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귀여워 룬, 어쩜 이렇게 귀엽지?’라고 한 게 틀림없었다.
룬은 스크롤 제작에서 귀여운 점이 뭔지 알 수 없었기에 의문을 가졌다.
‘두 번이나 말한 걸 착각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럼……. 드래곤에게 이 정도 능력은 귀여운 축이란 말인가.’
미진한 능력에 대한 감상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크리스티나에게 전승받은 지식 내에서, 이만한 성취를 이룬 해츨링은 없다고 알았건만.
하기사 다시 보니, 본체인 해츨링의 모습으로 그려서인지 그림이 영 어설펐다.
아무래도 성체인 크리스티나가 보기에 많이 미욱해 보인 모양이라 여긴 룬은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니 페르디키온 것도 줘 보자.’
룬은 꼬리를 슬슬 흔들며 걸어가 레몬 아이스티를 마시던 페르디키온에게도 양피지 한 장을 내밀었다.
[가져. 이건 형 거야.]
“뭐?”
페르디키온은 아이스티를 뿜을 기세였다.
얼떨떨해져선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양피지를 받아 펼친 그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붉은색과 주홍색 물감으로 그려진 몸체에 동글동글하고 작은 해츨링.
입을 벌리고 불을 뿜고 있는 걸 보아, 불을 다루는 특징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한동안 침묵한 불의 예비 장로가 입을 열었다.
“그림 실력이 상당하군, 룬. 베르딘에게 일러 괜찮은 액자를 만들게 해야겠어. 이건 잘 보관토록 하마.”
표정이 영 좋지 않다고 생각했건만, 생각보다 반응은 꽤 좋았다.
‘이게 귀하다는 걸 알아본 모양이군. 보관만 해선 소용없으니 사용법만 제대로 알려주면 되겠어.’
[보관할 필요는 없고, 찢거나 시동어를 말해서 사용하면 돼.]
“……지금 나더러 이걸 찢으라고 했냐?”
룬은 올바른 사용법을 알려줬는데 되레 화를 내는 페르디키온을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어쩌란 거야.’
페르디키온은 룬의 표정을 보더니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 아니. 아우님에게 이런 걸 받다니 무척 기쁘군. 정말 고맙다, 룬.”
화냈다가 급히 칭찬으로 말을 바꾸는 게 살짝 걸렸다.
어쨌거나, 언령으로 만들어진 노래를 자유자재로 부르는 페르디키온이었다.
결과적으로 물건 자체는 문제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가 보기에는 그저 귀여운 능력에 속한다라.’
그는 능력을 너무 과신했다는 사실을 깔끔하게 인정했다.
‘역시, 아직은 좀 더 실력을 키워야 하는 거군.’
칫, 하고 속으로 혀를 찬 그는 준비해 온 스크롤을 흑미에게 건넸다.
어쨌든 준비해 온 걸 굳이 안 줄 이유는 없었다.
“우와. 우와아! 이거 흑미죠?”
[맞아. 담긴 마법은 ‘안개비’고.]
아직 어린 흑미에게 적당히 가지고 놀 만한 종류로 만들어 주려고 나름 고민해서 담은 마법이었다.
혹시라도 흑미가 다루는 불의 정령들이 화재라도 낸다면 물 관련 마법을 쓸 수 없는 흑미로서는 곤란해질 수 있어 준비한 스크롤이었다.
‘안개비 정도면 딱 좋지.’
티타임을 좋아하는 크리스티나에게는 공기를 정화시키는 스크롤, 페르디키온에게는 1회용 방어 마법이 담긴 스크롤이었다.
설명을 들은 이들이 그림을 다시 살피는 동안 룬은 쿠키 접시에 담긴 버터 쿠키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어머나. 그러고 보니……. 네가 그림을 그려준 것도 기쁘지만, 스크롤 제작이 제법 정교하구나.”
[음. 그렇게 말 해줘서 고마워.]
‘10살짜리 해츨링이 제작한 것치곤, 이겠지만.’
룬의 생각을 읽은 듯 눈을 마주친 크리스티나가 상냥하게 웃어보였다.
“이 그림은 잘 간직할게. 정말 멋진 선물이었단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감사를 건네자 룬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페르디키온 역시 그림을 품에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나 역시, 무척 감격스럽다. 아우에게 이런 걸 받다니 생각지도 못했군.”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유용하게 쓰이면 좋겠어, 형.]
“절대 안 쓴다! 내가…… 이런 걸 어떻게 쓰겠나.”
‘성능은 인정하는데, 절대로 쓰지 않겠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이유를 고민한 룬은 나름대로 납득할 만한 가설을 떠올렸다.
‘1회용 방패 스크롤이 취향이 아니었나보군. 생각해 보면 저 녀석, 방어보단 공격에 치중한 전투를 즐기는 듯했으니까.’
상대의 전투 특성과 상반되는 걸 준 탓이라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아무리 좋은 걸 줘도 사용자와 상성이 안 맞는 걸 줬다면 쓸 일이 없을 테니.
룬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 실수로군. 방패를 쓰지 않는 녀석에게 굳이 방패 스크롤을 만들어 주다니.’
심지어 룬에게 형으로서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여긴 페르디키온이었다.
지금은 1회 무효화에 대한 쓸모를 아는 룬이지만, 이무기일 적 도움은커녕 ‘무효 마법 부적 하나쯤 있으면 좋다.’고 말해 주었다면?
신수 이무기로서 가진 능력으로 충분한데, 번거롭기만 한 부적을 쓰겠냐며 기가 막혀 했을 터였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 나 역시 전생에 1회짜리 방어막을 준다면 큰 감흥이 없었을 텐데.’
한편, 룬을 지켜보던 크리스티나가 그림을 갈무리하고 걱정스레 물어왔다.
“룬, <저주받은 던전>에 정말 너희끼리만 갈 셈이니?”
[응.]
크리스티나는 <저주받은 던전>에 함께 하고 싶어 했으나, 그건 룬을 더 곤란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물의 일족이 말해 준 던전의 특징 탓이었다.
예전 <파도의 던전>은 가장 기여도가 높고 강한 자에게 최종 보상이 귀속되었다.
<저주받은 던전>으로 변질된 이상,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올 보상은 분명 룬이 가진 속성과 관계되었을 터였다.
즉, 룬이 가장 높은 기여도를 달성하여 직접 얻는 것이 가장 좋았다.
하지만 크리스티나가 함께 갔다간 아무리 룬이 활약해도 가장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없었다.
‘정식으로 블루 드래곤의 의뢰를 수행하는 거니, 그 정도 보상은 받아야지.’
페르디키온과 아멜리아도 가능한 룬을 서포터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기로 합의했다.
흑미와 듀라한은 룬의 권속이므로, 그들의 활약은 룬의 지배력에 대한 증명이 되어주고 기여도를 올려줄 터.
다들 모르지만 룬에게는 언령의 힘까지 있었으니 크리스티나만 빼면 보상을 받는 데 문제가 없었다.
어둠의 힘에, 물의 인장까지 받고 시작하는 공략.
최종 클리어 보상을 받는 건 확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차하면, 스크롤까지 사용하면 되고.’
내심 자신만만한 룬과 달리,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염려 섞인 목소리였다.
“네 의지는 알겠다만, 여러모로 아쉽구나. 걱정도 되고.”
[나 역시 어둠 일족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당하진 않을 거야. 이걸 위해 그동안 많은 것을 가르쳐 줬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웃으며 여유 있게 대꾸하자 페르디키온도 말을 거들었다.
“아우는 제가 따라가 잘 보호할 겁니다. 게다가.”
잠깐 말을 멈춘 그가 제법 진지하게 의견을 덧붙였다.
“이번 건은 룬이 어둠의 일족 예비 장로로서 정식으로 의뢰 받은 일입니다. 무작정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페르디키온이 룬을 돌아보았다.
“잘 할 수 있을 거다. 그렇지 않나, 아우님?”
[물론.]
룬의 거침없는 대답에도 크리스티나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그러나 결론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그래. <어둠의 인장>이 걸린 일이니, 어리더라도 룬의 선택이 우선이어야겠지.”
물의 일족에게 맡겨진 어둠 일족의 힘은 영역의 3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아멜리아, 그리고 그녀의 부모. 그리고 필드와 던전.
어둠의 핵심이자 정수라 할 수 있는 힘의 대부분은 아멜리아에게.
저주와 독의 핵심은 그녀의 부모가.
마지막으로 그들이 감당하지 못한 힘은 자체가 필드와 던전에 스며들어 있었다.
환장할 노릇이네
필드의 힘은 아멜리아의 정화 작업을 거들며 흡수했고 아멜리아 부모의 저주와 독의 핵심도 룬의 것이 되었다.
이제 <저주받은 던전>에 남아있는 어둠과 저주만 거두면 <어둠의 인장>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인장은 어둠 일족 예비 장로의 필수 조건.
룬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크리스티나만이 아닌 누구도, 룬이 어리다는 이유로.
보호해야한다는 명목으로 막아서는 일만큼은 없어야 했다.
너는 어리니까 어른들이 알아서 해주마.
그 말을 다른 드래곤들, 장로들이 하며 끼어들 틈을 줄 수 없었다.
아이의 의지를 시험하며 가혹한 수업을 통해 룬이 사사로운 말이라도 ‘그만 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도록 해 봤지만…….
룬은 절대로 그 말을 하지 않았으니, 이젠 믿어주는 일이 최선이었다.
“할 수 없구나. 응원할게, 룬.”
룬은 씨익 웃어보였다.
[잘 하고 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모습은 어린 해츨링이라 보기엔 어딘지 모르게 어른스러워서, 정말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 설득력이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아직 조건을 완벽하게 달성한 건 아니야. 알고 있지?”
‘칫.’
분위기에 묻어 은근슬쩍 허락 받으려 했던 룬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다만,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보니 생각보다 걱정을 덜어낸 게 눈에 띄었다.
며칠 뒤, 크리스티나는 ‘던전 공략에 나서도 좋다.’는 허락과 함께 수업 종료를 알렸다.
그리고 룬은 제드에게 다녀온 흑미를 통해 큼직한 통을 받아들었다.
“제드 아저씨가 만드느라 힘들었다고 꼭 전해달래요!”
“그래.”
안 그래도 모코지석에는 제드의 문자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룬은 오랜만에 모코지석을 작동시키고, 제일 마지막 문자만 확인했다.
<룬 님! 그거 제가 진짜 열심히 만든 겁니다! 아셨죠! 돌아 오셔서 어떻게 되었는지 말씀 바로 해주시깁니다! 문제나 불만도 환영이니 꼭입니다, 네!?>
녀석은 처절했다.
흑미에게 해양 몬스터의 부산물과 진주 마력석을 건네받은 그날, 제드는 하루 종일 모코지석을 불태울 기세로 문자를 보내왔다.
게다가 룬의 목적지인 던전에 대해 흑미에게 이것저것 캐묻더니, 함께 던전에 가지 못하는 걸로 갖은 통곡과 애원이 담긴 문자를 또 일주일 동안 보냈다.
글자만 보는데 바짓가랑이 잡고 안 놓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굳이 대답 안 해도 상관없겠지. 다녀와서 적당히 추려 보내면 될 일이니까.’
당일인 오늘까지도 던전에 가고 싶다며 몸이 달아있었지만, 룬은 그 모든 문자와 부탁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는 마력 열쇠를 손 안에 들고 일행들을 돌아 보았다.
“다들 준비됐지?”
“네!”
“삐잇!”
“그래.”
철컥! 철컥!
그들의 호기심과 약간의 긴장 속에서 룬은 물의 일족이 사는 레어로 가기 위해 <마력 열쇠>를 사용했다.
허공에 생긴 통로를 지나며 페르디키온은 연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흑미는 폴짝 거리며 백야를 머리에 이고 가뿐하게 달려갔고, 가장 후미에는 일행을 지키듯 듀라한이 따라왔다.
저 멀리,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지만 푸른 물빛이 연하게 비치는 심해로 가는 입구.
스노우볼이 반짝이는 곳 앞에 사파이어 색 눈을 한 인어가 처음 보는 금빛 보석을 단 진주 목걸이를 하고서 창을 들고 그들을 맞이했다.
“어, 어서…… 와. 룬. 흑미도.”
아멜리아는 인어의 모습으로, 전음이 아닌 자신의 입을 통해 제대로 인사를 했다.
룬이 기억하는 아멜리아는, 인어의 모습으로 전음으로만 말을 했었다.
‘페르디키온을 본다고 나름 노력한 건가?’
힐끗, 페르디키온을 본 아멜리아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는 걸 보니 그를 의식한 게 틀림없었다.
“와, 아멜리아 언니! 오랜만이에요!”
해사하게 두 팔을 벌려 아멜리아의 발치에 달려가 붙은 흑미의 머리를 살포시 쓰다듬어준 아멜리아가 고개를 들어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그, 그리고…… 어, 저. 환영……합니다.”
“……페르디키온이라고 한다.”
“네, 저어, 는……물의 일족, 예비…… 장로예요. 아, 아멜리아, 라고 불러……주세요.”
성격은 완전히 다른 둘이었지만, 여기까지 봐선 무난한 인사였다.
‘좀 걱정은 했다만. 생각보다 괜찮은데.’
창을 꼭 쥔 손이 불안해 보이기는 했으나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페르디키온 역시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는 눈이 영 호감을 가진 제스처는 아니지만 적어도 아멜리아 일가가 룬을 이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깔고 가던 것치곤 무난한 대응이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저, 그…… 물의 레어……는, 처, 처음이고, 자, 잘…… 모르실 테,니. 뭐, 뭔가 궁,금한…….”
“됐어. 어차피 물의 영역을 되찾은 지 얼마 안됐다고 들었다.”
페르디키온이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하, 하고 미간을 구겼다.
“역시……. 급조된 예비 장로가 뭔가를 제대로 해 놨을 리 없지. 레어 상태만 봐도 알겠군.”
“아……. 하, 하지만…… 도움,이 되……려고. 노력을…….”
“노력?”
그 말에 페르디키온은 입속말로 ‘쯧.’하고 혀를 차더니 말했다.
“대체 뭘 노력해 왔다는 거지? 말로 노력했다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장로를 결과를 내야하는 법. 책임 없는 지배자야말로 가장 무능해. 이런 것도 가르쳐줘야 하다니.”
“…….”
인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앞에 선 붉은 머리 소년은 팔짱을 끼고 한심하다는 얼굴로 말을 맺었다.
“내 아우에게 물의 인장을 주고 던전 공략부터 시작하지.”
아멜리아가 순간 가운데 미간을 움찔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룬조차 이마를 탁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페르디키온의 말이 아멜리아에겐 안 좋게 들린 건 확실했다.
결국 아멜리아가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어깨를 잔뜩 굳혔다.
“저, 저기!”
“뭐지.”
“마, 말씀이…… 너무, 거칠어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조, 조금만 더 예의있……게 말해 주면 좋겠……어요.”
그 말에 페르디키온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차마 한소리 하려는 것까지는 참고 있지만 당장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에 아멜리아가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 쪽이…… 하,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