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242)

물의 일족이 <저주받은 던전>의 어둠의 제거를 의뢰했을 때 크리스티나는 룬이 나서는 걸 반대했다.

하지만 빛의 일족 장로인 그녀가 물의 일족의 장로와 그 일족 전체를 외면하는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당사자인 룬의 결정이 가장 중요했고, 룬은 이를 수락했다.

염려해 준 크리스티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는 기꺼운 상황이었다.

‘이걸로 물의 일족이 사는 레어와 <저주받은 던전>에 가는 데에 방해될 건 없겠군. 수련이 좀 빡빡하겠지만, 어둠을 제대로 다뤄보는 것도 간만이니. 손을 풀어둘 필요는 있지.’

이런 룬의 생각을 듣기라도 한 듯, 크리스티나가 제동을 걸었다.

“다만 물의 일족이 부탁한 의뢰를 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단다.”

“?”

의문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룬에게 부드러운 해답이 들려왔다.

“내가 인정할 정도로 실력을 키울 것. 적어도 내가 네 목숨 걱정은 하지 않아야 하지 않겠니?”

‘……. 크리스티나 기준으로 ‘목숨 걱정’에 대한 조건이라.’

크리스티나 기준인 이상, 합격선은 꽤 높은 편이었다.

잠시 생각해 본 룬은 조건을 수락했다.

“응, 알겠어.”

“어머, 생각보다 담담하구나. 조금은 아쉬워 할 줄 알았는데.”

“목숨 걱정 할 일이 없으면 되는 조건이라며. 그럼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위험한 장소에 아무 대비 없이 보내는 보호자는 없다.

크리스티나가 당장 인정할 만한 실력을 보인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룬에게는 이미 완벽한 목숨 보장용 핑계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페르디키온 형이 나랑 같이 가 줄 거야. 우리 형 성격 알잖아. 불의 인장을 나눠 받은 의형제인 내 목숨은 확실히 챙겨주지 않겠어?”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룬에게 크리스티나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영악한 아이야.”

***

“그래서, 날 <저주받은 던전>의 통행증으로 써먹었다는 거냐?”

“어쩌다보니. 혹시 안 가고 싶어?”

“마음 같아서는 나도 가지 않고, 아우님도 안전하게 있는 쪽을 권하고 싶다.”

꽤나 단호한 답에 룬이 난감해 하는데, 페르디키온이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물의 일족이 처한 곤경을 외면하는 건 예비 장로로서 할 짓이 아니지. 게다가 아우님은 내가 없어도 어떻게든 갈 생각이지 않나.”

정곡을 찌른 페르디키온이 은근하게 노려봐왔지만, 룬은 모른 척 순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형밖에 없어.”

“거긴 나도 가보지 못한 곳이다. 내가 간다 해도 크리스티나 님께서 바로 허락해 주셨을 리는 없지.”

룬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누웠던 자세를 바꾸었다.

“안 그래도 추가 조건이 붙기는 했어. 보다시피 나도 당장 가는 건 무리야.”

점심시간이 한참 전에 지났지만, 당장은 침대에서 꼼짝 하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다.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군.’

크리스티나와 대화 후, 남은시간은 격투 수업으로 마무리되었다.

처음에는 수업인지 보복인지 모를 장권을 맞고 한 방에 기절.

하지만 룬은 정신을 차린 뒤, 포기하지 않고 추가적인 수련을 청했다.

크리스티나는 이미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알고도 포기하지 않는 룬을 대견하게 여겼지만, 룬의 속마음은 달랐다.

제공된 빛의 공간이 어둠을 수련하기 용이했고, 크리스티나에게 노력을 통해 실력이 나아지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야한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갑자기 힘이 늘면 이상해 보일 테니까.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다만.’

크리스티나의 빛의 힘에 얼마나 대응이 가능할지 궁금했던 마음도 컸었다.

그는 자세를 최대한 편하게 만들려고 몸을 꿈지럭 거리다가 최적의 자세를 찾아 몸을 늘어뜨렸다.

그런 룬을 보며 페르디키온이 가볍게 혀를 찼다.

“너도 무모하군.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저주받은 던전>에 갈 생각을 하질 않나, 봐주실 거라지만 크리스티나 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질 않나.”

“……뭐 꼭 이기겠다기 보단, 그냥 시도 해 본 거지.”

“속일 걸 속여라.”

‘칫. 눈치 은근히 빠른 꼬마 녀석 같으니.’

단박에 자르는 페르디키온의 말에 룬은 아무 말 없이 미간만 구겼다.

사실 맞는 말이었다.

혹시 크리스티나를 이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대련했다가 된통 등짝을 후려 맞고 굴러다녔다.

체감 상 이제까지의 수련 중 가장 강력하고 아픈 등짝 후려치기였다.

“아직도 뻐근하다. 그렇게까지 가차 없을 줄이야…….”

콧김을 푹 내쉬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페르디키온이 혀를 찼다.

“그래도 많이 봐주시고 있는거다. 넌 모르겠지만, 한때 그분의 별명은 ‘지옥에서 온 구원자’였다. 왠지 아나.”

“왜 그랬는데?”

“상대가 죽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자비 없는 손속을 지니셨지만, 딱 죽고 싶은 순간 살려주시기 때문이지.”

“…….”

구원은커녕 사신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손속을 지녔으면서, 살린 자들도 많은 이중성이 담긴 별명에 룬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뭐,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하는 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을 테지만.”

음울하게 덧붙여진 말에 룬은 스산한 기운을 느꼈다.

“형도 그 중 하나였어?”

“……그랬지.”

“…….”

룬은 자신의 전철을 진작 밟아보았을 페르디키온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그 분이랑 친해?

룬은 들었던 고개를 다시 베개 위에 추욱 늘어뜨렸다.

“나도 죽다 살아난 기분이긴 한데.”

“그래도 치유능력은 완벽하신 분이니 쉬면 나아질 거다.”

룬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이런 수련이 앞으로 며칠을 갈 걸 생각하면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뭐……, 덕분에 그런 수업이라 다행이라 해야 할지.’

비록 수업은 매서웠지만 말 그대로 원 없이 어둠을 사용해 볼 수 있었다.

전생을 통틀어 보아도 목숨 걱정 안 해도 되고, 전력을 다해도 죽을 염려 없는 상대와 제한 없이 싸울 수 있는 행운은 자주 오는 게 아니었다.

‘때리는 타점 하나하나가 매섭고 묵직했지.’

룬은 싸웠던 순간 중 아쉬웠던 부분들을 떠올리며 하나씩 곱씹어보았다.

여성체의 몸인 이상, 탄탄한 남성체의 몸보다 상대적으로 체구가 날씬한데도 헤비급 주먹을 연타로 맞은 느낌이었다.

‘아쉽다. 어린 몸이라 체격 차이에서 오는 불리함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욕심인 건 알았지만, 아쉬웠다.

파훼가 가능한 것도 있었지만, 기본적인 피지컬 차이 때문에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꽤 있었다.

체격 차이가 있어도 승기를 잡을 방법은 몇 가지 떠올랐지만, 상대가 워낙 실력이 출중한 실력을 지닌 크리스티나다 보니 써먹을 수 없었다.

‘쳇. 이러다 드래곤 될 때까지 못 이겨 보는 거 아냐?’

룬은 코로 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뾰족한 여우귀와 투명한 분홍빛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룬 님! 흑미 왔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삐이!”

[ㅇㅅㅇ/]

식사를 거르고 누워있는 게 걱정이 된 흑미와 백야, 심지어 라이까지 룬을 찾아왔다.

“이상 없어. 그냥 기력이 없는 거야.”

“그치만, 밥도 못 먹고……. 룬 님이 너무 걱정돼요.”

[ㅜㅅㅜ]

흑미가 히잉 소리를 내며 다가와 룬의 어깨와 팔을 작은 손으로 꾹꾹 주물렀다.

제 딴에는 마사지라도 해 주려는 모양이지만, 그건 기력의 회복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마음은 고마운데, 진짜로 괜찮아.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니까 걱정 마.”

“진짜요?”

머리 위를 빙빙 날아다니며 하얀 빛을 흘린 라이까지 의문스럽게 룬을 바라보았다.

흑미의 힘이 생각보다 세서 잡힌 부위가 욱신거렸지만 룬은 아픔을 참고 대답해 주었다.

“정말이라니까. 그러니까 팔 그만 주물러도 돼.”

“우웅. 네.”

그제야 팔에서 손을 뗀 흑미가 자신의 간식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냈다.

“이거요, 오늘 나온 초콜릿이랑 애플파이예요. 이건 땅콩쿠키랑 머랭쿠키구요. 룬 님 주려고 챙겨왔어요.”

‘많이도 가져왔네.’

입맛은 없었지만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는 마력 요리였다.

“많이 드세요, 룬 님! 그리구 얼른 나아요.”

“그래. 잘 먹을게.”

쿠키를 먹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무척 순수했다.

왠지 모르게 먹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 같아서, 룬은 회복을 위해 쿠키와 파이를 조금씩 베어물었다.

‘좀 낫군.’

남은 파이를 파삭 소리 내며 삼킨 룬은, 마침 모인 김에 알려야 할 일이라 여겨 흑미와 백야, 페르디키온을 불렀다.

“조만간, 아멜리아네에 가서 던전 하나를 깨러 갈 거야. 근데.”

룬은 한 호흡 삼킨 뒤 나머지 말을 내뱉었다.

“흑미랑 백야. 너희는 못 가.”

“네!?”

“삐!”

화들짝 놀란 흑미와 백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안절부절못하며 여우귀를 쫑긋 거린 흑미가 두 손을 꼬옥 모았다.

“룬 님, 저희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아멜리아 언니도 보고 싶은데.”

“어. 안 돼.”

“히잉!”

단호한 대답에 귀와 꼬리가 추욱 늘어진 채, 시무룩한 얼굴을 한 흑미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치만……, 흑미 잘할 수 있는데…….”

“폐광 던전과 달리 거긴 몬스터들이 만만치 않아. 애초에 거긴 심해 속 던전이라 불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곳이고.”

까만 여우귀를 움찔거린 흑미는 슬금슬금 룬의 눈치를 보며 ‘그치만…….’하고 말미를 몇 번 더 끌었다.

하지만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는 거절에 점점 더 시무룩한 눈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흑미를 보던 룬이 은근슬쩍 말을 흘렸다.

“그렇게 가고 싶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 어떤 방법이에요?”

하늘이 내린 동아줄이라도 본 듯 흑미가 되물었고, 백야도 눈을 반짝이며 룬을 바라보았다.

“지금 가려는 <저주받은 던전>은 어둠과 저주에 특화 된 곳이거든. 그러니 어둠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있으면 괜찮겠지.”

주로 육탄전을 치르는 흑미에게 룬의 권속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어둠을 제대로 익히게 할 셈이었다.

“다만, 그걸 위해서는 한동안 훈련이 필요해. 할 수 있겠어?”

흑미는 방법이 있다는 말에 눈을 빛내며 신나게 꼬리를 흔들었다.

“할래요! 흑미 잘할 수 있어요! 백야도요! 그치?”

“삐잇!”

룬은 제자리에서 깡충거리며 백야를 안고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도는 흑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주에 대한 면역을 기른 후 같이 간다면야, 흑미의 매혹은 좋은 이점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하고 싶냐.”

“네! 흑미는, 저번에 아멜리아 언니랑 다 함께 해낸 일이 너무 즐거웠어요! 또 하고 싶어요!”

흑미에게 블루 드래곤들과 맞서 그들을 구한 일은, 다 함께 한 즐거운 모험으로 기억된 모양이었다.

워낙 밖에서 활동하는 걸 좋아하는데다, 다함께 아멜리아의 부모를 구한 일이 특별한 기억에 남은 게 틀림없었다.

‘어린아이답긴 하군.’

이미 성숙된 어른인 룬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천진함이었다.

문득 룬은 저런 때 묻지 않은 시절을 누려 본 적 있는지 되돌아보았다.

‘뭐, 나는 그럴 수가 없었지. 기질도 다르고, 애초에 아이라고 다 저런 것도 아니니.’

크면서 성숙 되면 지금 같은 느낌은 아닐 터.

아직은 더 누려도 괜찮은 나이니 그냥 두자고 마음먹었다.

오히려 성체의 드래곤과 정면으로 맞선 기억이 안 좋은 방향으로 남지 않아 다행일지도 몰랐다.

‘당장 이번 일에 대한 속사정을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이번엔 페르디키온 형도 같이 가기로 했어. 형이 있으면 네게 있는 불의 능력이 강화될 테니, 물의 기운이 강한 심해의 던전이라 해도 효과 있을 거야.”

“우와! 이번엔 페르디키온 님도 같이 가요? 헤헤. 너무 좋아요! 저희 맛있는 간식 많이 싸가요, 룬 님!”

흑미의 환호에 옆에서 지켜보던 페르디키온이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내심 싫지 않은 눈치였다.

룬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형, 시간 되면 흑미의 불 다루는 능력도 봐주라.”

“뭐, 그러마. 내 레어의 불의 정령을 주력으로 쓰고 있기도 하니.”

‘좋아. 이대로 듀라한과 흑미는 페르디키온에게 맡기면 되겠군. 백야 녀석도 흑미를 따라 갈 테고.’

불의 능력을 다루는 불사조의 새끼인 백야도, 페르디키온 덕분에 불을 다루는 능력을 좀 더 다듬는다면 후에 어떤 상황에서도 제 역할을 해낼 수 있으리라.

심지어 불의 인장을 소유한 페르디키온과 함께 하기만 해도 흑미의 살라만더들이 힘을 얻게 될 테니, 물의 기운이 가득한 장소에서도 평소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계산을 마친 룬이 속으로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새 모양의 초콜릿 쿠키 하나를 더 까서 입안에 넣었다.

“먹고 나니 좀 쉬고 싶어지는걸.”

“알겠다. 필요하면 그……모코지석을 사용해 연락해라, 룬.”

“룬 님! 흑미한테도 모콕 해주세요!”

한 손을 들어 힘차게 흔드는 흑미에게 적당히 손인사를 해 주자 페르디키온과 흑미, 백야가 방에서 나갔다.

라이 역시 자신의 빛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룬의 주변을 한 바퀴 맴돌더니 크리스티나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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