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한심하고 머저리 같은 놈!”
어떻게 들어왔지?
“카학! 케흑.”
볼이 벌겋게 부은 어린 페르디키온은 반쯤 일어나려다 익숙하게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뺨을 후려친 남자는 죄인을 목도한 듯 표정을 사납게 구겼다.
“불의 지배자가 되어야 할 놈이 비천한 드워프들도 잘만 쓰는 부지깽이 따위를 어쩌지 못하다니.”
“캬욱…….”
쨍그랑!
벌겋게 달아오른 부지깽이가 바닥에 내던져졌다.
“질리는군. 쓰레기 자식 같으니.”
“……!”
“내 눈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라.”
어린 불의 해츨링은 루비처럼 붉은 눈을 내리깔며 침울한 시선을 감췄다.
고압적인 어조로 말을 뱉은 금안의 남자는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손을 털며 나갔다.
“…….”
진홍빛으로 분노를 태우려던 눈빛은 이내 어둑하니 잠겨들었다.
서서히 눈을 든 불의 아이는 부지깽이를 눈에 담았다.
고통스러운 쓰라림이 묻어난 자리에는 불긋한 부지깽이 자국이 뺨에 낙인처럼 남아있었다.
‘아프다.’
붉은 해츨링은 앞 발 하나를 들어 부은 볼을 매만졌다.
그러다 심장이 있는 곳을 문질러 보았다.
어느 쪽이 더 아픈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둘 다, 어린 페르디키온에게는 너무 아팠다.
‘이런 아픔 따위 별거 아냐.’
본래 레드 드래곤이라면 강철 같은 비늘과 불의 가호로 달군 부지깽이 따위 나뭇잎 스친 듯 간지러워야 한다.
그리 말했던 파시야스를 떠올렸다.
그 시선을 보고 있자면 자식이 아닌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페르디키온은 저항하지도, 인정받지도 못하는 자신.
그리고 이런 비참함을 주는 아버지에게 화가 났다.
‘오늘도 실패했어.’
페르디키온은 제 몸을 살폈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몸에 지닌 불의 기운을 끌어올렸으나 힘껏 후려쳐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비늘이 부지깽이에 찢겨나가 있었다.
그 후 여지없이 떠오르는 아버지의 실망스러운 눈빛.
주먹을 쥔 그의 시선이 끝이 벌건 부지깽이 쪽으로 향했다.
‘…….’
결심한 페르디키온은 손을 뻗어 부지깽이 자루를 꽉 쥐었다.
치이익-
바닥에서 들린 부지깽이 끝이, 파시야스가 직접 달군 불로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를 눈에 담은 어린 페르디키온이 제 팔을 다시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부르르.
어찌 할지 정했다지만, 본능적인 두려움에 부지깽이를 쥔 손이 떨리며 식은땀이 흘렀다.
‘이렇게 나약하게 굴어선, 아버지께서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
해츨링의 비늘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살라먹은, 달아오른 부지깽이를 팔에 대려던 순간.
“하지 마.”
어른스럽고 차분한 남성의 목소리가 그를 제지했다.
“캬우!?”
페르디키온이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재차 소리가 들렸다.
“여기야.”
가까웠다.
깜짝 놀란 페르디키온이 눈을 가늘게 뜨고 부지깽이를 쥔 손등을 보니, 그 위에 사람이 올라앉아 있었다.
2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인간.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처음 보는 어둠을 두른 자가 어린 페르디키온의 눈에 담겼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꽃잎처럼 작은 손으로 그의 손 등을 집고, 부지깽이를 팔뚝에 지지려는 걸 제지했다.
“그런 짓을 하면서까지 기대에 부응할 필요 없어. 네 아버지의 기대에 맞춰 하는 것이 네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캬……우.”
평소 페르디키온이라면 즉시 잡아떼어 패대기를 쳤을 터였다.
한데, 이 작은 인간의 까만 눈을 마주친 페르디키온은 왠지 안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어린 페르디키온은 의문에 빠져 생각했다.
“캬아……?”
‘왜지. 왜 내가 이 까만 녀석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지?’
혼란스러워진 페르디키온만큼이나 룬 역시 제 모습에 대해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작아진 그가 보는 주변 풍경의 모든 것이 거대했다.
마치 거인들의 왕국에 들어온 소인이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이건 전생의 모습인데.’
기이하게도, 그는 전생의 이무기였을 시절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잠깐 생각해본 그는 가벼운 탄식을 흘렸다.
‘페르디키온의 환상이 깨질 위험은 없으면서, 내게 익숙한 모습으로 현현하게 된 건가.’
이무기 시절 모습은 페르디키온의 현실과 과거에 없는 제 3의 모습이었다.
눈앞의 불우한 과거를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페르디키온에게 현재이자 미래의 존재인 룬 이클립스의 모습은 허용되지 않는 듯 했다.
‘……하긴, 룬의 모습으로 온다한들 혼란만 가중 될 수도.’
룬의 현실의 모습이야 성장한 지 겨우 10년이지만, 정신적인 나이와 본래 가진 힘의 크기는 천 년 넘은 성체인 드래곤급.
그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게 된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터였다.
‘이렇게 작아진 건 통로 역할인 흑진주 힘을 통해 들어온 탓일 거고.’
상황 파악이 끝난 룬에게 페르디키온이 전음을 사용했다.
[대체 넌 무엇이냐. 어떻게 여기 들어왔지?]
경계어린 페르디키온의 물음에 룬은 짧게 고민했다.
‘지금의 페르디키온이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여길만한 게 있나?’
미래의 의동생이라는 말은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납득 시키려 들다 혹여 괜한 의심을 사면 귀찮아질 터.
‘현실과 과거의 기억이 충돌하면 그 원인이 될 내가 쫒겨날수도 있어. 우선은, 말 할 수 있는 진실부터 시작해볼까.’
룬은 페르디키온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난 지금 네가 쥐고 있는 흑진주에서 나왔어.”
“캬아?”
[이 진주 말인가.]
의문이 풀리지 않은 눈을 한 페르디키온이 전음으로 의문을 던졌다.
어느 새 제 손안에 있던 흑진주를 들어보던 페르디키온은 룬과 구슬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
룬의 긍정에 답하듯 진주가 검은 광택을 영롱하게 빛냈다.
그는 페르디키온을 올려다보며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너는 지금 곤궁에 처해있고, 그 진주를 가진 널 구해야 나도 여기서 벗어날 수 있거든.”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지한 어투에 페르디키온은 사납게 미간을 꿈틀거리고만 있었다.
영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반응에 룬은 나름대로 그 속내를 짐작해보았다.
‘허무맹랑하게 들리려나.’
룬이 생각하기에도 전래동화 속 콩쥐네 두꺼비 같은 소리였다.
그때, 피할 틈도 없이 페르디키온이 앞발을 모아 그를 꽉 쥐었다.
덥썩!
당혹감을 느낀 짧은 순간, 페르디키온은 냉큼 방문 밖으로 뛰기 시작했다.
투다다닷!
아이들 특유의 다급한 손 쥠과 급한 발놀림에 따라 몸에 진동이 느껴졌다.
페르디키온은 성 안을 두리번거리며 몇 번이나 갈림길을 내달렸다.
“살살 좀 가라!”
얼마나 뛰었을까.
붉은 해츨링은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방 안으로 쾅 소리 나게 문을 닫고 들어갔다.
“큐후욱.”
콧숨을 몇 번 내쉰 화룡족 꼬마는 혹여라도 손 안에 있던 놈이 사라졌을까, 긴장하며 오므렸던 주먹을 폈다.
그 안에서 인상을 구긴 룬이 고개를 들었다.
“푸하! 갑자기 왜 뛰어나가?”
“캬욱!”
[그 방은 아버지의 방이다. 더 머물렀다간 들킬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었다.]
이어서 그는 룬을 지그시 노려보며 꾸짖었다.
[애초에,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온 거냐. 여긴 불의 일족의 레어에서도 출입이 불가능한 장소라고. 바로 레드 드래곤의 성이란 말이다!]
‘불의 레어라면, 여기가 페르디키온의 레어에 있던 그 성?’
이제 보니 주변의 눈에 익은 건물 양식과 색감, 낯익은 불의 기운까지.
일 전에 페르디키온의 레어에서 본 그 성과 같았다.
“그럼 드워프들은 어디 있는데.”
성에는 수많은 드워프들이 있었다.
왕궁 소속 대장장이, 드워프 대신인 베르딘 메퍼스. 광산 책임자 햄퍼트 피셔, 전투 드워프 담당인 우드 펠런과 고르반 보브 등.
비록 환상 속 시간대는 오래전이라 그들이 없다 할지라도, 각 직책을 맡은 드워프들이 분주히 돌아다니지도 않고, 경비를 돌던 이들 하나 없는 건 이상했다.
오죽하면 룬이 페르디키온의 성이라는 걸 떠올리지 못했을까.
룬의 질문에 페르디키온이 그를 바라보다가 서랍에서 붉은 마력석이 박힌 황금빛 팔찌를 꺼내 찼다.
룬에게 물려준, 인간으로 변신하게 해주는 아티팩트였다.
“그 노예들 말이냐? 놈들은 성에 없어. 비천한 놈들이라 다들 대장간에서 무기나 만들고 있다.”
“비천한……?”
쏘아 붙이듯 내뱉은 말이 당혹스러웠다.
이게 10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니.
‘이 자식.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진 거였군.’
룬의 생각을 모르는 페르디키온은 문 밖에 신경을 곤두세우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기척은 없군. 이젠 말은 편하게 해도 된다. 네 정체가 뭐냐.”
“……요정 같은 거랄까.”
하필 떠오른 것이 흑진주속에서 기절 해 있을 그 요정 녀석이었다.
페르디키온은 룬의 모습을 가자미눈을 하고 노려보았다.
“확실히 작고 하찮아 보이긴 하는군.”
“너 그 말 후회 안할 자신 있어?”
“후회를 입에 올려? 감히 네 까짓 놈이. 대체 어떻게 여길 들어온거냐.”
‘하여간 저 싹퉁 머리.’
오랜만에 들어보는 오만한 말투였다.
지금 들어도 등짝을 철썩 쳐주고 싶었지만 어차피 먼 과거의 페르디키온일 뿐.
지금은 녀석을 이용해 이 환상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룬은 해야 할 일을 먼저 떠올렸다.
‘일단은 이 환상에 갇혀있는 원인부터 해결해야 하는데.’
페르디키온이 보내는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했다.
당연했다. 이 성에 파시야스가 허락하지 않은 존재가 있다니.
제 손에 직접 쥐어져 있는 흑진주를 보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을 뿐, 룬의 존재는 여전히 수상했다.
하지만 룬은 당황하지 않고 되물었다.
“너야말로 내 흑진주는 어떻게 손에 쥐고 있었는데, 기억 나?”
시침 뚝 떼고 던진 질문에 할 말이 없어진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좁혔다.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직후에 발견한 흑진주였다.
그럼 계속 진주를 손에 쥐고 있었다는 말인데, 파시야스가 이런 묘한 보석을 보고도 한번 언급한 적 없었다는 건 이상하기는 했다.
말문이 막힌 틈을 타 룬은 슬그머니 말을 찔러 넣었다.
“굳이 억지로 믿으라곤 안 할게. 하지만 좀 전에 보니 너한테 도움은 필요하겠더라. 빈 말로도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수는 없어보이던데…… 솔직히 이 정도인 줄은 몰랐거든.”
어린 페르디키온이 뜨거운 부지깽이를 쥐고 스스로를 해하려 들다니.
환상이라지만 동시에 실제했던 일. 그렇게 생각하니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네가 뭐라고 나에 대해 안다는 듯이 구는 거냐? 생각해보니 내가 진주를 가지고 있던 것도 네 녀석이 이상한 술수를 부린 걸지 어찌 안다고!”
술수라면 술수였다.
룬의 힘을 넣어 둔 흑진주를 지니고 있도록 한 건 맞았으니까.
‘어떤 의미에선 맞는 말이군.’
내심 피식 웃은 룬은 시선을 맞추고 대꾸했다.
“내가 네 편이라는 증거를 보여줄게.”
양 손을 가슴 앞에 수평으로 올린 룬이 의심 가득한 붉은 눈을 올려다보았다.
“잘 봐.”
룬의 손끝에서 마력이 실처럼 길게 이어졌다.
교차로 문양을 만들어 가는 것은 바로, 페르디키온이 직접 전수해 준 ‘마력 실뜨기’였다.
그 놈이 문제로군
예상대로, 어린 페르디키온은 기겁할 듯 놀랐다.
“너, 너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네 어머니께서 직접 전수해 주신 기술이니까.”
어설픈 흉내가 아니었다.
심지어 룬은 고난이도의 풍차 실뜨기까지 선보였다.
‘하나 더 보여줘서 쐐기를 박아 볼까.’
페르디키온의 의식세계인 만큼, 그가 룬의 존재를 더 잘 받아들이면 움직이기 수월할 터였다.
“이것도 있어.”
룬은 양 손을 내리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선명한 음률이 울려 퍼졌다.
“하늘이 그리운 내 집. 몸 쉬이 둘 곳으로 돌아가, 지친 날개 내리면.”
노래를 들은 페르디키온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입을 뻐금거렸다.
어머니를 통해 들었던 자장가가 손 안의 작은 녀석에게서 불리고 있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붉은 머리의 꼬마는 안절부절못하며 허둥거리더니, 다음 소절이 끝나기도 전에 손안에 룬을 꽉 말아 넣어 소리를 죽였다.
덕분에 갑자기 손 안에 구겨진 룬이 작은 주먹으로 툭툭 손 안을 두드렸다.
“뭘 그렇게 놀라. 아직 한 소절밖에 안 불렀잖아.”
페르디키온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다급하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