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이 조용해지자 룬은 침대에 누워 품에서 모코지석을 꺼내보았다.
그간 와 있던 연락을 훑던 그는 원하던 부재중 글자를 확인하고 손가락을 멈추었다.
‘역시. 아멜리아에게 연락이 와 있었군.’
아멜리아가 표시된 부분을 건드리니, 글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룬, 크리스티나 님 돌아가셨어. 이야기는 잘 전해드렸는데, 잘 한 거겠지?>
<잘 해줬어. 고맙다.>
답장이 올 때까지 조금 쉬어두려 누웠는데, 생각보다 답장이 바로 돌아왔다.
<정말? 다행이다. 사실 실수라도 했으면 어쩌지 싶어서 걱정하고 있었어.>
‘하긴. 이 녀석 성격에 불안해하면서 답장만 기다렸겠군.’
룬은 모코지석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걱정할 일 전혀 없었어. 그보다, 조만간 다시 그쪽으로 가게 될 것 같아.>
룬은 <저주받은 던전>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같이 가게 될 페르디키온에 대해 일러주었다.
아멜리아가 마음의 준비를 해 둬야 인사할 때 또 도망가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 그분이 말로만 듣던 불의 일족 예비 장로인 거구나.>
<응. 함께 <저주받은 던전>을 같이 깨러 갈 테니까. 놀라지 말라고 미리 말 해두는 거야.>
<응, 알고 있을게.>
‘돌아오는 답장이 영 느린데. 부담스러워서 손이라도 떨고 있는 건 아니겠지.’
누군가와 제대로 대화를 해보기는커녕, 편지 한 장 써 본 적 없는 아멜리아라면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음 말은 룬의 예상을 벗어났다.
<룬은…… 그분이랑 친해?>
‘?’
굳이 물어보는 아멜리아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걸로 봐선 농담처럼 넘기면 안 될 질문 같았으므로, 룬은 나름대로 고민하다가 천천히 글자를 적었다.
<나랑 의형제기도 하고, 잘 대해줘. 친하다고 할 수 있지.>
<아……. 그렇구나.>
또 한참동안 말이 없나 싶더니, 전혀 다른 느낌의 문장이 돌아왔다.
<나도 친해?>
‘아하. 그런 거였나.’
룬은 그제야 아멜리아의 심리를 짐작했다.
‘남자애들끼리만 친하면 혼자 소외감을 느낄 수 있지. 안 그래도 대화가 편한 대상이 나나 흑미 정도인데, 혼자 지낸 기간이 길었던 녀석이니 부담스러웠나 보군.’
룬은 최대한 중립적으로 대답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골랐다.
<물론이지.>
<그렇구나.>
빠르게 온 답장 탓인지 굉장히 기뻐하는 것 같았다.
룬은 속으로 다시 혼자가 되는 느낌이 영 싫어서 그런 모양이라 여겼다.
‘다행히 이번에 가는 인원이 다양하니 별 문제는 없겠지.’
북적거리는 분위기 속이라면 아멜리아도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을 터였다.
심지어 던전 공략이 목표인 이상, 사실 친목에 대한 부담은 내려도 될 상황이었다.
<나, 열심히 준비할게. 룬이 부끄러워지지 않게 노력할게!>
‘뭘……?’
어떤 노력하겠다는 건지 전혀 모를 일이었으나, 아마 던전 공략에 대한 준비인 모양이라 여긴 룬은 적당히 대꾸하고 다음 화제로 말을 넘겼다.
<써보니까 어때. 모코지석. 혹시 사용하는 데 어려움은 없어?>
<응. 말보다 이걸 이용하면 더 잘 전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다행이네.>
다행히 문자로 대화하는 건 편한 모양이었다.
룬은 처음 만날 때 얼굴 드러내는 것도 엄청난 용기를 내야 했던 아멜리아를 떠올렸다.
얼른 해치우자
‘미리 말은 해 두었다만 과연 페르디키온을 두고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렵군.’
듀라한 때는 룬이 옆에 있어서인지 이전보다 나은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좋고 싫음이 바로 보이는 편인 페르디키온의 눈치를 과하게 보지는 않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시간에 바뀔 부분은 아니지. 이번 여정으로 둘이 적당히 친분이 생기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면 후에 직접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모코지방이라도 만들어 친분을 유지하기만 해도 이득이라 여겼다.
<그러고 보니 네게 얻기만 한 것 같아. 뭔가 나도 뭔가 보답하고 싶은데…….>
그가 고민하는 동안 또 다른 글자가 위로 떠올랐다.
안 그래도 룬은 아멜리아를 통해 물의 인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슬그머니 운을 띄웠다.
<정 그렇다면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으응, 어떤 부탁이야?>
청아한 푸른 문장이 떠오르는 걸 본 룬이 잠깐 손을 멈추었다 단번에 써내려갔다.
<이번 <저주받은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나에게 물의 인장을 주면 좋겠어.>
던전에서 제대로 보상을 받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지만, 같은 블루 드래곤이 아닌 룬에게 쉽게 허용할 일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거절하는 기미가 보이면 설득할 내용은 이미 룬의 머릿속에 있었다.
모코지석이 잠잠해지더니, 한참 뒤에 글자가 떠올랐다.
<네가 필요로 한다면 얼마든지.>
의외의 허락에 룬은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정말?>
<응. 룬은 내 부모님을 구해준 걸. 게다가 정식으로 부모님에게 의뢰받았다고 들었어. <저주받은 던전>의 어둠을 완전히 걷어주기로 했다고.>
‘알고 있었군.’
의뢰에 대해 아는 건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룬은 순순히 긍정했다.
<어둠의 힘을 완전히 걷어내고 원래의 던전으로 되돌리면 결국 우리에게 더 좋은 일이라는 걸 알아. 만약 네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물의 일족의 삶을 이어갈 수 없었을 거야.>
<저주받은 던전>으로 불리는 물의 레어 던전의 원래 이름은 <파도의 던전>이었다.
어둠과 저주에 물들어 본래 모습을 잃어버린 장소는 물의 일족이 정화해 되돌린다 해도 수백 년 걸릴 일이었다.
하지만 룬이 직접 가서 어둠과 저주, 독을 해결해 준다면 즉시 원래의 던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물의 인장은 이미 나에게 있어.>
<그게 정말이야?>
<응……. <저주받은 던전> 특성 때문에라도 룬에게 꼭 필요하다는 게 물의 일족 대표인 나와 부모님의 생각이야. 그리고.>
이야기하기 조금 어려웠는지, 올라오는 글자가 느렸다.
하지만 무기력 속에서 감당 못 할 힘을 안고 버티던 아이라 믿기지 않는 차분함이 묻어있었다.
<있지, 우리 부모님은 어둠과 저주를 감당하기로 하시면서, 어쩌면 나를 두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대.>
아멜리아의 부모가 훌륭한 <정화> 언령 능력을 키워낸 아멜리아를 장로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했다는 점.
그리고, 지금은 회복 중이지만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은 그들 대신 임시로 물의 일족 장으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물의 인장을 받았다는 말이 이어졌다.
‘이건 예상 못 한 호재로군.’
룬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모코지석의 글자가 마저 떠올랐다.
<마침 크리스티나 님께서 와주셨고, 그분의 보조 덕분에 안전하게 인장을 이어받았어. 그리고 나는 물의 일족의 예비 장로로서, 네게 물의 인장을 줄 거야. 어둠의 일족에게 도움을 받은 은혜에 보답할 의무가 있으니까.>
얼마 전까지 룬의 얼굴만 봐도 눈을 피하던 인어 꼬마가 제법 어엿하게 굴었다.
<고마워, 아멜리아.>
<나는 룬 덕분에 부모를 구했는걸.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줬어. 물의 인장은 내가 받은 것에 비하면 그리 대단하지 않아.>
이어진 말에 호의가 가득했다.
<그럼 가기 전에 한 번 더 연락할게.>
<응. 기다리고 있을게.>
룬은 흐뭇하게 마무리된 아멜리아와의 대화를 빠져나가 이제껏 미루었던 목록 하나를 지긋하게 노려보았다.
‘이제 이놈 하나 남았나.’
모코지석을 건드리자 가장 많은 부재중 문자를 남겼으나, 이제까지 확인을 미뤘던 제드의 메시지가 끝없이 위로 쌓여있었다.
답이 없어도, 아예 보지 않아도 쉬는 날 한번 없이 잡다한 이야기를 남긴 모콕 내용을 흐린 눈으로 본 룬은 고개를 흔들었다.
‘얼른 해치우자. 이놈만 처리하면 끝이니까.’
룬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제드. 뭐하냐.>
기다렸다는 듯 빠른 답장이 돌아왔다.
<룬 님! 아이고, 이게 얼마만이랍니까? 해도 진짜 너무하시네요! 제가 룬님의 답장만 기다리며 얼마나 애가 탔는데요! 위에 제가 보낸 말은 다 보신 거겠죠!? 그간 제 연구와 고뇌가 점철된 글을 보시고 안타까움을 느끼셨을 거 압니다. 이게 눈물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심정이 담겨있거든요! 이 노고를 룬 님께서 알아주시기만을 간절히 바랐는데 어찌 주군이라는 분께서 한번 들여다 봐주시지를 않으시다니. 이 충복을 그만 내치시는 건 아닐까 마음 졸이고 살았답니다! 그래도 믿고 기다리니 이리 알아봐 주시니 얼마나 안심인지. 이 제드는 정말이지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요!>
‘이 자식……. 한 번에 올릴 수 있는 최대 마력 글자수가 늘었잖아.’
벌써부터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이상한 불호 요소를 추가하는 데에 재능 낭비하는 꼴이 심히 고통스러웠으나 다음 문장도 저만큼 써내려가고 있을 제드의 손가락부터 멈추게 해야했다.
<주지 말까?>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룬 님.>
뭘 줄지 적지도 않았는데 급격하게 공손해진 제드.
꼭 옆구리 한번 찔러놔야 대화가 가능한 놈이었다.
‘솔직한 놈 같으니.’
드디어 조용해진 모코지석 위에 룬은 천천히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너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하냐?>
일전에 심해 필드와 던전 재료를 원하는 녀석에게 ‘실력을 올려둬라’라는 말을 남긴 걸 바로 떠올린 제드가 아는 척을 했다.
<물론입니다! 보시다 시피, 이번에 모코지석에 뜨는 부재중에 남길 수 있는 문자의 길이를 훨씬 길게 바꿔놨습죠! 매일 아침마다 남긴 제 업적 이야기는 그냥 남긴 게 아니었거든요!>
‘나름 실험이었다는 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끝없이 적혀있던 시시콜콜한 잡답은 제드의 연구 자료였다.
심지어 룬의 명령대로 성과를 올린 건 맞기에 그만두라 할 수도 없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굉장한 이점이기까지 했다.
<거, 인간계에 있는 자들 중에 글자를 모르거나 쓸 수 없는 이들도 꽤 있더라고요. 그래서 조만간 글자만이 아닌, 간단한 그림이나 선 정도는 올릴 수 있게 만들 생각입니다요. 게다가 심해의 재료를 다룰 수 있도록 머스킷 상회를 통해 수 속성 마법석을 구해 다들 연구했습죠.>
<그렇군. 잘하고 있었네.>
‘상점을 하나 만든다고는 들었는데, 마법석을 구할 정도면 제법 괜찮은 상회가 된 모양이군.’
게다가 마력석을 다룬다는 건 제드의 개인 실력도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뜻이었다.
들을수록 성과가 제법 괜찮았다.
틈을 놓치지 않고 <죽을 만큼 노력했다구요, 룬 님!> 이라는 말은 반쯤 진심이리라 평가한 룬은 그럭저럭 합격점을 주기로 했다.
<수고했어. 약속대로 심해 필드에서 나온 몬스터 부산물을 보내주마. 장비 제작과 연구에 쓰도록 해. 흑미를 통해 보낼 테니 거기서 암시장 물건 구매비용도 충당하고.>
<히익! 대체 얼마나 주시려고요!?>
<네 녀석이 보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주저앉을 수도 있어.>
<예? 제가 그 정도로 감탄할 정도의 물건이라니. 솔직히 인간 세상에 나와 보니 꽤나 놀라운 물건도 많이 봐서 예전의 제드를 생각하시면 좀 섭섭한데 말이죠!>
<농담 아니다.>
제드는 갑자기 한참동안 조용하더니 급히 적은 듯한 짧은 답문이 올라왔다.
<감사합니다. ㅈ>
‘이 녀석, 신나게 썼다가 열심히 지우고 보냈군.’
제드의 성격은 이미 파악 완료된 룬이었다.
좀 전까지 ‘서운하다.’를 어마어마하게 늘여 보내던 놈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손에 들어올 던전 부산물을 탐욕스럽게 상상하고 있을지. 아주 눈에 선했다.
‘흥분해서 파라리엄을 흔들면서 또 불쇼를 하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주는 재료는 공짜가 아니다.
룬은 용건을 꺼냈다.
<네가 만들어줬으면 하는 게 있다. 꽤 중요하니까 잘 만들어줘야 해. 물건을 보고 앞으로도 더 줘야 할지 고려해 보지.>
<룬 님께서 그 정도로 말씀하시는데 당연히 그래야죠! 자자, 말씀만 해보십쇼. 뭡니까?>
<흑미를 통해 전할 테니 일단 만들어 봐.>
지금 말했다간 제드 녀석이 직접 만들어서 던전에 가고 싶다고 시끄럽게 굴 테니, 흑미를 통해 전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거부는 못 할 테지. 이번에 보내는 물품을 보면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만들어 내려 할 테니.’
의뢰 물품의 까다로움을 해결하는 건 그가 아니었다.
룬은 제드의 탐욕과 야망을 이용하기로 했던 지난날의 그를 칭찬했다.
‘그 물건만 만들어지면 <저주받은 던전>에 갈 준비는 얼추 끝나겠어.’
룬은 속셈을 숨기고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
다음 날, 겨우 회복된 몸으로 새벽 훈련을 다녀온 룬은 녹초가 되어 침대 위에 쓰러졌다.
지치긴 하지만 하루하루 보람차기도 했다.
‘대응 능력도 많이 좋아졌군. 이젠 두세 시간만 쉬어도 충분해.’
종일 앓던 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모처럼 점심식사를 하러 응접실로 이동하자 마법으로 음식 접시를 옮기던 크리스티나가 맞이해주었다.
“어머, 룬. 벌써 깬 거니?”
“으응.”
피곤한 눈으로 대꾸하고 자리에 앉은 룬과, 대체 무슨 수련을 한 건지 머리털이 파마머리가 된 백야.
그런 백야를 안고 온 흑미가 보였다.
‘녀석들도 피곤해 보이네.’
잠투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흑미와, 졸음에 겨워 눈을 반만 뜨고 끔뻑이는 백야.
겉으로는 엄격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멍한 시선을 두는 페르디키온까지.
가르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니, 그도 못지않게 피곤한 모양이었다.
그들을 본 크리스티나가 안쓰러운 듯 미소 지으며 음식을 권했다.
“다들 고생이 많구나. 얼른 먹자꾸나.”
실력 향상을 위해 노력한 이들을 위해 신경 쓴 티가 났다.
구운 아몬드를 뿌리고 라임 향을 낸 생선 스테이크.
생 모차렐라 치즈처럼 찢기는 촉촉한 흰 생선살은 맛이 일품이었다.
거기에, 룬이 크리스티나가 떠날 때 부탁했던 심해 깊은 곳에서 공수해 온 심해 크랩이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붉은색을 띠고 식탁 위에 올라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