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242)

“큭. 조용히 해! 노래는 아버지께서 금지하셨단 말이다!”

룬은 조심스레 손을 열어보는 페르디키온을 올려다보며 덤덤히 시선을 던졌다.

“응. 그리고 너한텐 무척 소중한 추억이라는 것도 알아.”

“……네까짓 게.”

퉁명스러운 대꾸와 달리 목울대까지 뭔가 울컥 올라온 꼬마가 입술을 깨물었다.

페르디키온은 뭔가를 참는 얼굴로 단어 하나하나를 토했다.

“너 같은 녀석이 있다고는 들어 본 적도 없건만. 어머니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존재했다니…….”

파시야스는 진작 쿠즈나와 관계된 것들을 모두 치워버렸다.

쓸데없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고 현재 해야 할 의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데, 죽은 쿠즈나의 노래와 마력 실뜨기를 알고 있다니.

적어도 쿠즈나와 페르디키온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 진실일 수밖에 없었다.

룬이 페르디키온의 붉은 눈에 시선을 맞추었다.

“이 노래와 실뜨기는 나 역시 전해 듣고, 배운 거야. 난 예전부터 널 알고 있었어. 그리고 곤란한 상황에 처한 널 돕고 싶다. 그것만큼은 믿어주라.”

이쯤 되니 페르디키온도 의심의 날을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인 쿠즈나의 노래와 마력 실뜨기.

그녀에 대해, 적어도 페르디키온에 대해 모르는 자가 언급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정말로…… 날 알고 있다고?”

“그렇다니까.”

룬은 피식 웃으며 여유롭게 팔짱을 꼈다.

확실히 페르디키온의 어릴 적이라 그런지, 다듬어지지 않은 날선 반응과 어딘지 모르게 순둥순둥한 면모가 엿보였다.

한편, 페르디키온은 멍하니 룬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진짜로 이 요정이란 놈이…… 날 도우러 왔다고.’

어머니 쿠즈나가 죽은 뒤로 페르디키온은 제 편을 들 자는 이제 없다고 여겼다.

살면서 단 한번도.

페르디키온에게는 불의 지배자로서의 자질을 증명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였다.

하지만, 그는 이 요정이라는 녀석의 말을 조금 믿기로 했다.

“우선은…… 알겠다.”

‘좋아.’

룬은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페르디키온의 상처 난 볼에 시선을 던졌다.

“일단 좀 앉아봐.”

팔짱을 낀 룬이 턱짓으로 침대 쪽을 가리켰다.

인간으로 모습은 바꾸었지만 부지깽이 자국은 뺨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뭐 하려는 거냐.”

“치료해 주려고 그런다.”

룬이 검지를 들어 제 볼을 가리켰다.

페르디키온은 손등으로 룬이 가리킨 방향의 볼을 슥 문질렀다.

피가 조금 묻어나왔지만, 페르디키온은 뭔가 짜증스러운 눈치로 옷깃에 핏자국을 닦았다.

“야, 문지르지 마. 치료해 주려는 거니까.”

“흥! 긍지 높은 레드 드래곤 족은 이런 작은 상처로 하나하나 시끄럽게 굴지 않아.”

그 말을 듣고, 룬은 어이가 없어졌다.

‘크리스티나였다면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정색했을 텐데.’

페르디키온의 보호자인 파시야스를 떠올린 룬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처 난 걸 보고만 있기가 좀 그렇기도 하고, 겸사겸사 이야기할 것도 있어서 그래. 얼른 앉아봐.”

아무리 환상 속이라지만 어린 놈 뺨에 화상자국을 그냥 두는 게 마음 편할 리 없었다.

거기에 상처를 맡길 최소한의 신뢰가 있을지 가늠해보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원래 다친 곳을 보인다는 게, 좀 민망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

어리다는 말에 페르디키온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눈초리 끝을 날카롭게 세웠으나, 이내 퉁명스레 대꾸했다.

“……혹시라도 헛짓거리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

“굳이 그러겠냐.”

불의 일족 꼬마는 경계의 눈초리를 보였지만 슬금슬금 가 앉았다.

힐끔 보곤 하는 그에게 룬은 통증과 열감을 줄이는 마법을 사용했다.

‘그래도 보여주긴 하네.’

어린 해츨링이지만 드래곤의 아이인 이상, 그냥 두어도 며칠 지나지 않아 나아질 상처였다.

하지만 툭툭 던지듯 말하면서도 순순히 뺨을 내미는 걸 보니 내심 경계심은 많이 허문 것 같았다.

“뺨만 맞았어? 다른 데 맞았으면 보여줘 봐.”

룬의 말에 페르디키온이 머뭇거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굴린 아이는 슬금슬금 상의를 벗었다.

룬은 내색하지 않으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소년의 몸 여기저기에 부지깽이 자국이 얼룩처럼 남아있었다.

화상뿐 아니라, 피부가 벗겨져 너덜너덜한 곳도 있었다.

‘아비란 자가 자식에게 손속이 잔혹하군.’

크리스티나가 페르디키온에게 조금씩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주 보호자인 파시야스가 있는 이상 그녀의 도움에는 한계가 있었을 터였다.

문득 룬은 페르디키온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이런 식으로 몇 백 년을 살았으니, 첫 만남이 그 모양이었던 거겠지.’

이쯤 되니 첫 만남이 꽤 온건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룬이 오래된 상처에도 치료 마법을 쓰자, 페르디키온이 물끄러미 봐왔다.

그 시선을 느끼면서 룬은 상처에 시선을 고정하고 당면한 문제를 다시 떠올렸다.

‘내가 끼어든 이상 불행한 기억에 잠식되는 건 막았고, 이제 페르디키온이 이 환상을 거짓이라고 깨닫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 시절 페르디키온의 유일한 목표는 파시야스에게 군주의 자질을 인정받는 것뿐.

하지만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은 늘 배신당했다.

그 기억이 한켠에 남아 이 환상을 만들어 낸 것이리라.

‘파시야스라……. 역시 그 놈이 문제긴 해.’

아프고 힘든 기억은 쉽게 잊히기도 벗어나기도 쉽지 않다.

심지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영향을 주었다.

‘오랫동안 파시야스는 페르디키온에게 증오스러운 자이자, 인정받고 싶은 자였어. 그 연쇄를 조금이나마 끊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곳의 파시야스가 거짓임을 깨닫는 것.

그리고 거짓으로 만들어진 파시야스에게서 독립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룬다면 환상을 깨는 동시에 페르디키온이 만들어 갈 미래는 훨씬 자유로울 터였다.

“자. 너무 오래된 상처라 흉터는 좀 남았지만 아프진 않을 거야.”

통증이 사라지고 치료가 끝나자 페르디키온은 편해진 표정으로 변했다.

룬은 마음의 벽이 조금 물러진 틈을 타 넌지시 물었다.

“궁금해서 묻는 건데, 아버지를 좋아해?”

“……존경하고 있다.”

좋아한다는 물음에서 빗겨간 애매한 답이었다.

“네 아버지가 유난히 가혹하다고 느껴진 적은 없어?”

“닥쳐.”

정곡을 찌른 게 틀림없었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목소리였지만 룬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괜히 물은 건 아니야. 네가 아버지라고 믿는 자는 저주에 걸려있거든.”

“저주라고?”

“내 치료 받아봤으니 너도 느꼈지? 나는 어둠 속성의 마력을 다뤄. 때문에 관련된 힘도 빨리 알아채고.”

이곳은 페르디키온이 가진 가장 강력하고 부정적인 기억으로 만든 세계였다.

파시야스가 가짜라고 솔직히 말했다가 페르디키온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반발심만 커져 오히려 룬을 거짓된 자로 여길지도 몰랐다.

‘가장 좋은 건 페르디키온 스스로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거지.’

룬은 느긋하게 날아 페르디키온의 무릎 위에 발을 딛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법의 재능을 타고나는 종족이다 보니, 룬이 어둠과 관련된 마력 사용자라는 건 믿는 눈치였다.

“네 아버지인 파시야스는 불의 기운으로 가득해야 할 자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어. 너무 탁하고 어두웠지.”

페르디키온의 눈이 사나워졌다.

하지만 룬은 그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차분하고 잔잔한 검은 시선이 마주치자, 오히려 눈동자가 흔들린 건 페르디키온이었다.

“거짓말이다.”

말에서 동요가 느껴졌다.

룬이 원하는 반응이었다. 이상한 점을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

어긋나는 부분을 하나하나 대조해 보기 시작하는 것이 진실에 다가가는 첫 발인 셈이었으니까.

“불의 지배자이신 아버지가 어둠과 저주에 당하셨다니, 그런 불경한 말 함부로 내뱉지 마라.”

으르렁 거릴 듯 분노를 끌어올린 목소리는 어린 아이답지않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룬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예상대로 대답해 주니 고마울 정도네.’

느긋하게 손을 펼쳐 보인 그가 회심의 제안을 던졌다.

“네가 직접 확인해 봐. 불의 기운을 전부 삼키고도 남을 지독한 힘이었으니까.”

룬의 목적은 하나.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자각하게 만드는 데에 있었다.

‘설득시키느라 힘 들일 필요 없어. 직접 눈앞에 들이밀어 주면 되는 일이지. 아비의 껍질을 쓴 환상이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그를 아비라 믿는 것도, 자신을 속이는 것도 불가능해질 테니.’

가운데 눈썹을 꿈틀거린 페르디키온이 눈초리를 사납게 했다.

“만약, 거짓부렁을 늘어놓았다면 널 죽일 거다.”

조그만 녀석이 얼굴은 제법 사나웠다.

젖살 통통한 꼬마지만, 성체가 되면 기세가 제법 강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룬에게는 하룻강아지였지만.

‘게다가 향기 상자를 써서…… 무의식적으로라도 날 해치는 생각은 못할걸.’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페르디키온은 크리스티나의 레어에 있는 동안 듀라한과 대련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며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됐다.

무어라 협박해도 룬에게 협박이 되지 않을 테니, 녀석의 살해 예고는 전혀 무서울 게 없었다.

“마음대로 해.”

편하게 대답한 룬은 당장이라도 그를 쥐고 흔들 것 같은 녀석과 떨어져 탁자 위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입씨름 할 필요 없었다.

파시야스가 가짜임을 깨닫고, 폭압에 고통 받는 지금이 가짜라는 걸 눈치 채기만 하면 될 일이니.

‘고통스러운 기억일수록 더 쉽게 사로잡히는 경우야. 귀신에 씌운 놈들 퇴마 할 때 종종 봐 왔지.’

한편으로는 흥미로운 점도 있었다.

페르디키온이 고작 작은 영역의 왕으로서 머무를 그릇인지, 좀 더 커질 수 있는 그릇인지.

그걸 시험해보기 적절한 타이밍이기도 했다.

한편 페르디키온은 태연히 대꾸하는 룬을 보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설마…… 이 소인 녀석의 말이 진짜란 말인가?’

아버지를 의심한다는 불경한 행동에 대한 죄책감과 룬의 말이 진실이라는 직감.

그 둘은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싸워대며 혼란을 가중 시켰다.

네가 속았어

어린 화룡의 혼탁한 마음을 읽는 건 룬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행동력이 뒷받침 되는 녀석이야. 의심을 심어주기만 해도 충분해. 진짜 위험한 건 깨닫고 나서지. 알면서도 환각에 빠져들고 싶어 한다면 그땐 억지로 끌어내야 할 테니.’

가능한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의심과 혼란, 아버지에 대한 불경을 저질렀다고 여기는 상태로 그를 깨웠다간 미래 페르디키온이 성장 한 후까지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정신과 연결되는 힘은 이게 피곤하다니까.’

룬은 탁자 위에서 페르디키온을 향해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너도 각오해 둬.”

“뭘 말이냐.”

어린 그를 향한 시선은 고요했다.

그는 잠시 말을 머금었다가, 단숨에 단어들을 밀어냈다.

“네 행동에 대한 선택과 책임은 모두 네 의지에 달려 있는 거니까. 네 삶의 결과는 아버지가 책임 져 주지 않을거거든.”

‘힘을 흡수하는 건 나지만, 상처로 남았던 기억을 어떻게 다룰지는 페르디키온이 할 일이지.’

파시야스가 없는 삶.

그건 페르디키온이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그 얼굴에 공포의 대상이었던 아비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사라졌다.

일렁

룬은 속이 살짝 메스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세계가 아지랑이 속 신기루처럼 흔들렸다.

이질적인 밀림이 일어나며, 룬의 몸이 물속에서 꺼내질 듯 흔들렸다.

‘역시, 파시야스의 존재를 건드리니 갈등을 제공하는 나를 밀어내려 드는군.’

룬은 아꼈던 패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천천히 작은 손을 펼친 룬은 어린 소년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화륵!

살아있는 불꽃이 작은 심장을 형상화한 문장을 이루며 떠올랐다.

룬의 두 손에서 떠오르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는 불의 인장이었다.

경악한 어린 불의 후계자가 입속으로 ‘말도 안 돼.’라며 중얼거렸다.

“페르디키온. 날 믿어. 불의 맹약자들은 위기에 처한 일족을 절대 외면하지 않는 법이니까.”

룬의 진심을 느낀 불의 인장이 홍염을 태웠다.

타오르는 불의 인장을 눈에 담은 어린 불의 후계는 주먹을 꾹 쥐며 긴장된 시선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네가 위대한 불의 일족임을 증명할 기회야. 내가 도울게. 일족의 일원으로서.”

불의 일족의 맹세를 들은 페르디키온의 얼굴이 복잡하게 변했다.

담담하게 제안을 던진 룬에게 시선을 둔 후, 페르디키온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넌 대체…… 무엇인거냐?”

룬은 페르디키온의 얼굴에 스쳐가는 찰나의 감정을 읽어냈다.

‘공황과 의문, 미약한 경계, 분노, 미움……인가.’

감정의 변화가 빨랐다. 하지만 룬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를 주시했다.

“어차피 못 믿을걸.”

“상관없다. 말해.”

불의 일족을 해칠 경우, 강력한 배신자의 페널티가 발생하는 불의 인장이었다.

흔들리는 화룡족 꼬마를 마주보며 룬은 잔잔히 진실을 알려주었다.

“네 동생.”

“…….”

페르디키온은 대번에 정신 나간 사람 보는 듯한 얼굴을 했다.

모처럼 믿고자 했던 마음이 배신당한 기분에, 말은 안 했지만 눈으로 이미 욕설을 뱉고 있었다.

“말하기 싫다고 거짓말하는 건 좋지 않다.”

씹어 뱉는 어조로 충고를 던진 페르디키온이 옷을 마저 여몄다.

하긴 같은 상황이라면 룬도 헛소리라 여겼을 터.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믿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던 부분이었다.

“어쨌든 불의 인장을 걸고 내게 고했으니…… 확인 정도는 해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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