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242)

불기운이 어린 검을 꺼내 든 페르디키온의 말에 다들 기척에 감각을 곤두세웠다.

타각! 끼익.

찰그랑.

딱딱하고 자잘한 것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녹슨 냄새와 철기구 휘두르는 소리를 듣고 룬은 그들의 정체를 파악해냈다.

‘뼈. 녹슨 철장기. 죽음의 냄새.’

“해적 스켈레톤이야. 죽여도 죽지 않는 자들.”

즉시 페르디키온이 먼저 앞에 섰고, 룬의 눈짓을 받은 듀라한이 옆에 나란히 섰다.

“맡겨둬라.”

철컥!

한 손에 붉은 화염을 일으킨 페르디키온의 눈이 무감각하게 다가오는 그림자를 주시했다.

물의 기운과 저주의 힘이 가득한 장소에서도 페르디키온은 제 힘을 발휘하는 데 거침없었다.

“부름에 응하라. 홍염과 청염이여.”

화르륵!

페르디키온의 검이 푸른 불꽃에 휘감기고, 검 표면이 닿은 바닷물이 끓었다.

자글거리는 소리를 뿜는 것도 잠시, 페르디키온의 신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촤악!

가장 앞 열에 서 있던 스켈레톤 다섯이 검을 든 채로 동작이 멈추더니 푸른 불길에 싸여 뼈부터 녹아내렸다.

하지만 축축한 어둠 탓에, 불은 서서히 사그러들었다.

무너져 내리던 스켈레톤 하나가 페르디키온의 안면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

펑!

페르디키온이 붉은 불을 쥐고 있던 주먹을 뻗어 스켈레톤 얼굴을 쥐고 홍염을 터트렸다.

새까맣게 타 바스러진 해골이 그대로 무너졌다.

그 틈을 타, 듀라한이 뒷 열에 뛰어들었다.

콰작!

그는 등에 지고 있던 거대한 해머 손잡이를 잡고 스켈레톤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뼈는 가루와 조그마한 잔해로 변해 해류에 쓸려 사라졌다.

주변의 다른 스켈레톤들이 전부 듀라한에게 달려들어 어두운 강철 팔에 매달리고 다리를 깨물었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잔뜩 달리자, 듀라한의 흉부가 훅 올라왔다.

“다들 귀 막아.”

룬이 그렇게 말 하며 귀를 막자, 이미 경험이 있던 다른 이들이 재빨리 귀를 움켜쥐었다.

“페르디키온 님! 귀! 귀!”

싸움에 익숙한 페르디키온은 다행히 빠르게 귀를 막았다.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내지르는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크워어어어어억!!

솜털이 쭈뼛 설만큼 무시무시한 파멸의 복성이 터져 나왔다.

몬스터들의 시선이 듀라한에게 집중 된 걸 확인한 룬이 손을 뻗었다.

‘내 차례군.’

“오랜 시간 버려진 힘들이여. 너희의 주인에게로 돌아오라.”

몬스터 사이사이에 스며있는 어둠, 저주가 해골의 틈을 비집고 나와 룬에게 빨려 들어갔다.

해골은 그대로 무너져 아무 힘도 없는 뼛조각으로 변했다.

그때였다.

[왔어!]

소름끼치도록 차갑고 스산한 목소리가 들린 직후.

쿠르릉!

“캬앙!”

“삐!”

“꺄악! 라, 라멜!”

끼유육! 뀨뀨욱!

“젠장! 비행마법이 안 듣는다!”

구덩이가 무너지고 바닥이 꺼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움직이려 몸부림치는 라멜과 백야의 저항과 비행마법조차 소용없이, 그들의 몸은 끝없이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미간을 찌푸린 룬이 꼭 알아야 할 말부터 남겼다.

“다들, 진주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가지고 있어.”

누구보다 어둠이란 속성에 익숙한 룬은 이 뒤에 이어질 상황까지 자연스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어둠의 가장 밑바닥인가.’

심연에서 부르는 어둠의 소리.

그 기척.

오랫동안 룬을 기다려왔고, 그를 증오해온 어둠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그들을 삼켰다.

갑자기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늘 같은 어둠.

오감이 어지러워지고 손을 뻗고 있는지, 걷고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장소였다.

룬은 몸을 바로 세웠다.

시간의 감각조차 없는 이 느낌을, 룬은 이미 알고 있었다.

산 자라면 느낄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멈추는 감각.

‘죽었을 때나 느껴봤던 건데.’

룬은 내부에서 뛰는 물과 불, 어둠이 힘을 느끼고 진짜로 죽은 게 아님을 확신했다.

천천히 주위를 살폈으나 다른 기척은 없었다.

‘녀석들도 상황은 비슷하겠지.’

그는 다른 이들에 대해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아멜리아는 어둠에 대한 면역이 있다. 흑미도 적응력이 좋은 편이지. 듀라한은 죽음 그 자체에서 태어난 녀석이니 문제없을 테고, 불사조 새끼인 백야 녀석은 죽음에 가장 완벽한 면역이 있어.’

룬은 생각 끝에 우선 순위를 정했다.

‘가장 먼저 찾아야 할 녀석은 페르디키온이겠군.’

룬은 흑진주를 꺼내 힘을 발동시켰다.

그 순간, 진주는 더욱 불길한 기운에 덮였다.

‘누가 있군.’

룬이 진주를 든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순순히 나와.”

키득.

작게 들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안개가 어리듯 모습을 드러난 이는 창백한 하얀 피부에 은발을 가진 반 곱슬이 길게 내려진 자였다.

얼핏 보기엔 요요한 분위기를 지닌 손바닥만 한 작은 여식이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그녀는 룬을 보며 탁한 은색 눈을 반들거렸다.

“원래 던전의 주인일 리는 없고, 누구냐?”

무심하게 묻는 그의 앞에 떠있는 여성이 겨울 바람 같은 숨결을 내쉬며 말했다.

[난. 깊은 밤의 요정.]

우아했으나 서늘한 울림이 귓가를 맴돌았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존재.]

[죽음. 끝없는 어둠.]

공중에 떠 있던 여자가 천천히 룬의 앞으로 내려왔다.

[기다렸어.]

하얀 손이 룬을 향해 뻗어졌다.

[마음에 들었을까. 내 초대.]

“초대?”

의아함과 불편함 섞인 시선이 가감 없이 작은 요정을 향했다.

그러나, 요정은 아무렇지 않게 손끝을 들어 룬의 손을 가리켰다.

[이 곳으로 이끈. 힘.]

룬은 손을 들었다.

그리고, 문득 스친 생각에 요정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걸 말하는 거냐.”

룬의 손 안에서 <마력 열쇠>가 떠올랐다.

요정은 눈을 반짝이더니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내 길. 힘과. 이어졌어.]

‘그런가. 이 열쇠가 뭔지 감이 오는군.’

열쇠를 다시 손 안에 갈무리 해 두며, 그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나와 같이 온 다른 녀석들은?”

[헤매는 중.]

“그 녀석들을 찾아야 해. 알려주든가, 길을 열어.”

그 순간, 무표정한 얼굴이 된 요정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 녀석들하고 이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갈 거다. 우리는 여기에 잠시 들른 것뿐이니까.”

[‘우리’를 두고?]

‘우리?’

복수형의 지칭에 반사적으로 룬의 기감이 날카로워졌다.

감지한 결과, 어둠 전체가 그의 앞에 선 요정과 하나임을 눈치챘다.

‘어둠에서 태어난 인격인가.’

어둠 일족의 힘은 죽음과 가까우니, 오랫동안 산 자가 오지 못한 폐가나 마찬가지였을 터.

그런 장소에는 산 자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가 깃들곤 했다.

상황을 파악하는 룬을 뚫어지게 쳐다본 요정이 마른 손을 양 쪽으로 펼쳤다.

[갈 수 없어. 못가.]

갑자기 룬의 몸 주변으로 어둠이 밀집되는 기분이었다.

좀 더 답답하고, 뭉쳐진 진흙 속에 갇힌 듯 숨이 가빠졌다.

정령은 아련한 노래 한 소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누구도 반기지 않는. 우리, 어둠과 죽음. 가까이에 있지만, 환영받지 못해. 결코. 왜?]

음침하게도, 구슬프게도, 아름답게도 드는 매혹적인 노래.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이 룬을 감쌌지만, 그는 천천히 자신의 마력을 운영하며 그를 걷어냈다.

“그게 맞는 거다. 죽음으로 삶에서 도망치는 자들이 있는 것 보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세상이 훨씬 나으니까.”

룬은 정령을 본 순간부터 묘한 기괴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어리게도, 젊게도. 어딘지 시간을 빗겨간 듯 보이는 이 정령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 기괴함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든 이길 수 없는 존재를 두려워하게 마련이야. 죽음만이 그런 건 아니지. 그보다 훨씬 사소하고 가벼운 일도 다들 기피하며 살아.”

내일 꾸지람을 할 윗사람이 두려운 자.

미래의 자신이 어찌 될지조차 알 수 없어 불안에 떠는 자들.

전쟁 한가운데에서 죽지 못할 삶을 살아야 하는 약자들.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진흙탕에 내 던져진 무력한 자들.

수많은 불합리 속에서 이길 수 없는 것들을 거부하고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생을 살고자 하는 자들의 본능이었다.

“많은 자들은 죽음으로 인해 무언가를 잃는 걸 견딜 수 없어 한다. 힘들고 지친 삶을 이어가는 자들은 이대로 살다 죽게 되지는 않을까, 더 나아지는 날은 있을까 생각하며 인생의 허망함을 겪기도 하지.”

더는 기회가 없는 아쉬움.

행복한 삶을 함께한 이들을 영영 떠나야만 하는 슬픔.

혹은 죽은 뒤, 현생에서 누리던 영화를 버리고 심판을 받게 될 죄인들.

그 모든 이들이 ‘죽음’을 슬퍼하고, 또 두려워했다.

룬은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근데…… 생각해 봐라. 살아있는 자들이 죽음을 반길 세상은 얼마나 끔찍해질지.”

어둠속을 걷는 이라면 한번 쯤 생각했을 일이었다.

정령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둠과 죽음만이 가득한 이 공간이 바로 그 답이었다.

“산 자가 삶을 도외시하고 죽음을 더 원하게 된다면, 그 세상이야말로 지옥이라는 소리다.”

‘그리고 그 끝은 이런 모습이겠고.’

마지막 말은 삼켰으나, 그를 주시하는 정령의 시선에서 같은 생각을 했음을 느꼈다.

[영원히, 홀로.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것이, 우리……?]

답답하게 조여 왔던 어둠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룬은 심호흡을 하며 말을 이었다.

“딱히 위로가 되라는 소린 아니다만, 가끔은 물불을 안 가리는 자들도 있다. ‘죽음’ 자체가 두렵지 않는 자들. 때때로 죽음을 초월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말이지.”

정령뿐만이 아니라, 이 공간 전체에 대고 말해주듯 룬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있어? 그런 자가.]

“있다. 내가 직접 보기도 했지.”

‘전생의 날 죽였던 그 미친놈. 죽음 따위는 씹어 먹던 놈이었지.’

무언가 생각하는지, 더 이상 대답은 없었다.

룬은 이 틈을 타 제 할 말을 꺼냈다.

“이야기는 충분히 한 것 같으니 이제는 내 용건을 꺼내볼까 싶은데.”

[……?]

한 손을 든 룬이 선언했다.

“이 어둠, 이젠 내가 전부 가져가야겠다.”

스슷.

요정의 의지를 따르던 어둠이 강제적인 권능에 의해 룬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웃기지마! 안 돼!]

“원래 내 힘이다. 어떻게 인격체가 존재하게 된 건지야 모르겠다만.”

물의 던전에 스며든 어둠에 인격체가 생성된 것.

그게 이 요정의 정체였다.

‘마치 오래된 물건에 깃든 령(靈)과 같다. 오랫동안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걸 풀어주면 사라질까 했더니 아닌 모양이군.’

요정은 빠져나가는 힘을 쥐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어둠은 룬의 부름을 따라 그에게 깃들어갔다.

[꺄아아악!]

찢어질 듯 터져 나온 요정의 절규.

힘뿐만 아니라 정신체마저 뒤틀리는 느낌을 견디지 못하고 절규는 더욱 고통스럽게 울렸다.

모를 줄 알았냐

[사라지는 건! 안 돼! 이대로!]

‘한이 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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