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면 그만한 힘을 갖출 필요도 있는 법이란다. 이제 한 일족의 힘을 가졌으니, 다룰 방법도 익혀야 하지 않겠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크리스티나가 ‘벌’ 대신이라 말한 이상, 순수한 의미를 가진 수업일 리는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 말 나온 김에 어떤 수업을 하게 될지 한 번 경험하게 해 주고 싶구나.”
‘예비 훈련쯤 되는 건가?’
무슨 수업인지도 모르고 앓느니, 뭔지 알고 마음의 준비라도 해 두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말을 곱씹느라 즉답하지 않는 그에게 크리스티나가 추가로 설명을 덧붙였다.
“벌이라고는 했지만, 숙련되면 힘을 다루는 일에 능숙해질 거야. 나는 네 속성과 대치되는 빛의 힘을 가졌으니까.”
“!”
제법 솔깃한 이야기였다.
그가 일족의 힘을 얻긴 했지만, 대상을 특정 지어 써 보기엔 위험한 능력이기도 했으니.
하지만 어둠과 상극의 속성을 가진 고룡 크리스티나라면, 충분히 룬이 가진 힘을 상대할 수 있었다.
‘확실히, 힘을 시험해 볼 최적의 상대이긴 해. 게다가 한 번쯤은 제대로 이겨보고 싶은 상대이기도 하고.’
그간 10년생 해츨링의 수준에서 보일 수 있는 정도의 능력치만으로 싸웠던 그에게, 이 제안은 참아왔던 힘을 드러내 싸울 기회였다.
“물론 자신 없다면 억지로 시킬 수는 없겠지만.”
고개를 까닥이며 가볍게 도발까지 하는 그녀를 보며 룬 역시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크리스티나와 대등하게 싸워 볼 수 있을지도.’
의욕이 차올랐다.
룬은 크리스티나를 쳐다보고 각오를 다진 눈으로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꾸우!”
[좋아. 해볼게.]
노림수에 넘어간 기분이 들긴 했지만, 이런 제안이라면 넘어가 줄 만했다.
“자리를 옮기자꾸나.”
딱.
크리스티나가 손가락을 튕기자 둘의 모습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
크리스티나와 함께 도착한 곳은 몇몇 조각상들이 있는 텅 빈 공간이었다.
거대하고 하얀 돔에 가깝고, 사방이 창 하나 없이 막혀 있었지만 작은 마을 정도 되는 크기였기에 답답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룬은 평범한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주변의 마나를 느끼기 위해 감각을 예민하게 다듬었다.
‘빛의 마나가 흐르는 공간이군.’
은은한 빛의 흐름과 일정하게 느껴지는 마나.
크리스티나의 레어가 절로 떠올랐다.
“여긴 내가 만든 공간이란다. 일족의 힘을 이용하면 이런 아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되지.”
“뀨아.”
[신기하네.]
아이다운 놀라움을 보이며 룬은 주변을 살폈다.
벽이나 조각상을 구축하고 있는 소재가 일반적인 금속이 아닌 빛의 마력이었다.
심지어 굉장히 정교하고 빈틈없이 만들어져, 남다른 마력 숙련도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빛의 힘이 이렇게 농축되어 있는 건 처음 봐.]
“너도 언젠가 이 정도는 만들 수 있게 될 거란다.”
룬의 앞에 빛이 모여들더니, 투명하고 푸른 눈의 결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만들어진 육각형의 형태는 각 모서리 끝점에서 또 다른 눈의 결정을 생성하며 점점 커졌다.
마치 허공에 눈꽃 결정의 무늬로 된 하늘이 만들어지는 기분이었다.
‘마나를 이렇게 대단위로, 정교하게 다루다니.’
결정으로 만들어진 하늘은 이내 사라졌으나 크리스티나와의 격차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크리스티나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까닥였다.
“이 공간에서만큼은 네가 지닌 힘을 모두 드러내도, 어떤 피해도 없을 거란다.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겠니?”
[물론이지.]
크리스티나의 질문에 대한 답은 무척 쉬웠다.
[빛의 마력으로만 이루어진 이 장소라면, 내가 지닌 어둠을 얼마든지 끌어내도 좋다는 말이잖아.]
“그래, 맞았어.”
확인까지 해 준 말에 룬은 어둠을 몸 주변에 둘렀다.
어른거리는 검은 장막이 빛이 가득한 공간에서 유독 도드라졌다.
“어둠의 힘은 아주 강하지만, 무엇이든 삼켜버리는 잔혹한 힘이기도 하지. 충분히, 마음껏 사용해보렴.”
여유롭게 웃은 크리스티나가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아지랑이처럼 빛으로 된 파장이 공기를 흔들고 아무것도 없던 흰색 벽이 일그러지며 도시와 탑들이 만들어졌다.
인파가 없는 고대의 도시였다.
천 년 전쯤에나 유행 했을법한 건물들.
어딘지 모르게 삭막했으나,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수단과 방법은 상관없단다. 이 빛의 도시 안에서 나를 찾아내면 돼.”
[음……. 숨바꼭질 같은 거야?]
‘고작 그런 거라면 좀 시시한데.’
내심 심드렁하게 생각하는 그에게 상냥한 눈웃음을 지은 크리스티나가 은은한 투기를 흘렸다.
“귀여운 생각이구나, 룬.”
“!”
분명 조절해서 뿜어내는 기운인데도 답답했다.
맹수가 사는 영역에 들어와 있는 듯한 위기감.
동시에, 꼬리뼈에서 정수리 위까지 짜릿함이 올라왔다.
하지만 전과 달리 긴장감만 드는 게 아니었다.
이건…… 강한 상대를 두고 무언가 해 볼 만하다는 기대감이었다.
‘확실히, 전에 비해 훨씬 좋군.’
얼마 전의 룬이라면 그녀가 주는 압박감에 짓눌려있을 상황이었건만 그는 자연스럽게 주변에 어둠을 퍼트렸다.
빛과 어둠의 조용한 영토전쟁이었다.
룬의 마력은 그녀의 영역 내를 침범하며, 크리스티나의 투기에 밀리지 않고 고요히 자리를 넓혀갔다.
어린 어둠이지만, 크리스티나가 지닌 빛을 위협하는 힘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살며시 입꼬리를 밀어올렸다.
“어둠을 담은 그릇이 이렇게 크다니. 천부적인 재능이 경이롭구나.”
새까만 일렁임이 빛을 삼키며 탐욕스럽게 번져갔다.
그림자가 훑고 지나간 자리는 마치 지우개로 문지른 것처럼 지워지고 원래의 하얀 벽이 비춰보였다.
어둠이 지나간 자리에 다시 빛이 모여들며 오래된 도시 풍경을 되살려냈다.
“네가 얼마나 활약할지 기대해도 되겠지?”
크리스티나의 모습이 굴절되며 흔들리더니 둘, 셋으로 늘어났다.
조금씩 다른 외형과 표정, 다른 옷을 입은 크리스티나가 생겨나 도시 안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단발이나 땋은 머리등 다양한 머리스타일과 다양한 나이의 그녀가 저마다 생기를 지닌 채 도시를 활보했다.
빛의 힘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신기루였다.
신기루로 된 크리스티나들 중 룬과 가장 가까이 있던 자가 다정히 말했다.
“앞으로 1시간. 그 안에 진짜 나를 찾아보렴.”
룬은 그녀를 잡으려다 주변을 먼저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신기루였지만, 신기루가 아닌 것들이 섞인 도시.
룬은 광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표적이 여럿 있으니 연습용으로 제격이군. 우선은 가장 단순한 방법부터 시도해 보는 게 맞겠지.’
룬은 몸 풀기로 서서히 힘을 끌어내, 이 공간 전부를 어둠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도시의 낮이 노을 질 여유도 없이 어두운 밤으로 변했다.
그 풍경은 시간을 뛰어넘는 마법처럼 보였다.
어둠은 거침없이 내달려 탐욕스럽게 도시의 빛을 먹어치웠다.
그러나 어둠으로 뒤덮인 것은 잠시뿐, 어린 크리스티나가 손을 휘두르자 하늘에서 어둠 사이사이로 떨어진 빛에 도시가 다시 드러났다.
룬은 변함없이 빛나는 도시를 감상하며 생각에 잠겼다.
‘1시간이라. 이 공간을 그 정도 시간동안 유지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거군.’
그는 크리스티나가 준 문제의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짐작도 하지 못하는 크리스티나에겐 미안하지만 어둠과 저주, 독에 관련된 힘은 이무기 시절부터 다뤄온 힘이었다.
‘내가 방법을 바로 찾아내는 건 이상하겠지. 어차피 힘을 시험해 볼 겸 시작한 일이니 확인해볼까.’
모처럼 어둠을 최대한 써볼 수 있는 장소이니 느긋하게 활용해볼 셈이었다.
그는 모른 척 양산을 들고 걸어가는 크리스티나의 몸을 진하게 뭉쳐진 어둠을 지닌 앞발로 툭 건드려보았다.
촤아!
갑자기 천장에서 강렬한 빛이 떨어졌다.
“!”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고 빠르게 몸을 물리자, 룬이 원래 있던 자리가 염산이라도 뿌린 듯 빛에 거뭇하게 녹았다.
그 자리는 곧 은은한 빛으로 가려지더니 깨끗한 도시의 길로 변했다.
‘이것 참.’
무차별적인 빛을 이용한 공격마법에, 환상으로 둘러싸인 공간까지.
심지어 광선은 드래곤 스킨도 소용없었다.
매서운 공격을 본 룬은 느긋하게 해결하려던 생각을 바꾸었다.
그 방법을 써야겠어.
‘조만간 블루 드래곤 레어에 있는 <저주받은 던전>에 가려면, 내 힘을 보일 필요가 있긴 했지.’
가짜 크리스티나를 직접 건드리면 광선이 무차별적으로 그를 향해 쏟아질 터.
그렇다고 하나하나 확인하며 살피기엔 1시간은 너무 부족했다.
‘무식하지만 그 방법을 써야겠어.’
룬은 주변에 어둠을 응축시켰다.
후욱!
새까만 어둠이 룬의 몸에서 쏟아져 나와 모든 크리스티나의 분신에게 뻗었다.
동시에, 하늘에서 구름 사이사이로 떨어지는 광선이 그의 온 몸에 사납게 내리 꽂혔다.
콰아아아아!
빛에 하얗게 타들어가는 바닥과 도시의 벽.
분수대와 장식품들이 빛에 의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빛을 튕겨내고, 차단하는 건 룬의 어둠뿐이었다.
룬은 어둠을 두르고, 힘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감각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찾았다. 크리스티나가 가지고 있는 어둠.’
일렁이는 어둠이 닿은 먼 곳.
룬은 이 만들어진 도시에서 눈을 현혹하는 가짜 크리스티나 중 유일하게 ‘진짜 그림자’를 가진 크리스티나를 찾아냈다.
[잡아.]
슈르륵!
순식간에 크리스티나의 그림자가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빛으로 빚어진 크리스티나의 몸은 분신을 건드리면 광선이 쏟아졌지만, 그녀의 그림자는 달랐다.
모든 것이 빛의 굴절로 이루어진 환상이지만, 실존하는 크리스티나가 지닌 ‘그림자’만큼은 환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정답이야.”
하얀 삼각 모자를 쓰고, 위자드의 복식을 한 크리스티나가 살짝 눈을 떨며 웃음 지었다.
대답처럼 룬 역시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려 웃었다.
빛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그녀처럼, 룬 역시 어둠을 조종하는 힘을 이용해 진짜 크리스티나의 그림자를 지배하에 둘 수 있었다.
‘그럴 줄 알았지.’
본격적인 수업 전, 분위기 파악 차 온 곳이었다.
시작 전 준비운동이나 하는 의도였으니, 능숙하게 쓰는 걸 기준 삼지는 않았을 터.
그런 제한 안에서 쓸 수 있는 해결법이라면 딱 하나, 빛의 마력으로 가득한 이 공간에서 진짜 어둠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놀랍구나. 설마 이렇게나 빨리 핵심을 파악할 줄은.”
순수한 감탄이었다.
‘가장 기초적인 본질 파악과 약간의 센스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정도. 딱 좋군.’
지닌 속성을 이해하고, 정확하게 사용한다.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도구를 조작해 성공적인 결과를 낸다는 건, 사실 여러 번의 시행착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룬에게는 쉬운 일이었지만, 해보지 않은 발상을 해내야하는 과제였던 만큼 난이도는 높았다.
심지어 광선 공격은 크리스티나가 이제까지 직접 손으로 다치지 않게 조절했던 방식과 달랐다.
피부가 상할 정도의 공격을, 무차별적으로 가하는 수업.
한 마디로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위험을 감당할 담력 없이는 시작조차 불가능했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녀가 이런 방법을 쓰는 의도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좀 진지하게 물어봐야겠는데.’
룬은 팔찌를 끼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크리스티나. 이 수업을 진행하는 진짜 의도가 뭐야?”
“벌써 눈치챈 모양이구나. 정말이지, 눈치 빠른 아이야.”
룬의 질문에 작게 미소 지으며, 크리스티나가 지팡이를 쥐고 다가왔다.
한 손으로 금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맑고 따뜻하지만 차분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룬. 물의 일족의 <저주받은 던전>에 가고싶니?”
“……응.”
의외의 질문에 룬은 대답 후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래. 상황이 좋지 않더구나. 남은 어둠이 그들의 던전을 계속 물들이게 되는 건 나 역시 바라지 않는단다. 네가 힘을 회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 하지만 거긴 정말로 위험하단다.”
다가온 크리스티나가 룬의 옆 자리에 앉았다.
어느 새 풍경은 고대의 도시가 아닌, 작은 시골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였다.
“돌아오기 전, 아멜리아 일가를 만나 충분히 이야기를 하고 왔어. 결론부터 말할게. 물의 일족은 <저주받은 던전>의 저주와 어둠을 몰아내달라고 정식으로 네게 의뢰를 했단다.”
‘역시.’
아멜리아 부모의 어둠을 제대로 해결해 낸 룬.
저주에 시달리고 지친 물의 일족이 원래의 레어를 되찾기 위해서는 아직 남아있는 자연히 던전의 정화가 꼭 필요했다.
‘고구마 넝쿨처럼 줄줄이 딸려올 줄 알았지.’
예상대로, 룬의 도움을 원하리라 여겼던 그는 속으로 만족스러워 했다.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묵묵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에게 크리스티나가 조금은 아쉬운 눈으로 마주보았다.
“룬, 네 선택은 이미 정해져있겠지?”
말릴 수도, 말린다 한들 소용없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 청명한 푸른 시선은 염려 섞인 쓴웃음을 지었다.
“크리스티나가 그랬잖아. 나는 누가 뭐래도 훌륭한 블랙 드래곤이라고.”
룬이 씨익 웃으며 그녀가 해줬던 말을 돌려주었다.
“어둠 일족은 대대로 그랬다면서. 어둠 속에서 묵묵히 움직이는 자들, 부서지고 상처 입은 이들, 용감하게 싸웠지만 패배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룬.”
깊이 있는 시선이 룬을 바라봐왔다.
어린 해츨링을 보호해야하는 의무와, 간신히 회복한 물의 일족에게 남은 위기.
둘 중 하나를 골라야했던 크리스티나 나름의 고민이 있었으리라.
어린 소년은 그를 마주하고 있다가, 막 생각났다는 듯 툭 말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면 그만한 힘을 갖출 필요도 있는 법이라 했지?”
속으로 고심했을 그녀의 염려에 대답해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의 일족의 문제는 내가 해결할게. 이 수업도 대비없이 던전에 들어가면 위험하니까 수련을 돕기 위해 만들어 준거, 맞지?”
“그래. 사실 나는 네가 어떻게 결정할지, 이미 짐작이 가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