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242)

덜컥 겁이 난 아멜리아가 눈가를 바르르 떨었다.

‘설마, 잘못 된 건 아니지? 룬.’

아멜리아는 불안한 생각이 들어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물의 인장을 받는 데 실패한 이들이 결말이 하나씩 생각났다.

그들 대부분은 물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사망하거나, 끔찍한 결과를 맞았다.

혹은, 물의 마력에 삼켜져 바다와 하나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괜찮을 거야. 그렇지, 응?’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길어 숨이 막혔다.

어딘지 모르게 초점 없는 시선으로 고개를 든 룬.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으로 창을 꽉 쥐었다.

아멜리아는 룬의 붉은 눈이 순간 차가운 푸른 눈으로 바뀌는 걸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끔뻑였다.

다시 보니 룬의 눈은 붉은 색 그대로였다.

푸른색으로 보였던 이유는 그 너머에 담긴 물의 너울거림이, 푸른 파도가 붉은 눈 안에서 넘실거렸기 때문이었다.

“해, 해냈어!”

기뻐하는 아멜리아에게 피식 웃어 보인 룬은 손을 저어 주변의 소용돌이를 잠잠하게 만들었다.

“룬! 무사한 거냐!”

“룬 님! 룬 니임!”

“삐이! 삐잇!”

거대한 소용돌이가 사라지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있던 페르디키온과 흑미, 듀라한과 백야가 달려왔다.

그들을 돌아 본 룬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해냈다.”

두려워 할 필요 없게

붉은 시선이 차분히 그들을 향했다.

물의 기운을 완벽히 제 것으로 만드니, 심해가 룬에게 경배하는 듯했다.

그 순간, 물의 인장의 효과가 눈앞에 떠올랐다.

<물의 인장> (귀속)

- 블루 드래곤의 증표를 받아들여 생성됨.

- 효과:

* 몸이 물에 해를 당하지 않게 된다.

* 물에서 활동하는 데에 제약이 없어진다.

* 물/얼음 속성 친화력을 크게 올려준다.

※ 특이사항 : 물의 인장을 획득한 다른 대상을 살해했을 시 페널티 발생.

‘이걸로 내 권속들도 물의 힘에 대항 저항력이 많이 늘겠지.’

이번에도 추가된 능력이 있었다.

* 불과 어둠과 물이 결합되어 새로운 속성 조합을 획득했다!

‘호오.’

룬은 손 안에 불길을 일으켜보았다.

붉게 타오르던 불은 어두운 흑염(黑炎)으로 휘감겼다가, 이내 차가운 청염(靑炎)으로 변했다.

‘이런 느낌이군.’

이번에는 어둠을 메인으로 불과 물의 기운을 조합하자, 검은 그림자와 연기가 물이 흐르듯 손 안에서 흘러나왔다.

어둠 속에 있어도 유황불에 탈 것만 같은 상태로 만들 수 있었다.

또, 어둠이 담긴 얼음을 생성시킬 수도 있었다.

바다에 어둠만 가득 담아내어 사해(死海)를 만들어 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훨씬 온건한 쪽에 쓸 수야 있겠지만 위험한 능력임에는 분명했다.

‘뭐랄까. 지옥도를 만들기 좋은 능력이란 생각이 먼저 드는군.’

대략적인 감을 익힌 그는 아멜리아가 그를 보는 시선을 알아채고 힘을 거둬들였다.

“이제 됐어. 고생했어, 아멜리아.”

“으……응.”

안도 때문에 긴장이 풀린 아멜리아가 돌고래 정령 라멜에게 몸을 기대었다.

“룬 님!”

토도도도.

제일 먼저 달려오는 흑미를 본 룬은 미간을 움찔 했다.

“뭐냐? 그건.”

“룬 님이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고 나서 갑자기 생겼어요!”

흑미의 주변에는 불의 조각과 물방울이 퐁퐁 떠올라 맴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얘들이 엄청 난리예요. 차가운 물 기운 때문에 깜짝 놀랐나 봐요.”

흑미는 목에 달린 붉은 루비 브로치를 두 손에 담아 내밀었다.

상황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불에 기운 못지않은 강한 물의 기운을 다룰 수 있게 되어서 그럴 거야. 하필 불과 물은 상극이기도 하니까.”

“앗! 그렇구나. 그럼 흑미가 놀라지 않게 잘 달래줄게요.”

흑미가 브로치 속 불의 정령들을 내려다보고 무어라 중얼거리는 사이, 룬은 듀라한을 살폈다.

희한하게도, 듀라한은 겉으로 봤을 때 딱히 달라진 점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은 다르지만.’

룬은 듀라한의 상태를 살폈다.

<이름 : 데스 나이트 듀라한>

- 사자(死者)였던 그의 이름은 잊혀졌다.

- 종족 : 언데드&정령

- 부화조건 : 강력한 죽음의 기사 듀라한의 갑옷과 원한 깊은 초인(超人)의 혼의 연성에 성공 할 시 희박한 확률로 탄생한다.

- 어둠을 따르는 정령기사.

※ 특이사항 :

희박한 확률로 불사조의 깃을 품고 감정의 씨앗을 얻었다.

성장의 경험에 따라 성향이 변화한다.

- 룬 이클립스(Lune Eclipse)에게 귀속

- 서번트(Servant) 화 완료.

- 성향 : 충직한, 음울한

▲ 울부짖음 주의 ▲

거기에, 설명이 더 추가 되어 있었다.

- 물과 불과의 친화력을 얻음.

- 죽음의 기운을 지닌 자임에도 자연계 정령들에게 외면받지 않게 되었다.

물과의 친화력이 올라간 룬도 변화를 느꼈다.

물의 흐름은 장난스러웠으나 때론 자장가처럼 속삭였다.

그리곤 그의 피부를 가볍게 건드려 다정한 느낌을 남기고 흘러갔다.

‘이게 친화력의 힘이군.’

이 같은 감각이 듀라한에게 새로 추가되었다는 건 생각보다 놀라운 일이었다.

사자(死者). 그리고 언데드인 그에게 ‘감각’을 느끼게 만든다는 뜻이니.

‘잘 됐군. 마침 마력 요리를 통해 힘을 흡수하던 녀석이니 불과 물에서 새로운 감각을 느낀다면, 더 강해지겠지.’

듀라한은 오른손 주먹을 한번 움켜쥐어보며 친화력이 주는 느낌에 푹 잠긴 눈치였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건 룬뿐이었다.

“라멜!”

끼윳!

아멜리아의 부름에 힘차게 꼬리치기를 하며 다가온 돌고래가 그녀의 몸 주변을 돌며 눈을 반짝였다.

“우, 우리를……<저주받은 던전>으로 데려……다 줘.”

끼윳.

돌고래 정령인 라멜은 다른 일행들을 슥 보더니 몸을 두어 차례 흔들었다.

아무리 봐도 ‘싫다.’는 몸짓이었다.

“그러……지 말, 구. 응?”

뀨웃. 뀨뀻.

라멜을 달래는 아멜리아를 본 페르디키온이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었다.

“제 수족조차 다루지 못해서야 어떻게 장로가 되겠다고.”

자제한다고 작게 중얼거린 모양이지만, 안 들렸을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멜리아는 이미 단어 몇 개를 듣고 어깨를 움찔 굳히더니 페르디키온을 흘겨보았다.

“형.”

‘이 자식이, 안 좋은 버릇 자꾸 튀어나오네.’

룬이 눈치껏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페르디키온도 분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지 미간을 찌푸렸으나 고개를 돌려 무시했다.

‘이렇게까지 둘이 안 맞을 일인가?’

실제로 단어 한두 개 정도로 추궁해봐야 이득 없는 싸움만 날 테니 참은 거겠지만, 아멜리아도 페르디키온을 의식적으로 무시하려는 듯 아예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 이제…… 됐어……. 다, 들 라멜의 드, 등에…… 타면 돼.”

라멜을 다시 설득해 일행들을 안내하기 시작한 아멜리아.

일행과 함께 룬은 라멜을 타고 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멜리아가 홀로 아픔을 감추고 살아왔던 여리고 섬세한 쪽이라면, 페르디키온은 고통과 역경이 닥쳤을 때 스스로 헤쳐 나갈 강함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쪽.

누가 더 옳고, 그르다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둘 다 그 차이를 가진 자와 소통할 줄 모른다는 점이 문제였다.

‘애들이니 그냥 둘까 했지만, 자연스럽게 서로 알아가기엔 시간이 없어.’

억지로 친하게 만들어 봐야 역효과가 날 터.

자연스럽게 함께 말을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둘 다 같은 해츨링을 만난 것도 처음이고, 성격마저 상극이었다.

‘적어도, 둘이 같은 가치관을 가질 만한 점이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게 뭐가 있을까.’

기존의 가치를 바꾸는 건 쉽지 않았다.

특히 드래곤이라면 더욱 그렇다.

‘던전을 깨면서 방법을 생각해봐야겠군.’

우선은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 <저주받은 던전> 공략이 우선이었다.

다다르기도 전에 새까맣게 오염된 어둠과 저주가 그들 주변에 가득 차올랐다.

돌고래 정령과 아멜리아가 두려움에 움츠러들 때.

“멈추지 마.”

룬은 어둠의 힘이 들어간 물의 막을 주변에 둘렀다.

질서 없이 퍼진 저주와 어둠이 막 위를 깎아 낼 듯 에워쌌으나, 이내 힘없이 흩어졌다.

주변에 깔린 저주는 룬이 다스리는 어둠 앞에 바스라지고 막은 손상하나 없이 멀쩡했다.

“길을 두려워 할 필요 없게 해줄게.”

차분한 시선을 한 룬이 엉망으로 얽히고설킨 풍경 너머를 바라보았다.

차갑고, 음울하게 번져 나오는 고독.

그보다 두렵고, 성난 파도가 몰아치는 곳.

검은 입을 벌린 심해 동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깜짝 놀라며 탄식을 흘렸다.

“이……상해. 워, 원래, 는……물의 시, 신전…… 입구,가 있어야 하……는데.”

본래 있어야 할 하얗고 투명한, 물빛이 감도는 정화의 기운이 넘실대는 신전은 온데간데없었다.

남은 건 무너진 신전의 잔해와, 안쪽에 새까만 불길함을 머금은 해저 동굴.

주변을 돌아본 일행은 입구로 추정되는 구덩이로 내려갔다.

퀴퀴한 독 기운과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하고 무거운 느낌이 그들의 몸을 짓눌러오기 시작했다.

“아멜리아. 정화 언령을 써줘.”

“으, 응!”

아멜리아가 창을 곧게 세워들었다.

돌고래 위에 선 그녀는 심호흡을 하더니 고요한 집중 속에서 힘을 끌어냈다.

“<정화하라!>”

파앗!

맑은 기운이 아멜리아의 몸에서 퍼져나갔다.

부랑자처럼 뒹굴던 어둠이 무언가에 쫓기듯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으나, 언령의 힘이 미치지 않는 범위 밖에서 그들을 둘러쌌다.

‘언령의 힘으로는 겨우 쫓는 정도군. 물의 일족의 힘만으로 던전을 되찾기란 불가능했겠어.’

룬은 이 사실을 아멜리아의 부모도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했다.

그는 남 모르게 한쪽 입 꼬리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블루 드래곤들이 물의 인장을 너무 순순히 허락한다 했어.’

물의 일족이 호의적이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생각처럼 ‘보답’이란 순진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이대로 던전에 머금어진 어둠에 완전히 물들면 원래의 <파도의 던전>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어찌어찌 버틴다해도 어린 룬이 장성하여 조금이라도 영악해지면, 혹은 삿된 마음이라도 먹었다간?

그들은 영영 그들의 영역인 던전을 고스란히 어둠 일족에게 내어줘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느니, 룬이 그들을 배신할 수 없도록 ‘물의 인장’을 주고 물의 일족을 돕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지극히 어른스러운 계산과 판단에 룬은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아멜리아가 직접 나서서 도움을 주는 이상 일족을 대표하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인 셈이긴 하지.’

룬은 주머니에서 새까만 진주알을 꺼냈다.

“이, 이게…… 뭐야?”

“얼마 전에 크리스티나를 통해 진주와 대왕조개 몬스터를 보내줬잖아? 덕분에 만든 아뮬렛이야.”

“신기……해. 이렇, 게…… 까만 진주……는 처, 처음 봐.”

흑진주.

어둠에 물든 진주는 그 자체로 훌륭한 마력도구였다.

이젠 물의 기운까지 다스릴 수 있게 된 룬이 즉석해서 물 속성 관련 능력까지 부여해 일행들에게 나눠주었다.

다들 무척 놀란 눈을 했는데, 룬이 인위적으로 만들기 전에는 이 세상에는 흑진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과 어둠을 약간 조정할 수 있어. 가지고 있으면 여러모로 편할 거고, 어디에 있는지 추적 가능해.”

흑진주를 쥐고 어둠을 조정하기만 해도 아멜리아의 정화능력과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언제 이런 걸 준비한 거냐?”

“며칠 전에 아멜리아를 통해 진주를 받았거든. 어둠은 물속성과 호환이 좋으니 한번 시도해 봤지.”

페르디키온은 힐끗 아멜리아를 봤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픽 웃으며 생각했다.

‘내 레어에서 나는 드워프들의 무구와 불의 마력석에 비하면 한참은 부족하군.’

어깨가 으쓱 올라간 페르디키온을 보며 룬은 염려섞인 시선을 던졌다.

‘너무 오만해지진 않아야 할 텐데. 불의 능력이 주력인 녀석에겐 힘든 던전인 건 마찬가지니.’

룬은 진주의 힘을 이용해 끈쩍하게 덩어리 진 어둠을 조정했다.

다른 일행들에게도 사용감을 익히게 한 룬은 재차 잃어버리지 말라며 당부해뒀다.

‘스크롤 연습하는 김에 해 본 건데, 생각보다 쓸모 있겠어.’

전생의 부적과 비슷한 느낌으로 만들었더니, 지니고만 있어도 어둠을 다스리는 룬의 기운이 담겨 어둠과 저주, 독에 의해 해를 당하지 않는 효과가 있었다.

만약의 경우, 흑진주의 힘이 페르디키온에게 도움이 되리라.

‘제일 걱정스러운 녀석이 어째 제일 자신 있어 보이긴 하다만.’

어찌 보면 한결같은 것이 페르디키온다웠다.

마음에 들었을까

던전 깊은 곳에 도달하자마자 그 효과를 실감한 일행들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와! 되게 퀴퀴하고 독한 느낌인데 숨 쉬는 게 불편하지 않아요!”

“부, 불쾌한……곳인데, 도. 독이, 다가오지……는, 못, 못하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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