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울릴 정도로 저항하며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귀 고막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내가 숨긴, 네 친구들! 못 찾아! 숨길 거야!]
그녀의 눈이 뾰족하게 변하며,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어둠을 모두 회수하고 나면 숨긴 공간까지도 룬의 지배하에 있으므로, 시간이 조금 걸릴지언정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터였다.
“보따리 주인한테 다 내놓고 가라는 식이네. 그런 협박은 통할 상대한테나 해.”
[협박 아냐! 하자. 나랑. 거래.]
“굳이? 수상한 거래를 내가 왜.”
‘퇴마 하루 이틀 해보는 것도 아니고.’
이미 반절 이상 어둠을 흡수한 룬이 아쉬울 일은 없었다.
정령도 그를 눈치채고 표독스러운 시선을 떨면서도 얼른 말을 덧붙였다.
[나. 도울게. 네 것으로 만들어. 이 곳. 물의 영역.]
“뭐?”
요정은 힘이 약해지자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작아졌다간 소멸할 위기를 맞게 될 지경에 이르자, 요정의 말은 더욱 다급해졌다.
[오래전부터 어둠에 잠긴. 이 곳. 더 없이. 만족스러울 거야!]
“그러니까……. 나보고 물의 일족의 레어를 점령하라는 소리야?”
현재 블루 드래곤의 레어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겨우 정화시킨 블루 드래곤의 레어는 룬이 회수한 어둠을 다시 풀기만 해도 금세 점령될 터였다.
아직 회복이 필요한 아멜리아의 부모들은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정령은 룬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좋지. 좋지? 삼아버려. 여기. 네 레어로. 그러면, 구할 수도 있어. 네 친구들.]
키득거리며 떠 있는 요정을 보며 룬은 무심히 대꾸했다.
“관심 없어.”
[거짓말. 힘. 가지고 싶어 해. 다른 이들. 구하고 싶어 해.]
“그렇기는 하지.”
순순히 인정한 룬은 품에서 흑진주를 꺼내들었다.
룬의 힘이 깃든 아뮬렛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애들도 찾을 수 있고, 여길 내 걸로 만드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서.”
[그, 그럴 리. 없어!]
불길함을 느낀 정령은 얼마 남지 않은 어둠을 적대적으로 뿜어대며 물러섰다.
룬은 정령에게 피식 웃어 보이고 손바닥 위에 어둠이 깃든 흑진주를 올렸다.
“살고 싶다면 알아서 들어와야 할걸.”
룬은 다시 어둠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마치 물이 빠져나가듯 어둑한 기운이 룬에게 빠르게 몰려들었다.
[끼야악!]
순식간에 어둠이 고갈되자, 정령의 몸이 점차 쪼그라들었다.
작고 작아져 흑진주 알보다 조금 큰 정도나 되었을 때.
[사라져 가! 싫어!]
숨이 막힌 정령이 흑진주 안으로 뛰어들었다.
기운을 모두 흡수한 룬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좀 살겠네.’
갑갑하게 느껴졌던 공간이 이젠 쾌적하게 느껴졌다.
[여기, 나 답답해! 답답해!]
“거슬린다. 조용히 해.”
모기처럼 엥알거리는 소리에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흑진주 안의 정령은 잔뜩 골이 난 듯 꽤액 소리 질렀다.
[복수. 할 거야!]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룬은 진주알을 움켜쥐고 위 아래로 빠르게 흔들었다.
[꺄아악! 그만! 그만!]
안에서 새된 비명과 온갖 저주의 말이 튀어나왔다.
자비는 없었다. 룬은 여유롭게 사방으로 구슬을 흔들었다.
[그, 그만! 복수, 안 해!]
“어쩔까. 그 말을 믿어도 될지 모르겠는데.”
[꺄악! 안 할게. 안 해. 살려줘!]
마음 같아서는 봐주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기절이라도 하면 귀찮은 일이었다.
룬은 몇 번 더 요정의 항복 선언을 듣고 흔들던 손을 멈췄다.
“자. 엄청 어지럽겠지만 정신 차리고. 당장 내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아, 악마! 악마!]
“흔들까?”
[……할게! 할게!]
“좋아. 우선은 일단 빨간 머리에 화가 좀 있는……. 아니, 불 기운 가득한 녀석부터 찾아.”
씩씩거리며 흑진주가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룬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쓸모를 다 하면 승천시키든가 해야지 원. 경험상 이런 괜한 원한 가진 녀석 남겼다가 귀찮아지곤 하니까.’
속마음을 감춘 룬은 손에 쥔 검은 진주가 향하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요정도 속내가 따로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까만 진주 속에서 씩씩대며,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은 독기를 품은 채 분을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나쁜 놈. 요정을 이런 식으로 취급했겠다! 두고 봐!’
룬의 충고는 듣기 싫은 잔소리에 불과했으므로, 귓등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원래 어둠의 힘은 룬의 것이었음에도, 요정은 원래 제 것이었던 양 화를 냈다.
그래봐야 룬의 상대조차 될 수 없었다.
[길, 여기.]
“그쪽이 확실해?”
[그래! 이쪽…… 칵!]
산소처럼 있던 어둠이 쪽 빨려나가는 통에 요정은 목을 쥐고 헐떡였다.
룬이 몇 초 후 다시 어둠의 힘을 채워주자, 그녀는 헐떡이며 룬을 노려보았다.
[왜! 왜 그래?]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려 들었잖아. 모를 줄 알았냐.”
진주 안에서 요정이 분으로 얼굴을 구겼다.
[어떻게?]
“그걸 알려줄 정도로 친절하게 대할 이유가 있을까?”
잔뜩 골이 난 요정은 씩씩대며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룬이 일행을 만나지 못하게 엉망으로 길안내를 하려 든 요정.
대비가 없었다면 요정의 말만 믿고 시간을 지체했을 터였다.
요정으로서는 질 나쁜 장난이겠지만 룬에게는 일행들의 위기를 초래하는 짓거리였다.
일말의 측은지심조차 없어진 룬은 표독스러운 재촉에 감흥 없이 대꾸했다.
“너 내가 어떤 존재인지 진짜 모르는 모양인데, 고약한 심보 때문에 내 일행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너도 무사하진 못할걸.”
[…….]
인상을 잔뜩 구긴 요정이 고개를 팩 돌리더니 발로 구슬벽을 차댔다.
“안내.”
[……해! 한다구!]
“그래.”
어깨를 으쓱이며 한 손을 흔들어 준 룬을 노려보던 요정은 진주와 함께 앞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각자 진주들을 잘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사실, 그는 일행이 지닌 흑진주의 방향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요정만이 걷는 길을 룬이 전부 파악할 수는 없지만, 방향이 틀린 경우는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게다가 요정을 품은 흑진주는 룬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요정의 의도가 훤히 보였다.
한 마디로, 룬의 흑진주에 갇힌 순간부터 요정은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이를 모르는 요정은 룬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결국 제대로 길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흑미랑 듀라한은 내가 소환해 주면 될 일이고.’
어둠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그들에게는 오히려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익힐 좋은 경험이 될 터였다.
다만 페르디키온은 약간 걱정이 되었다.
‘빛 한 줌 없는 이런 곳은 익숙하지 않을 녀석인데.’
빛과 친화력이 높은 불속성은 아무래도 어둠과 적대하게 되면 가장 곤혹을 치를 가능성이 높았다.
하물며 이렇게 주변이 암흑으로 꽉 들어차 있어서야, 물과 어둠에 불이 봉인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물의 던전 안이라 상성이 최악이야.’
물과 어둠속에 갇힌 불이라니. 평범한 불 속성 생명체는 살아남지 못할 곳이었다.
[자! 저기야!]
부그르르.
룬은 한 눈에 붉은색에 가까운 주황색 비늘 해츨링이 페르디키온임을 알아보았다.
시커먼 물에 던져진 녀석은 의식이 없었다.
그저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바닥없이 부유할 뿐이었다.
상대를 공포에 질리게 하는 드래곤 피어를 발동시킨 룬이 요정에게 물었다.
“네가 한 짓이냐?”
[흐, 흥! 가둔 것, 뿐.]
대답은 여전했지만, 잔뜩 위축된 눈치였다.
그 순간, 본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던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잔뜩 구기며 천천히 눈을 떴다.
“캬아우!”
“형.”
페르디키온은 룬의 부름은 들리지 않은지, 비늘을 세우며 어둠속 무언가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어두운 형체는 거대한 검은 연기로 된 드래곤이었다.
‘저걸 두려워하고 있어.’
룬은 요정이 들어간 진주 구슬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 왜 저러고 있는 거냐?”
키득, 하고 비웃은 요정이 요사스럽게 속삭였다.
[보고 있어. 환상. 가장 고통스러운.]
“당장 꺼내.”
[못, 꺼내.]
룬의 눈빛이 딱딱하게 굳자, 흑진주를 흔들까 겁먹은 요정이 말을 늘어놓았다.
[쟤가, 원한 거. 스스로.]
진주 아뮬렛을 흔들었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없었다.
광증에 물들었던 아멜리아의 부모들처럼, 어둠 속에서 보는 환상 때문에 점차 자신을 잃어 갈 테니까.
‘아직 어둠에 완전히 먹히지는 않았다. 문제는…… 저 녀석 하는 꼴을 보니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는 건데.’
룬은 어둠 속 형체를 향해 명령했다.
“돌아와라. 어둠의 주인에게.”
어둠이 잠시 흩어지려다가 이내 연기처럼 드래곤의 형체로 돌아갔다.
어둠이 룬의 말을 듣지 않자 이죽임 섞인 제안이 들어왔다.
[나랑. 거래. 한다면. 도와. 혹시 가능할지도?]
끈질기게 제안해 오는 말에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한 품은 녀석들은 참 한결같아.”
대꾸와 함께 룬이 진주알을 쥐고 위아래, 양 옆으로 마구 흔들었다.
진주에서 새된 비명과 욕이 들린 듯 했으나, 이내 살려달라는 소리로 바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정이 기절할 때까지 흔든 룬은 비늘을 잔뜩 세우고 있는 페르디키온을 살폈다.
‘……꽤 지독하게 묶였군.’
크리스티나의 속성과외 덕에 힘을 다루는 데에 도가 튼 룬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보자마자 짐작되었다.
페르디키온의 앞에 생긴 거대한 드래곤은 페르디키온이 지닌 마음의 상처와 부정적인 기억으로 만들어진 허상이다.
문제는 단순한 허상이 아닌, 그가 지닌 가장 아프고 어둡게 여기는 기억을 자극한다는 것.
이는 페르디키온이 마음 속 상처를 더욱 크게 느끼고 고통스러워하게 만들었다.
룬이 그를 찾아온 시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이미 환상에 완전히 빠져든 녀석은 도저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둠의 마력에 쉽게 물들게 된 건 듀라한과 함께 향기 상자를 써본 탓도 있겠지.’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는 룬의 지배력이 상승하게 되나, 어둠의 마력에 취하게 만들 확률이 올라가는 부작용이 있었다.
룬은 끙, 하고 팔짱을 끼웠다.
‘이렇게 된 이상 자력으로는 힘들겠고. 무사히 어둠에서 빼 내려면 방법이 필요한데.’
고민하던 룬은 페르디키온의 한 쪽 앞발에 꽉 쥐어져 있는 흑진주를 보았다.
그가 슬쩍 웃으며 제 턱을 문질렀다.
‘다행히 진주를 잘 쥐고 있었군.’
지체할 필요 없이, 그는 바로 흑진주의 힘에 집중했다.
룬은 자신의 의식을 페르디키온을 잠식한 어둠에 동화시켜갔다.
‘저 어두운 드래곤의 형상은 필시 그의 아비인 파시야스라는 놈이겠지. 도와줄 테니 조금만 참아라, 페르디키온.’
“캬, 캬우욱.”
룬은 페르디키온이 괴로움에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눈을 감았다.
***
퍽!
“캬악!”
데굴데굴.
붉은색과 주홍색이 섞인 통통하고 어린 해츨링의 몸이 부지깽이에 맞아 사정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붉은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산도적처럼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노장이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