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은 그 말에 옅게 미소 지었다.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안 돼, 형. 이 물건만큼 저주에 어울리는 것도 없는걸.”
“글쎄……. 잘 모르겠군. 그렇게 위험한 물건인가.”
의아함이 섞인 페르디키온의 대답에 룬은 손에 들린 보석함을 내려다보았다.
<행복한 향기 상자>
- 대상의 강력한 거부 시 정신력에 따라 효력이 약해지거나 마법이 깨진다.
- 향에 취해 수십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 골드 드래곤 장로에 의해 회수되어 가벼운 봉인이 걸려있다.
“간단히 말해서…… 매혹적인 향기를 만들어내는 마법 조향상자야.”
“향기라면 향수 따위를 말하는 건가. 고작 이런 게 저주물품이라고?”
아티팩트에 대한 설명을 들었어도 페르디키온은 위험 따위는 영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룬은 이 상자가 품은 교묘한 위험성에 혀를 찼다.
‘제작자가 누군지 궁금할 정도야. 절묘하게 잘 만들었어.’
룬이 고른 건 어둠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백색 진주로 장식 된 함.
안에 꽃이나 향가지 따위를 넣으면 향기를 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저주물품들 사이에 있기에는 경계심을 가져야 할 점이라곤 없어보였다.
아름답고 화사하면서도 기품 있는 디자인으로, 흉흉한 무기와 유품들로 가득한 이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김이었다.
룬은 물건에 대한 이력을 간략하게 덧붙여주었다.
“넣은 물건에 따라 향기를 만들어내는 상자야. 정신력이 받쳐준다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라, 조심한다면 위험하지는 않지만.”
“그 말만 들어서는 적당히 즐기게 만들어진 장난감 같군.”
“맞아. 위험하지 않고, 언제든 쉽게 사용하고 그만 둘 수 있다고 여기게끔 잘 만들어졌어.”
“그것이 다는 아니다……라는 말인가? 뭐, 맹독을 지닌 꽃이라도 넣어 사용한 모양이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차라리 그런 이유였으면 위험한 물건일지언정 ‘저주받은 물건’이라 불리지는 않았을 거야.”
“?”
묘한 위화감을 느낀 페르디키온의 미간이 의문으로 찌푸려졌다.
룬은 그에 대한 답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다루기 쉽고 즉각적인 쾌락을 주는 종류가 가지는 공통점이 있지. 바로 <중독>이야.”
상자의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는 미리 해두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에 룬은 말을 이었다.
“예전에, 이 상자에 마약성분이 들어간 식물을 넣어두고 사용한 탓에 습관적인 탐닉에 빠져 구제조차 불가능해진 자들이 있었대.”
마약이 주는 환각과 강한 진통작용.
상자를 사용하지 않게 되면 강한 금단증세가 발생하여 미쳐버리게 되므로, 상자를 둘러싼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도적 길드와 암거래상인 사이의 유희였다가, 범죄에 이용되어 마을 단위의 마약중독 증세가 생겨 발견되었지.”
“으음. 그런 일이.”
페르디키온은 좀 전과 달리 어딘지 꺼림칙해진 눈으로 상자를 바라보았다.
“일이 커지니 상자의 존재가 알려지고,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피가 흘렀어. 결국 위험한 물건이라 여겨 국가차원에서 회수했지만 그나마도 귀족들이 마약파티를 일삼다가 나라를 말아먹었다더라고.”
크리스티나의 전승 지식을 통해 알고 있는 예시 중 하나를 들려주며 룬은 상자의 윗부분을 검지로 톡톡 건드렸다.
“경계심 없이 함부로 만졌다간, 이 상자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되는 거지.”
‘그것이 드래곤이라도 말이지.’
효과는 있었나?
자극과 유희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상자를 들어 보인 룬은 이내 뚜껑 위를 손으로 눌렀다.
“그럼 넌…… 그런 위험한 물건을 네 수하에게 사용한다는 말이냐?”
“응. 대신 내가 사용하려는 목적에 맞게 개량할 거야.”
단순한 향수를 만들어 낼 속셈이라면 일반적인 조향도구를 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룬이 사용하려는 대상은 언데드 정령기사.
향을 낼 재료 또한 마력이 깃든 재료였다.
‘아티팩트라서 향기뿐만 아니라, 마법 효능까지 고스란히 살려낼 수 있으니 이만한 물건이 없지.’
그랬다.
룬이 생각해 낸 것은 바로 ‘향기.’
먹지 못하는 듀라한에게 음식을 마법 효과를 지닌 마력향기로 바꾸어 흠향시켜주려는 것이었다.
단, 룬이 페르디키온에게 굳이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바로 ‘중독’ 증상에 대한 해결방법이었다.
‘상자가 주는 쾌락에 빠져 장수란 놈이 무용지물이 되게 할 수는 없지.’
룬은 개량을 통해 향을 맡을수록 룬에 대한 충심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만들 셈이었다.
‘기왕이면 내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써먹는 게 좋지 않겠어? 권속인 이상 듀라한이 그럴 이유는 없지만, 꼭 저 녀석에게만 쓰일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룬은 만들어질 물건의 효력에 대해 구상하며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괜찮은 게 맞는 거냐? 네 얼굴이 마치 계략을 떠올린 놈 같다만.”
‘쳇. 눈치 빠른 꼬맹이 같으니.’
사심이 들어갔다는 건 맞았다.
다만, 그렇게 해 두지 않으면 룬에게서 상자를 뺏기 위해 눈이 돌아갈 놈들도 분명 있을 터.
상자의 주인인 룬에게 대적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권속이 아닌 다른 자들에게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만들어진 물건을 페르디키온에게 써보면, 어느 정도 효과가 나오는지 알 수 있겠지.’
이것이 듀라한에게 통하는 방법에 대해 궁금해 하던 페르디키온의 동행을 허락한 이유였다.
권속이 아니며,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자.
‘저 녀석 정도면 딱이야. 아무래도 전력이 화려한 물건이다 보니, 이 정도는 해야 안전하게 쓰지.’
독과 저주, 어둠의 우두머리인 블랙 드래곤의 능력을 사용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룬은 검지로 제 볼을 긁적였다.
‘아. 지금 이 생각은 내가 생각해도 좀 사악했다.’
순진한 화룡족의 꼬마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어른의 시커먼 속내였다.
“그럼 난 상자를 개량하고 있을 게. 형은 듀라한 좀 봐주라.”
“좋다. 약속했던 일이기도 하니.”
한 쪽에서 음울하게 눈을 빛내던 듀라한이 몸을 일으켰다.
페르디키온은 듀라한을 보고 흥미로운 눈으로 입꼬리를 밀어올렸다.
“강한 투지가 엿보이는 자로군.”
어렴풋이 듀라한의 혼과 심장의 불의 기운을 느낀 페르디키온은 음울한 기운을 풍기는 듀라한에게 투기를 발산했다.
팡!
기와 기의 맞부딪힘.
둘은 서로가 상당한 실력자임을 눈치채고, 신중하게 하체를 낮추며 자세를 잡았다.
“여기서 싸우면 내 방 다 뒤집어져. 정 근질근질하면 레어 밖에 나갔다 와.”
당장 한판 떠도 이상하지 않을 둘을 제지한 건 룬의 목소리였다.
“큼! 정말 싸우려던 건 아니었다.”
투기를 거두는 페르디키온의 대답에 룬은 내심 혀를 찼다.
듀라한은 검은 방 밖으로 자유롭게 다니지 못하기에, 페르디키온이 듀라한을 데려가 주면 레어 밖을 구경하게 해 줄 수 있는 기회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깝군. 정작 듀라한 저 녀석은 전혀 불만스러워 보이지 않지만.’
듀라한도 페르디키온도 룬 근처에서 서로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서로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대화라기에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진단에 가까웠지만.
“어둠과 죽음을 둘렀으면서 불사조의 생명력과 불의 기운을 품고 있는 상태인 건 알고 있겠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 없이 잘 유지되는 거냐?”
녹빛의 눈이 한 차례 깜빡였다.
“보아하니 너는 이미 완성된 전사이자 기사로군. 몸에 깃든 전투 감각을 발휘할 때 개선되었으면 싶은 부분이 있나.”
철컥!
듀라한이 양 주먹을 맞부딪치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러자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했다.
“아아. 네 녀석에게는 좀 어려운 부분이겠군.”
특이하게도 생각보다 대화가 잘 통하고 있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상대방의 느낌을 잘 읽어낸단 말이지.’
단순한 성정을 가진 녀석이지만 은근히 남의 표정이나 심기를 짚어내는 데 뛰어났다.
펠이 듀라한과 자질에 대한 심층적인 이야기로 들어갈 때 즈음, 룬 역시 자신의 할 일이 집중했다.
룬의 비늘, 행복한 향기 상자, 유화제를 비롯한 몇 가지 마법시료들.
거기에 다양한 재료들까지 채워 넣고 저주 도구 만들기 세트를 사용하자 아티팩트의 백색 진주가 흑진주로 바뀌었다.
이름과 설명도 그에 맞게 달라졌다.
<어둠에 물든 행복한 향기 상자>
상태 : 룬 이클립스(Lune Eclipse) 귀속
- 대상의 강력한 거부 시 정신력에 따라 효력이 약해지거나 마법이 깨진다.
- 룬 이클립스의 의지를 담을 수 있다.(언령 사용 시)
- 수혜자가 효력을 경험한 횟수가 늘어날수록 수혜자에 대한 지배력이 상승한다.
- 수혜자가 효력을 경험한 횟수가 늘어날수록 룬 이클립스(Lune Eclipse)에 대한 충성도가 상승한다.
- 어둠의 마력에 취할 확률이 높아진다.
이미 알고 있는 경우 마음 가까이 여기게 되며, 룬을 직접 본 적이 없어도 호감을 가지게 되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소리였다.
‘상자 이름이 좀 흑화되기는 했다만…… 성능만큼은 잘 나와 줬군.’
신체의 일부가 들어간 덕분에 지배력과 친밀감이 상승한 상태를 보며 룬은 뿌듯해했다.
“다 됐어.”
룬의 말에 이야기 나누던 듀라한과 페르디키온이 다가왔다.
“이건가?”
외형상 색이 변화된 것 외엔 달라진 게 없었으나, 페르디키온은 짧게 침음성을 삼켰다.
“함부로 손대기 어려운 물건이 됐군.”
“아무래도 그렇지.”
상자는 여전히 아름답고 고급스러웠다.
게다가 어둠의 힘이 깃들자, 빠져들고 싶은 고아한 매력까지 감돌았다.
어차피 룬 외에 사용할 자가 없었으므로, 그는 상자를 들고 페르디키온을 보았다.
“한 번 볼래? 마침 형님도 궁금해하던 것 같은데.”
“흠, 좋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페르디키온을 물끄러미 보던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미리 넣어 두었던 노란 알사탕을 꺼냈다.
가장 무난한 마력 요리로, 피로한 몸에 활력을 주는 효과가 담긴 레몬맛 사탕이었다.
또르르.
상자의 뚜껑을 열고 사탕이 굴러들어갔다.
다시 뚜껑을 닫자 은은한 노란빛이 레몬 향기를 내며 주변을 감쌌다.
공기 중의 마력을 물들이는 맑고 싱그러우면서도 톡 터지는 상큼함.
레몬빛의 마력이 듀라한의 피부에 닿자 마력이 정령체에 흡수되며 피로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좋아. 마력 요리의 효과는 완벽하게 구현됐군.’
듀라한은 신기한 듯 양 손을 들어보며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룬을 가만히 바라봐왔다.
한동안 조용히 있던 듀라한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그에게 있어 룬은 세상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각에 눈을 뜨게 해 준 은인이었다.
성공을 예감한 룬이 씨익 웃어보였다.
‘제대로 적용됐어.’
남은 건 권속이 아닌 페르디키온의 반응이었다.
페르디키온은 어딘지 모르게 몽롱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마력의 빛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우님.”
“응?”
“내가 아우님을 진정한 형제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갑자기 뭔 소리야?’
생각지도 못한 말에 룬이 눈을 깜빡이자 진지한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아우님과 늘 나누고 싶었다. 어쩌면 모두 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군. 혼자 모든 걸 해내는 잘난 아우를 둔 탓에 그러지 못했지만.”
“야, 아니. 페르디키온…… 형?”
룬이 자신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올 뻔한 걸 수습하는 동안 페르디키온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 마력 향기도. 어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고,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이냐? 권속을 위한 아우님의 배려가 담겨 있음을 모를 수가 없어. 심지어 오늘따라 네 모습이, 나의 아버님보다도 멋있게 보이는군.”
“…….”
룬은 페르디키온을 보며 식은땀 나는 기분을 느껴 슬그머니 한 발짝 물러났다.
레몬사탕의 효과는 피로회복, 약간의 활력을 줄 뿐인데 페르디키온의 모습은 단순한 향기의 효과로 보기 힘들었다.
목줄기에 닭살이 돋는 기분이 느껴지긴 했으나,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일단은, 호감도의 상승에 가까웠다.
‘이건……상자의 효과인가.’
추정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바로 상자의 혜택 수혜자에게 룬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시킨다는 것.
‘듀라한이야 원래 내 권속이니 상관없다만, 내 밑에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호감이 있는 경우에는 좀 다르게 적용되는 모양이지.’
잘 쓰면 적도 아군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성심’이 높아진다는 효과가 룬에게 호감은 적당히 있지만 정신력이 제법 강한 페르디키온에게 이 정도로 효율을 보인다면 적대감을 가진 상대에게도 쓸만하리라.
‘게다가 상자의 효과라면 정신 차리게 할 방법이 있지.’
짝!
손뼉을 쳐 시선을 집중시킨 룬이 단호하게 명령했다.
“형. 정신 차려.”
“……어?”
충성심과 함께 강해지는 지배력.
이는 룬의 명령이 훨씬 잘 받아들여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페르디키온은 즉시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하며 물어왔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었지.”
“기억 안 나?”
“……. 기분 좋은 레몬향이 났던 건 기억한다. 취한 것처럼 묘한 기분이기도 했고.”
“별건 없었어.”
시침 뚝 떼버린 말에 어딘가 찜찜해하는 페르디키온을 두고 룬은 상자를 아공간 주머니에 갈무리했다.
혹시 민망해서 대화를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망각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정말 모르겠다는 눈이기도 해서, 룬 역시 굳이 파고들 마음은 들지 않았다.
‘원래 내게 호의를 가졌던 녀석이다 보니 충심 강화 효과가 더 강하게 나온 모양이고. 굳이 따지면 일종의 동경이라 봐야하나.’
처음 사용하는 아티팩트다 보니 지배력과 충성심의 상승에 대한 차이를 정확히 알기 위해선 더 실험해 봐야 알 듯 싶었다.
한편, 페르디키온 역시 뭔가 어색했던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래, 상자가 효과는 있었나?”
“응. 듀라한에게 잘 작용하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