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242)

“정말 향기를 맡게 했단 말인가. 저 녀석은…… 코가 없잖나.”

납득이 가지 않는 눈을 하는 페르디키온에게 룬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향기라서 그래.”

코로 흡수되는 향기가 아닌 마력을 물들이는 향.

룬이 굳이 저주받은 상자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해츨링이라지만 페르디키온에게 저 정도 효과라면, 평범한 인간에게 사용하게 될 때는 더 강한 효과가 나타날 테지.’

이건 반드시 통한다

듀라한은 사탕의 여운이 사라져 가는 게 아쉬운지 희미한 레몬향이 남은 공간을 양 손으로 꾹, 움켜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듀라한에게 최적의 물건이야. 원래 어둠을 품고 나온 녀석이라 그 힘에 취할 염려도 없고, 충심은 권속이라 원래도 강했으니 상관없고.’

신체의 감각이 거의 없다시피 한 듀라한에게 세상의 자극은 오직 전투에서 나오는 고양감뿐.

죽음에서 태어나 우울한 성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에게 이번에 만든 향기 상자가 선사하는 건 단순한 향과 마력의 효과뿐이 아니었다.

‘흑미 녀석의 말마따나, 회복의 시간과 인생의 즐거움을 누릴 시간도 필요하지.’

룬은 상자의 효과에 만족했다.

다만 페르디키온의 상태를 모아하니, 듀라한 외에 다른 이들에게는 함부로 쓸 때는 이상한 효과로 변질되리라는 게 다소 찜찜할 뿐.

‘애초에 듀라한 녀석을 위해 만든 거니 상관없지만.’

애초에 듀라한을 위해 만든 거니 상관없는 문제였다.

레몬향기가 완전히 가실 즈음, 페르디키온이 턱 짓을 하며 그를 불렀다.

“룬.”

검은 방으로 들어오는 동그랗고 하얀 빛.

룬은 직감적으로 라이의 등장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깨닫고 미간을 좁혔다.

[ㅇㅅㅇ/]

“……오는 거야?”

예의상 묻긴 했으나, 이미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한 룬의 목소리는 낭패감이 담겨 있었다.

라이는 빛을 이용해 공중에 크리스티나의 형상과 귀가하는 모습을 그려내었다.

완성된 그림을 본 룬은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듀라한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근심걱정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룬의 얼굴을 본 페르디키온 역시 측은함 섞인 얼굴을 했다.

“아우님. 역시 그분이 오시는 건가?”

“……응.”

그리고 다음 날, 크리스티나가 레어에 귀환했다.

“룬 이클립스.”

엄한 목소리에 온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영민하게 빛나던 온기 어린 눈은 온데간데없이 가라앉은 푸른 서늘함이 룬을 쿡쿡 찔러왔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룬은 본체화한 까만 해츨링의 모습으로 귀를 늘어뜨렸다.

“뀨우.”

잔뜩 시무룩해진 룬을 보면서도 크리스티나는 여태껏 지은 적 없는 차갑고 딱딱한 얼굴이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는 알겠지.”

[미안해. 위험한 장소에 마음대로 놀러가서 화났을 거 알아.]

“사과한다고 넘어 갈 일이 아닌 것도 잘 알겠구나.”

차르륵.

크리스티나의 오른손이 들리며 금빛 사슬이 감겨들었다.

룬은 그녀의 금빛 사슬을 본 순간, 진심으로 화가 나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넌,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내 부탁을 무시했다는 거구나.”

조용한 진노가 딱딱한 목소리와 함께 푸른 눈 안에서 금빛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나는 약속을 어기는 자를 가장 싫어한단다.”

절로 침이 목 안으로 무겁게 삼켜졌다.

아무리 상냥했다 한들, 골드 드래곤이자 빛의 여제라 불리는 그녀임이 실감났다.

“너처럼 똑똑한 아이가 어째서 이런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걸까. 어쩌면, 내가 그 동안 너무 많이 봐주었던 거니?”

햇살 같은 금빛이 아닌 한 겨울 얼어붙은 별과 같은 눈.

심장까지 굳어버리게 만드는 압박이 룬의 몸을 조여 왔다.

‘잘돼야 할 텐데.’

꿀꺽.

긴장한 그가 비장의 각오를 다졌다.

‘생각해 둔 방법이 통하려면…… 거짓이 있어서는 안 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긴장감에 손이 꽉 쥐어졌다.

얼굴에 열감이 올랐다.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전생을 통틀어 봐도 이런 방법은 써본 적이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짓이었지만, 그 점이 오히려 더 좋을 거라 여기며 룬은 마음을 다잡았다.

“뀨, 뀨후우.”

해츨링의 모습을 하고 있던 룬이 크고 동그란 아몬드 모양의 눈에 불안한 떨림을 담았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두려움에 떠는 작은 아이였다.

한껏 시무룩해진 얼굴로 시선을 바닥에 떨군 룬은 떨리는 조그마한 앞발을 꼼지락거리며 마주잡았다.

“뀨우우…….”

[미안, 크리스티나. 그렇지만 아멜리아의 부모님이 아파하신다길래, 어떻게든 돕고 싶어서 그랬어.]

“…….”

크리스티나의 평소 성정은 따뜻하고 친절했으나, 한편으로는 지켜야 할 선은 완고하다 싶을 정도로 정확히 지키는 자였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그녀는 종종 룬의 잘못을 가벼운 핀잔이나 벌, 훈계 정도로 너그럽게 넘어가곤 했다.

‘생각해보면 그럴 때마다, 내 모습은 본체인 해츨링이었어.’

그랬다. 크리스티나는 유독 해츨링. 아이다운 모습에 약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거기에 더해,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아이가 생각할 법한 동기까지 있다면.’

룬이 생각해낸 그녀의 분노를 사지 않을 방법.

바로 아멜리아네 일가를 도운 일이 순수한 아이의 생각과 행동이었다는 걸 알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중 때 택한 것이 지금 모습이었다.

통통한 볼에 동글동글한 얼굴, 짧은 발.

다 자라지 못한 날개.

어린 새끼의 귀여움이 드러나는 외모였다.

‘미움을 사지 않는 모습을 가졌다는 건 분명한 이점이다. 상대의 적대감을 누르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속으로는 근질근질한 기분이 올라왔지만, 이건 전략적 선택이었다.

종을 불문하고 어린 새끼란 귀엽고 사랑받는 존재.

오죽하면 속담조차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쁜 법이라 할까.

하물며, 룬은 흔치 않은 어린 해츨링이었다.

‘이건 반드시 통한다.’

귀가 뒤로 접힌 채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룬은 무척 처량해보였다.

이미 단단히 혼이 날 걸 알고 있는 작은 해츨링은 동그란 뒤통수를 보이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긴장된 시간이 흘렀다.

몇 초가 몇 시간을 농축시킨 게 아닐까, 생각되었을 즈음.

크리스티나가 옅은 탄식을 흘렸다.

“물의 아이인 아멜리아에게 사정은 들었단다. 그 아이가 그러더구나. 네가 없었다면, 부모님을 잃고 자신조차 사라졌을 게 분명하다고.”

다행히 룬의 부탁대로 아멜리아가 룬이 그들을 돕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잘 설명해 준 모양이었다.

아멜리아의 성정 상, 분명 룬의 도움으로 부모와 자신을 구한 일에 대해 진심으로 선처를 부탁했을 터.

게다가 크리스티나가 직접 물의 레어의 상황을 확인했으니 룬이 나서지 않았을 때 일이 얼마나 심각해졌을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가 돕지 않았다면, 물의 일족이 전멸할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겠지.’

아무리 외적으로 귀여운 모습이라 해도, 장로로서 납득할 정도로 합리적인 이유가 가장 중요했다.

그 이유만으로는 다소 부족했다고 여겼는데, 아이의 선한 마음이 이끈 결과라는 말을 들으니 크리스티나도 계속 진노해 있을 수는 없었다.

‘현실적으로 내가 나서지 않았을 때 생길 파장을 고려하고, 그 행동이 어린 아이의 선한 행동이 가져온 우연한 결과물이라는 걸로 연결되었을 터.’

완벽했다.

누군가를 돕고 싶었다는 마음을 가진 어린 아이를 마냥 탓할 어른은 없는 법.

심지어 크리스티나는 드래곤답게 살아가는 걸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니, 결과가 드래곤 일족을 구한 일이 되었다면, 이 일로 화를 내는 건 드래곤 장로로서의 가치관과 반대되는 일이었다.

크리스티나가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래, 너는 아직 어린 해츨링이었지. 나는 언제부턴가, 네가 어린 해츨링이라는 걸 잊고 있었는지도 몰라.”

룬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사조의 알을 부화시키고, 불의 일족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드워프와 페르디키온의 일을 해결했다.

심지어 다른 해츨링이라면 힘들고 지루해 할 수련을 당연하게 수행했으며 불의 일족 레어에서 최초로 히든 던전을 발견하고 클리어하기까지 했다.

이번엔 물의 일족이 고통받아온 오랜 저주와 어둠을 거둬들이고 그 일가를 구한 일들까지.

어지간한 드래곤도 해내지 못하는 일을 성공시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언제부터인가 이 아이를 성체가 된 드래곤처럼 여기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룬이 그렇게 어른스러워야 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전란으로 일족을 모두 잃어버리고 혼자 겨우 살아남은 아이.

크리스티나가 전승 마법을 전하면서까지 룬이 강해지고, 어둠의 군주가 될 수 있기를 바랐던 마음을 고스란히 알았기에 그 많은 일들을 해낸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크리스티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룬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넌 그저…… 어둠 일족의 부흥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해츨링일 뿐이었는데.”

장하고 기특한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아이가 어른이 될 수는 없는 법.

크리스티나는 룬이 잘되기를 기대하고 품었던 마음이 아이의 어깨를 눌러왔을지도 몰랐다.

그것도 모르고, 기대와 달리 행동한 룬에게 노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크리스티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린 해츨링이 실수하고 잘못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을.’

룬은 그저, 어떻게든 친구를 구하고 싶을 뿐인 아이였다.

크리스티나의 손에 감긴 금빛 구속의 사슬이 사라졌다.

노기가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음성이 룬을 향했다.

“미안하구나.”

어딘지 모르게 어른스럽고, 대견한 아이여서 어린 아이라는 생각이 점차 지워졌었다.

힘을 탐내 목숨이 위험한 곳을 위기감도 없이 가는 어리석음에 화가 나기도 했다.

어려움에 처한 아이를 외면하지 못했을 뿐인 룬에게 ‘구속의 사슬’까지 들이댈 뻔한 일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크리스티나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어 룬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룬의 까맣고 도톰한 발 위에 부드럽게 얹었다.

“사과할게 룬. 널 무섭게 만들어서.”

“뀨욱.”

슬그머니 눈치를 본 룬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더니, 시무룩해진 얼굴을 들어 크리스티나의 손을 꼭 잡았다.

“어쩌다보니 네가 아직 어리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 정말이지, 이렇게 귀여운 아이에게 무섭게 대하고, 시무룩해지게 만들다니…….”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내려 뭉툭하고 작은 앞발을 붙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넌 그저…… 곤란을 겪고 있던 물의 일족을 돕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뀨우…….”

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크리스티나의 목을 팔로 끌어안았다.

크리스티나가 룬의 등을 토닥여 줄 때, 그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됐다.’

노림수가 잘 맞아떨어졌음을 느끼며, 그는 생각보다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평소의 나로서는 정말 생각하기 힘든 방법이긴 했다만……. 다행이군.’

일이 잘 풀리기는 했지만, 내심 양심이 찔리기도 했다.

그는 내숭에 넘어간 크리스티나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속으로 적당히 합리화했다.

‘어쨌든 아멜리아 녀석을 도우려던 마음에 거짓이 있던 건 아니었으니까. 또 다른 비극을 초래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룬이 조치하지 않았다면 어둠 일족의 힘을 보호하려다 물의 일족의 희생만 강요할 뿐이었다.

‘잘 해줬군, 아멜리아.’

이 성과의 밑바탕에는 아멜리아의 진심 어린 감사와 간절함이 깔려있었다.

기대해도 되겠지?

룬은 아멜리아의 진정성으로 이번 일이 잘 풀린 거라 짐작했다.

그런 룬에게 크리스티나가 말을 이었다.

“나는 왠지, 네가 성체의 드래곤처럼 생각하고 이런 결과가 나오리란 걸 이미 알고 행동했으리라 여겼나 봐. 설마 내가 그런 착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

놀랄 일이었다.

착각했다고 말은 했지만, 크리스티나가 무의식적으로 이 일의 본질을 파악해 냈다는 소리였다.

룬이 평소에 자유롭게 행동하기 위해 평범한 해츨링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똑똑하게 굴긴 했으나, 겉모습이 어린 해츨링인 이상 성체의 드래곤처럼 느끼기는 쉽지 않았다.

‘역시 오래 산 신수라는건가? 우연히 맞춘 걸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999년 이상의 삶을 산 이무기였던 룬.

그걸 알 리 없는 크리스티나에게 속내를 파악 당했다는 건 식은땀 나는 일이었다.

‘앞으로는 수련 강도만 살짝 올리고, 다른 행동거지는 좀 더 조심하는 게 좋겠어.’

룬의 다짐을 모르는 크리스티나는 룬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온기 어린 말을 꺼냈다.

“너는 내게 소중한 아이란다.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게 되어 장성한 드래곤이 되더라도 너는 여전히 나에게 작고 귀여운 아이일 거야.”

“뀨웃.”

‘부디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해 다오.’

진실을 간파한 그녀에게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크리스티나의 말에서 느껴진 선함에 고맙기도 했다.

한결같은 진심을 보일 수 있는 상대는 귀한 법이니까.

‘아무래도 999년 동안 살아온 세월을 살아와선지, 상대의 말이 진짜인지 정도는 알아버리게 된단 말이지.’

하지만 이어진 말에, 그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지만 벌은 제대로 받아야지?”

생긋.

상냥한 웃음 너머로 불길함이 감돌았다.

“뀨욱?”

[벌?]

“자신이 선택해서 한 일에 따른 책임은 스스로 지는 거란다. 아무리 어린 해츨링이라 해도 그건 당연한 일이지.”

크리스티나가 몸을 바로 세우고 룬을 내려다보았다.

“룬. 앞으로는 매일 새벽 격투 수업에 나오렴.”

‘매일 새벽!?’

“뀨, 뀨우. 뀻…….”

뻣뻣하게 굳어버린 룬을 내려다보며, 크리스티나는 여유롭게 긴 머리를 한 손으로 걷었다.

“열흘에 세 번 있던 격투수업은 앞으로 매일 수업으로 돌리자꾸나. 단, 이번에는 아침식사 시간에 맞춰 끝내는 느긋한 수업을 진행하지는 않아.”

“뀨웃!?”

‘결국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단 거잖아!’

어린 해츨링이 감당할 강도가 아니었다.

좀 전엔 아이답게 보지 못해서 미안하다더니,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게 아니냐며 항의하고 싶어질 정도로.

평소 수련을 즐겼을 룬이었지만, 크리스티나와의 격투 수업은 어지간한 무술가도 감당하기 힘든 난이도를 가지고 있었다.

벌써부터 크리스티나에게 등 터질 미래가 눈앞에 선했다.

룬의 경악에 답하듯 크리스티나가 이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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