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한소리 하려던 게 분명했지만, 미간을 구긴 페르디키온은 어떻게든 참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미 아멜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심지어 물빛 소녀는 그 이후로 입술을 꾹 깨물며 침묵하고 말았다.
그 꼴을 보고 있던 룬은 긴 한숨을 삼켰다.
‘환장할 노릇이네.’
둘 다 애들이다.
심지어 소통을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미성숙한 녀석들.
페르디키온의 나이가 더 많다고는 하지만, 둘의 나이 차는 고작해야 100년 정도로 인간으로 치면 둘은 연년생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한쪽 편들어서 좋을 게 없을 거라 생각해 잠시 두고 봤더니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음장이 되어갔다.
룬은 중재에 들어갔다.
“잠깐만, 둘 다 나 좀 봐.”
둘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아멜리아에게 먼저 질문했다.
“아멜리아. 페르디키온 형의 말투가 어떻게 거칠었다는 거야?”
슬그머니 눈치를 본 아멜리아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내, 내가…… 부족한…… 건 사, 사실이야. 그……래도, 부,끄럽지 않도록……노, 노력해, 했는데. 너, 무…… 직설적으로, 말해서.”
페르디키온의 눈이 대번에 휘는 걸 본 룬은, 그가 뭔가 이야기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그럼 형은 하려던 말이 뭐였어?”
“별로 말하고 싶지도 않군.”
룬의 질문에 페르디키온을 주시하고 있던 아멜리아의 표정에 금이 갔다.
그에 휘둘리지 않고 룬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하려다가 안 하는 건 오해를 사게 만들잖아. 형님이 오해받는 채로 던전 공략팀이 되었다간 문제가 생길수도 있고. 나도 그런 건 바라지 않는걸.”
룬이 물끄러미 시선을 마주쳐오자, 페르디키온이 못 이긴 척 입을 열었다.
“물의 일족 예비 장로라면 나와 같은 위치지. 그런데, 당장 이 주변의 레어 상태를 봐라. 관리자로서 한 게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손님과 대등하게 말을 섞기조차 힘들어하지. 레어의 주인이 될 자가 목소리까지 떨면서 억지로 대화를 이어가는 꼴을 보니 답답했을 뿐이다. 어차피 네게 물의 인장을 주고 던전을 공략하는 게 목적이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 성격 꼬인 녀석이, 요즘 괜찮다싶더니 갑자기 왜 이러냐.’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암담했다.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데, 페르디키온의 말이 이어졌다.
“애초에 아우님 도움 없이는 자신의 영역을 제대로 건사하지도 못하는 마당에 무슨 도움을 주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급한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는 자에게 얼른 권한을 넘겨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집중하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야.”
“그……!”
대꾸 하려던 아멜리아의 얼굴이 상기되며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갑자기 치고 올라오는 감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할지 몰라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도움을, 받는 입장이라 해도…… 지, 진심 어린 말……과, 감사를, 존중을…… 나누지 않는, 자와…… 있고 싶, 지는 않……아요. 어, 어떻게, 상냥한 룬이……당신 같은 자와, 친해지……게 된 거죠?”
그 말에 페르디키온이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난 충분히 배려했다고 보는데. 왜 내 아우의 지인이라는 자에게 그런 무례한 말을 들어야 하지?”
룬은 그제야 그가 간과한 제일 중요한 문제를 깨달았다.
‘이 녀석들……. 서로 맞는 게 하나도 없어.’
심지어 자라온 환경도, 사고방식도 다른 데다, 룬 말고 대등한 존재와 제대로 대화해 본 경험이 없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분위기라는 게 있는 법.
역량 부족한 자가 같은 장로 후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페르디키온.
초면에 자연스럽게 말하지 못한다고 인사를 잘라낸 덕에 불편한 기분을 느낀 아멜리아.
그런 와중에 다짜고짜 일족의 인장부터 넘기라는 식의 말까지.
아멜리아가 느낀 불편함은 이제 무뢰한을 대하는 지경까지 왔다.
한편 페르디키온은 그 나름대로 답답해했다.
장로라면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알아야 했다.
도움 받을 수 있다면 빠른 해결을 위해 움직여야 할 터.
해야 할 일이 명확한데, 공사 구분하지 못하는 행동이 눈에 차지 않았다.
인사조차 어려운 그녀가 굳이 말을 이어가려는 게 미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해서, 어차피 겉치레인 인사를 빠르게 생략하고 가장 중요한 본론을 꺼냈더니 존중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들어 불쾌해진 것이다.
룬은 그가 이해한 둘의 사정을 말로 풀어 주며 다독였다.
“아멜리아, 형님은 대화가 불편하다면 거추장스러운 인사는 생략해도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어 했어. 효율을 추구하고 싶다는 이야기지, 너를 무시하고 싶어 한 건 아니야.”
침울한 표정이 된 아멜리아가 창을 쥔 손을 늘어뜨렸다.
해냈다.
“하지만…… 루, 룬의 의형제라……고, 해서. 제대로, 인사……하려 노력했, 는데. 무시하니까…….”
“그래. 서운했을 수는 있겠다 싶어. 속상하겠지. 다만, 형님이 네 노력을 무시하려고 그런 건 정말 아니야. 오히려 빠르게 도움을 줄 생각이었던 거지.”
아멜리아는 풀이 죽은 얼굴로 어깨를 추욱 떨어뜨렸다.
이어서, 룬은 페르디키온을 달랬다.
“형. 형이 보기에 마음에 차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멜리아는 물의 일족 예비 장로로서 처음 만나는 불의 일족의 장로인 형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노력한 거야. 형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으니까 말이야.”
페르디키온은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눈으로 룬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룬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기 위해 노력하며 설명을 마무리했다.
“각자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뿐이야.”
룬은 순하게 웃는 얼굴로 둘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둘 다 나한테 고마운 이들이야. 내 소중한 형이고 누나인데, 싸우지 마.”
‘좀 오글거리지만…… 애들이라고 두고 보다간 죽도 밥도 안 될 거야.’
속에서야 닭살이, 아니 비늘이 다 돋을 지경이었지만 당장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라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서로의 생각과 고집이 아무리 강해도 무해한 어린 생명체의 부탁에 못 이기는 척이라도 마음을 풀 수는 있을 터.
그들보다 어린 해츨링의 다독임에 아멜리아와 페르디키온은 둘 다 서로 쳐다보다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돌겠군.’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때.
“둘 다 이거 봐요!”
흑미가 듀라한과 함께 품에서 간식을 잔뜩 안고 다가왔다.
다양한 컵케이크와 푸딩, 초콜릿이 가득 담긴 사탕 바구니가 흑미의 얼굴을 가렸다가, 바구니를 살짝 내리자 웃는 흑미의 얼굴이 드러났다.
“움- 기분 나쁠 때는요. 흑미는, 나쁜 기분이 드는 게 싫어서 행복해질 수 있는 걸 해요. 비밀인데, 언니랑 페르디키온 님한테 특별히 알려줄게요!”
꿈뻑.
힛, 하고 웃은 흑미가 페르디키온과 아멜리아를 번갈아 올려다보더니, 간식 바구니에서 노란 레몬 타르트를 꺼내 아멜리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어서 딸기와 생크림이 가득 담긴 미니 컵케이크를 페르디키온의 손에 쥐여 주었다.
“페르디키온 님은 레몬 쉬폰을 좋아해요. 레몬 아이스티랑 레몬 타르트도요! 아멜리아 언니는 폭신폭신한 딸기생크림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먹을 때 행복해하구요.”
물빛 시선과 붉은 시선이 서로를 봤다가, 이내 손 위에 올려 진 레몬타르트와 딸기 생크림 컵케이크를 향했다.
“으음, 행복을 주는 존재가 되면요. 왠지 흑미도 행복해져요.”
간식이 올려진 아멜리아와 페르디키온의 손을 하나씩 잡아 끈 흑미가 헤헤, 하고 웃어보였다.
“이렇게 눈앞의 상대를 보구, 제대로 말해주는 거예요. 언니에게, 페르디키온 님에게 행복을 주고 싶다구요.”
어떠한 계산도, 사심도 없는 천진난만한 말에 날 서 있던 분위기가 조금씩 옅어져갔다.
흑미의 손에 이끌려 서로 레몬타르트와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교환하게 된 둘은 기대로 반짝이는 흑미의 눈을 외면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저는요, 누군가 흑미 때문에 행복하지 못했다면 무척 슬프고 속상할 거예요. 근데 가끔 그런 날이 있으면, 물어봐야 돼요. 어떻게 하면 네가 행복할 수 있어? 라구요.”
흑미가 주머니에서 달콤한 향이 나는 사과 파이를 꺼내들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먼저 한 입 베어 물었다.
“언니랑 페르디키온 님도 먹어봐요! 만약 이거 먹고도 속상하다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지, 흑미도 같이 고민해 볼게요!”
“…….”
“흐, 흑미야…….”
어쩔 줄 몰라하는 아멜리아가 컵케이크를 손안에 살포시 쥐었다.
“쳇.”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혀를 찬 페르디키온은 손에 올려진 레몬타르트를 입 안에 베어 물었다.
아멜리아가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자, 그는 미미하게 미간을 구겼다.
“쪽팔리니까 그만 봐라. 이 녀석들 앞에서 예비 장로답지 않게 추태를 부릴 셈인가.”
“……!”
그제야 아멜리아도 고작 10살 남짓한 해츨링인 룬과 순수한 흑미가 가장 연장자일 페르디키온과 아멜리아를 말리는 상황이 부끄러워졌다.
룬과 흑미를 번갈아 본 아멜리아가 손에 쥐어진 딸기 컵케이크를 조심스럽게 베어물었다.
“고, 고마워…… 흑미야.”
“천만에요!”
흑미는 룬을 살짝 돌아보더니 윙크했다.
그리고 입모양으로만 말하고 헤실 웃어보였다.
‘저 잘했죠!’
애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마시면 안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 같아도, 의외로 알 건 다 아는 게 아이들이니까.
‘잘했다.’
룬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흑미는 기분 좋아져서는 까르르 웃으며 페르디키온과 아멜리아 옆에서 재잘거렸다.
룬은 흑미의 분위기에 휩쓸려 소강상태에 들어간 둘을 보고 안도했다.
‘갈 길이 멀군. 그래도 흑미가 잘 나서줬어.’
룬은 그들이 간식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서로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지만, 머쓱한 분위기가 서로에게 세운 날을 누그러뜨렸다.
‘슬슬 화제를 돌려볼까.’
룬은 일부러 쿠키 하나를 꺼내 그들과 함께 먹고는, 가벼운 감탄을 터트렸다.
“마력 음식이라 그런가, 기운 나네.”
“맞아요! 흑미도 막막 뛰고 싶어요! 던전에 가면 신나게 놀 거예요!”
입가에 슈크림을 묻힌 흑미가 기대 어린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가기 전에 물의 인장부터 받아야 하는데. 아멜리아, 부탁해도 돼?”
“으, 응! 크리스티나 님……의 축복, 이 있으……니까. 나, 할 수 있어.”
아멜리아가 목에 걸린 노란 마법석 목걸이를 쥐었다.
‘과연. 이미 못 올 걸 예상하고 아멜리아에게 빛의 힘이 담긴 마력석을 줬었군.’
다행히도 물은 어둠과 호환이 제법 잘 되는 편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직접 자리하지 않아도 충분히 인장을 흡수할 수 있을 만큼.
“힘,의 기류에…… 휩쓸리면, 아, 안 되니까. 다들…… 물러나요.”
아멜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의 이들이 안전하게 물러난 걸 확인하고 룬을 바라보았다.
“준비……됐지?”
“응.”
제법 넓은 터에 룬과 둘이 남게 되자, 인어는 목에 걸고 있던 진주알과 금빛 마력석으로 된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파앗!
손 틈으로 새어나오는 골드 드래곤이 남긴 금빛은, 은은한 축복을 흩뿌렸다.
빛의 입자들은 마치 심해 속에서 빛나는 별 같았다.
“보, 보조해……줘. 라멜.”
끼육!
퐁, 하고 그녀의 눈앞에 물방울 뭉치는 소리가 나며 일전에 보았던 거대한 돌고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한 빛을 품은 돌고래는 아멜리아를 수호하듯, 바로 옆에서 룬을 바라보았다.
돌고래는 룬을 보며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곤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 싱거운 놈.’
그는 물의 인장을 받을 준비를 하며 호흡을 골랐다.
아멜리아가 축복이 가득 담긴 목걸이를 두 손에 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어 들리지 않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돌고래가 호응하듯 주둥이를 열고, 그들만의 음파를 냈다.
가사가 들리지 않으며, 그저 기묘한 울림으로 켜켜이 쌓아가는 인어와 돌고래의 노래.
그들만의 합창에 맞춰 주변의 바닷물이 굽이치기 시작했다.
쏴아아-
쏴아-
심해 속에서 일으킨 파도가 주변을 서서히 맴돌더니, 강하게 회오리치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정수리 꼭대기에만 쭈뼛 서는 느낌이 묘했다.
소용돌이의 중심은 점점 고요해져 갔다.
크리스티나의 축복이 담긴 옐로다이아가 등대의 불빛처럼 진한 개나리색과 병아리색 빛을 번갈아가며 흘리더니, 눈부시게 터졌다.
화앗!
흘러나온 반짝임이 별자리를 만들 듯 맴돌았다.
모든 빛이 자리를 잡자, 정교한 빛의 마법진이 바닥에 깔렸다.
마법진의 문양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서서히 맴돌았다.
힘의 조율과 안정을 돕는 빛 속에서 물은 살아있는 듯 넘실거렸다.
눈을 감은 아멜리아의 손끝이 자유롭게 물을 지휘했다.
그 모습은 물의 여제의 강림처럼 위엄이 엿보였다.
자유롭게 휘몰아치던 반짝이는 물보라가 아멜리아의 음파와 빛을 타고 목걸이 위에서 인장을 그렸다.
‘이것이 물의 인장.’
장엄한 바다. 마을의 우물. 고즈넉한 호수, 외진 곳의 작은 실개울 하나까지.
물의 맥을 잇는 모든 힘이 주먹만 한 문양 안에서 약동했다.
가만히 그를 보던 룬은 손을 뻗어 인장을 움켜쥐었다.
쿠르륵!
격렬한 물소리와 함께 물의 기운은 순식간에 그의 손에서 몸 안으로 빨려들었다.
‘! 확실히, 꽤 버겁다.’
불의 인장을 흡수할 때는 크리스티나의 완벽한 보조를 받아 지금보다 약한 상태의 룬도 버틸만했다.
그러나 지금은 물이 지닌 생동감이 전신을 내달려 조금만 정신을 놓아도 그대로 휩쓸릴 것 같았다.
룬은 한 호흡씩 삼키며 마구 돌아다니는 물의 기운을 감각으로 쫒았다.
그를 해할 느낌은 아니다.
단지, 룬의 몸 속 여기저기를 마음껏 흐르며 자신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 같았다.
‘아멜리아와는 딴 판인 힘이로군.’
“후우.”
“루, 룬…….”
걱정스럽게 불러오는 아멜리아가 창과 목걸이를 두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쥐었다.
평범한 존재였다면 이 힘에 먹힐지도 모르지만, 룬은 속으로 웃었다.
‘상대를 잘못 잡았어.’
그가 지닌 어둠이 물의 힘을 제어하고, 룬의 의지가 물의 마력을 잡아 이끌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속성을 다스리는 자.
이전에도 그랬고 현 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네 주인은 이제 나야.’
그의 내면에서 성난 바다가 폭포수처럼 한꺼번에 룬을 덮쳤다.
쨍!
“앗……! 루, 룬! 괜찮아?”
크리스티나의 힘이 담겼던 목걸이가 부서졌다.
제어가 끊어진 아멜리아가 충격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룬의 상태를 살폈다.
멍하니 허공 뜬 작은 소년의 머리카락이 해류의 흐름에 이리저리 흩뜨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