

룬은 돌고래 정령을 떠올리고는 슬쩍 미소 지었다.

“그렇게 되면 좋겠네.”

“너무 기대하지는 마라. 성장은 한계를 뛰어넘는 일. 쉽게 될 일은 아니니.”

둘이 대화하는 사이, 접시의 찌꺼기를 순식간에 태우고 삼킨 불의 정령들은 흑미의 뺨과 어깨위에 올라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간지러워, 얘들아! 어때요, 룬 님!”

“잘 키웠네. 어떻게 키웠기에 이렇게 잘 훈련된 거야?”

룬의 물음에 흑미가 뭔가 떠올리는 듯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우움, 흑미는 좋아하는 게 있으면 꼭 하고 싶어져요! 왠지 우울할 땐 맛있는 걸 먹거나 예쁜 꽃을 보면 행복해지구요. 그래서 얘들한테 그런 게 있는지 찾아봤어요!”

“……?”

행복해지는 일로 훈련을 시켰다는 말이었는데, 룬으로서는 바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 녀석에겐……없어

“그랬더니 얘들이 룬 님이 주신 과자랑 간식을 좋아했어요! 삼식이는 너무 좋아서 팔짝팔짝 뛰기도 했구요!”

인내심을 가지고 쭉 들어본 그는 어느 정도 과정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니까, 불도마뱀들과 함께 다니던 도중 크리스티나 특제 쿠키에 관심을 가지는 걸 보고 나눠주기 시작한 때부터 서로 친해진 거군.’

쿠키를 삼킨 녀석들은 유난히 불길도 잘 타고 신이 나 보였고, 그 후로 흑미는 자신의 몫으로 나온 간식을 다섯 마리의 정령들에게 나눠주며 훈련을 겸했다는 것이었다.

‘의도하진 않은 모양이지만,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했어.’

칭찬을 바라는 투명한 분홍빛 눈이 룬을 빤히 바라봐왔다.

“흑미 잘한 거 맞죠?”

“어. 잘했어. 훌륭해.”

“신난다!”

방싯 웃은 흑미가 크래커를 쪼아 먹던 옆 자리의 백야를 끌어안고 만세 했다.

한편, 룬은 정령들을 보며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마력 음식이 정령들의 성장을 이끈다, 이 말이지.’

룬은 자신의 수하인 듀라한 역시 ‘정령기사’라는 점을 떠올렸다.

강력한 어둠을 지닌 그의 권속.

문제는 흑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듀라한 역시 마력음식을 먹을 수만 있다면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듀라한이 약한 편은 아니었으나, 빠른 컨디션 회복과 성장을 도모할 수 없다는 점은 아쉬웠다.

당장 흑미가 키우는 불의 정령들만 해도 음식을 지속적으로 섭취하면 진화가 가능할 정도인데, 듀라한이 진화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강해질까.

문제는 하나였다.

‘그 녀석에겐…… 입이 없어. 음식을 만들어도 먹일 수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웠다.

생각에 빠진 룬을 보던 페르디키온이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냐?”

“내 기사 듀라한 알지? 그 녀석에게도 음식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중이었어.”

“그런가. 수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은 알겠다만…….”

페르디키온은 차마 말을 맺지 못한 채 미간을 구겼다.

눈치를 보아하니 듀라한의 생김새를 떠올린 게 틀림없었다.

‘하긴, 저 녀석이라고 뾰족한 수가 없겠지.’

갑옷과 투구 너머 음울한 녹빛의 눈과 통각을 잘 느끼지 못하는 몸.

게다가 듀라한의 정보에 적힌 성향이 ‘음울한’이기까지.

그렇다고 이런 이점을 포기하기엔 아까웠다.

계속 고민하는 룬에게 흑미가 아쉬운 듯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올렸다.

“히잉. 라한이도 이 딸기케이크가 맛있다는 걸 알게 되면 좋을 텐데.”

‘!’

입에 포크를 문 흑미의 중얼거림을 듣고 룬은 눈을 깜빡였다.

‘그래. 어쨌든 <알 수 있게>만 하면 된다는 거니까.’

뭔가를 눈치 챈 페르디키온이 룬의 허리를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설마 방법이 떠오른 거냐?”

룬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응. 시도해봐야겠지만.”

“……! 대단하군. 대체 어떤 방법이냐.”

조급함과 궁금증이 섞인 재촉에도 룬은 슬쩍 한 발을 빼내었다.

“일단 해보고 말해줄게.”

페르디키온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더 재촉하는 대신 꾹 참는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럼, 시도할 때 나도 불러라. 그건 가능하겠지?”

거절하기에는 워낙 강경해보였기에, 룬은 잠시 고민했다.

‘하긴 페르디키온에게도 통하는지 궁금하군.’

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의 뜻을 보였다.

그제야 페르디키온의 미간이 펴졌다.

“좋아! 식사 끝나고 바로 가면 되겠나?”

성급한 성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에 룬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늦은 시간이기도 하고, 내일 시도할 생각이야.”

“……그렇군. 생각해보니 너 역시 피로가 쌓였을 텐데 미처 배려하지 못했군.”

적당한 휴식도 때때로 필요한 법.

사실 룬 역시 떠오른 방법을 바로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준비가 필요했다.

‘너무 쉼 없이 달리면 수면기가 빨리 찾아올 수도 있고 말이지.’

수면기는 드래곤 종족의 특성이었다.

타고난 능력은 강하지만 힘이 커질수록 그에 맞게 성장해야 하는 몸.

피로가 클수록 수면기가 빨리 찾아오기에, 적당한 조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생각해보면 10년 전에도 갑자기 수면기가 찾아왔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크리스티나의 전승마법을 받아들여 방대한 지식을 얻고, 페르디키온의 노래를 통해 언령 마법을 터득했다.

숲의 주인의 기운이 깃든 힘과 만드라고라까지 흡수하고 마계장미를 키우며 권속화 하는 능력까지.

너무 단기간에 힘을 얻고 사용하게 되면 몸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성장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지만, 지금은 수면기에 들 때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내 몸에는 어둠 일족 전체의 힘이 깃든 상태야. 자칫하면 곧 2차 수면기에 들게 된다.’

이번에 얻은 어둠이 그의 몸에서 제대로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들여야 했다.

듀라한에게 시도할 새 방법이 성공하면 룬은 그걸 자신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을 터.

‘이 방법이 듀라한에게 통한다면 나 역시 수면기를 조절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단 말이지.’

룬은 생각을 정리하며 식사를 마치고 남은 그릇들을 주방으로 이동시켰다.

그는 재차 자신을 빼고 시도하지 말라는 페르디키온의 당부를 들으며 제작에 필요한 재료와 방식에 대해 구상하고 잠들었다.

다음 날.

룬은 약속대로 페르디키온과 함께 검은 방으로 향하며 새삼 당부했다.

“주변에 저주받거나 깊은 어둠을 품은 아티팩트가 있으니까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

저주 받은 물건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봉인되어 있음에도 불길함을 느끼게 했다.

“너는 괜찮은 거냐? 타고난 속성이 있다 해도 아직 어리면서.”

“물론이지. 난 여기 있는 것들로 제작도 하는걸.”

“제작?”

“응. 제드의 암시장에서 산 제조도구가 있어.”

약간 앞장서서 안내 중인 터라, 페르디키온은 룬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물었다.

“그럼 그 가짜인형도 여기에서 제작된 거군.”

“맞아.”

‘핵심 재료는 다른 장소에서 수급해 왔지만.’

대화의 흐름으로 보아 페르디키온은 검은 방에서 나온 재료들로 아바타가 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고개까지 끄덕이며 납득했다는 얼굴을 한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과연. 그런 거였나.”

룬은 약간의 오해를 하게 두기로 했다.

아바타를 움직이기 위한 혼으로 사용된 건 광기에 물든 필드의 보스급 몬스터인 ‘레비아탄’.

이 사실을 알면 또 한 번 잔소리가 쏟아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물의 일족 영역에 대한 위험성만 더 일깨울 뿐이니 덮자. 거짓말한 것도 아니고 보나마나 혼자 위험한 장소에 갔다고 또 한 소리 할 텐데.’

안 그래도 물의 일족이 룬의 순진한 성격을 이용해 이득을 취했을 거라 오해 중인 페르디키온.

조만간 룬은 오랜 어둠에 잠식되어 광기의 저주에 물든 <저주받은 던전>에 갈 계획이니, 굳이 안 좋은 생각을 떠올릴 빌미를 줄 필요가 없었다.

‘페르디키온이 반대의견을 크리스티나에게 이야기하게 둘 수는 없지.’

자칫 하다간 광기에 물든 곳에는 얼씬도 못하도록 설득하려 들 수도 있었다.

<폐광 던전>때와 달리, <저주받은 던전>은 물의 일족의 보물을 얻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가서 얻어낼 게 많은 이 상황에서 방해받아 실패할 가능성을 굳이 심어둘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도록, 화제를 돌리기 위해 룬은 검은 방 한가운데에서 ‘저주도구 만들기 세트’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미리 봐 둔 저주 물품 중 그가 필요로 했던 아티팩트를 찾아가지고 돌아왔다.

“이런 게 저주받은 물품이라니.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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