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왠지 모르겠지만 페르디키온은 이 요정이라는 녀석이 왠지 싫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껏 철석같이 믿어왔던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사실이라면 난 저주에 굴복한 아버지에게 고개 숙이고 살아온 건가.’
생각과 동시에 페르디키온은 수치스러움과 충동, 분노, 두려움을 느꼈다.
동시에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났다.
잠깐이라도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할 수 없었으며, 파시야스 앞에 굴종했던 제 모습이 떠올라 뺨 근육이 굳었다.
이상함을 느낀 룬이 그를 불렀다.
“너…….”
어린 화룡족의 꼬마에게서 파괴적이고 시뻘건 살심이 피어올랐다.
아버지가 그동안 그를 폭력과 두려움으로 자존심을 짓밟으며 가르친 세월에.
그를 어떻게든 참아온 것이 헛짓거리였다는 사실에.
“페르디키온.”
검붉게 물든 어린 화룡족의 사나운 눈이 룬의 부름에 돌아보았다.
그리고 룬의 손 안에서 여전히 순수한 불꽃을 태우는 인장을 눈에 담았다.
왜일까.
룬이 내보인 불의 인장은 무척이나 순수하고 평온했다.
조용히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 장작 타는 소리를 내는 모닥불 같았다.
“…….”
치욕스러웠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조용히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노라니, 사나운 생각들이 점차 사라져갔다.
시야가 확장되고, 룬이 까만 밤하늘 같은 눈과 마주쳤다.
“괜찮다.”
붉은 머리가 살짝 흔들리더니, 룬을 향해 말했다.
“아버지의 방으로 가겠다. 거짓일 경우 네 놈은 간사하게 입을 놀린 대가로 불의 레어에 구속되어 심문받게 될 터인데. 그래도 상관없나?”
“그래.”
룬 입장에서야 어떤 조건을 내세워도 상관없었다.
그가 말한 모든 것은 진실이었으니까.
‘언젠가는 제 아비와의 관계를 재정리해야 할 일이었지.’
이 트라우마는 페르디키온에게 있어 언제고 한번 짚고 가야할 문제였다.
환상을 지독했지만, 한편으론 과거를 생생하게 돌이켜 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으니.
‘힘내라. 네게도 이건 좋은 기회야.’
룬은 차분히 그를 바라보다가 응원하는 마음으로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페르디키온은 미간을 움찔하더니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룬은 모른 척 헛기침을 했다.
‘어린 녀석이 보기엔 이상해 보였겠군.’
말을 돌리고자, 룬은 질문을 던졌다.
“지금 파시야스는 뭐 하고 있을까.”
“드워프들 보고를 받고 계실 거다.”
대답하는 얼굴에 또 다른 긴장이 엿보였다.
문을 열고 나가는 페르디키온 옆을 느긋하게 날아가며, 룬은 가볍게 말을 던졌다.
“뭐 불편한 거냐? 표정이 영 안 좋은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고하러 온 드워프가 죽는다. 쓸모가 없는 자들에게는 자비 없는 분이시니까. 그를 몇 번이나 봐왔지. 솔직히 그게 옳은 것이라 가르침 받았지만, 기분이 좋진……않다.”
“…….”
얼마나 어린 시절부터 파시야스는 자식에게 살해를 가르쳤을까.
룬은 속으로 탄식했다.
‘살인을 가르침 받아야 했으니 감정을 죽여 올 수 밖에 없었겠구나. 페르디키온.’
페르디키온은 불을 다루는 천부적인 재능과 노력을 가졌으나 파시야스는 잔혹한 자.
비정해지지 못하는 페르디키온을 끝없이 폄하했고, 아주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제 자식에게 조차 이럴진데, 당연히 쓰레기라 여기는 드워프에게 제대로 된 응대를 할 리 없었다.
룬은 새삼 페르디키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와 만났을 때, 페르디키온에게 드워프족은 공포정치를 통해 관리해야 할 복속이었다. 이 시절의 페르디키온이 그렇게 변해갈 때까지 과연 얼마나 걸렸을까.’
구긴 미간과 목소리는 사나워 보이지만 드워프를 살해하는 이야기에 난처한 눈빛을 드러내는 어린 불의 후계.
어둠이 이 광경을 택해 보여줄 정도로, 오래도록 양심을 괴롭혔을 것이다.
룬은 반쯤 충동으로 입을 열었다.
“언젠가 드워프들이 네 레어 주민이 될 텐데, 이런 방식으로 괜찮아?”
문득 던진 질문에 페르디키온은 불쾌한 음식을 넘긴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한때는…… 자비를 베풀려 한 때도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의견이었지.”
“쿠즈나님이?”
의외라는 듯 룬이 되묻자 페르디키온이 복도 모퉁이를 돌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속에 담긴 것은 지독한 악감정이었다.
“하지만 그자들은 자비를 베풀었던 내 어머니를 모욕했다. 감히 천공의 드래곤이라 불리는 어머니의 무덤을 건드렸어.”
“!”
실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크리스티나의 전승 마법으로 얻은 지식에도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물론, 성장에 따라 깨우치는 게 많아지는 지식 마법 특성상 룬이 아직 모르는 것들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게다가 시전자였던 크리스티나가 인위적으로 전수하지 않았던 지식일지도 몰랐다.
‘그럼, 원래 페르디키온은 어릴 때 어미의 무덤을 건드렸다 알고 있었다는 건데. 어떻게 드워프들에게 선한 치세를 베풀 생각을 했던 거지?’
페르디키온은 거짓말에 꽤나 소질이 없는 놈이었다.
어미의 무덤을 능욕했다면 드워프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할 수 없었을 터.
이 시기의 페르디키온이 뭔가 잘못 알고 있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누가 이야기해 준 거야?”
“아버지께 직접 들은 말이다. 비록 도굴해 간 것은 없었지만 탐욕에 눈 먼 놈들의 손에 어머니의 유품이 들려있었다고.”
“……드워프들이 그렇게 멍청하다고?”
그가 봐 왔던 드워프는 성격 괄괄하고 무식할 정도로 손속이 과격하기는 했지만 부족을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불공정 계약에 넘어가는 어리석음과,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좋은 마음을 품지는 못하는 건 사실이나, 드래곤의 영역에서 물건을 훔치려 든다?
룬이 아는 드워프족은 일족 전체의 전멸이나 다름없는 짓을 할 정도로 멍청한 놈들은 아니었다.
“그놈들이 좀 어리숙하긴 해도 그렇게 간이 클 리가 없는데.”
“아버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있었지. 드워프 놈들은 원래부터 탐욕스럽고 제 몫도 못하는 게으름뱅이들이라고.”
으득. 이를 간 페르디키온이 분노를 드러내며 당장 불을 토할 것처럼 말했다.
“놈들은 최소한의 도의도 없는, 금속에 환장한 미치광이니 분명 어머니 쿠즈나의 비늘을 탐냈을 거라고 일러주셨다.”
“잠깐만.”
룬은 아까부터 든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페르디키온이 말하고 있는 드워프에 대한 정보는 전부 파시야스에게서 전해들은 부정적인 이야기뿐이었다.
“지금까지 한 말, 네가 직접 보고 알아낸 거야?”
“아니. 그 말은 아버님께서…….”
말끝을 흐린 페르디키온이 이상함을 느끼고 조용해졌다.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들어온 이야기일 뿐, 페르디키온이 직접 보고 결론 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미미한 혼란에 빠진 채 급히 아는 사실을 하나 더 덧붙였다.
“하지만 자신들이 살던 왕국도 제대로 지키지 못해 드래곤의 영지에 빌붙어 사는 멍청한 놈들이라는 건 사실이었어. 내가 제대로 된 장로가 되지 않으면 저 꼴이 날 수 있다고.”
드워프들에게 생긴 비극은 사실이었다.
다만 그것이 멍청하다고 치부되기엔 전쟁이라는 잔혹한 사정이 뒤따랐다.
룬이 콧숨을 내쉬며 결론 내렸다.
“네가 속았어.”
“뭐?”
파시야스의 의도는 명백했다.
차기 불의 장로인 페르디키온이 드워프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지 못하게 만들 셈이었다.
“진실과 교묘하게 섞인 이야기야. 네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교육해 왔던거지. 드워프에 대한 증오와 지배해야 할 이유를 주기 위함이었을거야.”
이 계략은 성공적으로 맞아 들어갔다.
드워프들이 성에서 원수의 아들을 보는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다른걸 알려줄게
페르디키온을 향한 드워프들의 비탄과 증오 섞인 눈빛.
이는 어린 화룡족 꼬마에게 심어진 드워프에 대한 미움에 착실히 양분까지 넣어주었다.
“내…… 아버지께서 거짓을 말씀하셨단 거냐.”
“사실을 고했다고 꼭 진실인 건 아니니까.”
어둠은 진실을 가리기도 하지만, 때론 어둠 속에서 진실을 드러내 주기도 했다.
파시야스의 말이 옳다고 믿은 페르디키온은 드워프들과 대화 한번 제대로 해 본 적 없을 터였다.
‘파시야스……. 자식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걸 용납할 수 없어 했던 거로군.’
드워프보다 더 탐욕스러운 놈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페르디키온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가 뺨이 떨려왔다.
오랫동안 곧이곧대로 파시야스의 말을 믿어왔을 페르디키온의 심정이 어떨지, 룬으로서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파시야스의 자충수네.’
아마도, 페르디키온은 이 후에 이 점을 깨달았던 모양이지만, 그때는 이미 드워프들의 원한이 깊어져 손쓰기 어려워 진 후였을 터.
오랫동안 페르디키온은 드워프들의 원수나 마찬가지였으리라.
룬은 고개를 들어 복도 끝에 보이는 거대한 문을 바라보았다.
약간은 긴장이 되었다.
환각이 이대로 편히 끝낼 리 없었다.
‘그래봐야 문제없다. 페르디키온은 몰라도, 날 속일 수 없는 시점에서 이미 결판은 난 셈이니.’
벌컥!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룬은 미간을 찌푸렸다.
훅 끼치는 피비린내가 역했다.
파시야스 앞에 절명한 드워프의 시신 세 구가 쓰러져 피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본체화 되어 돋아난 짐승의 손톱에 찐득한 피가 흘렀다.
[배운 것 없는 사생아처럼 굴어대는 거냐. 노크조차 없이 아비의 집무실을 들락거리다니.]
화륵!
드워프의 시신이 불에 타기 시작했다.
그를 목도한 페르디키온은 머릿속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잘 봐. 정말 네 아버지가 맞는지.”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때는 아버지 외에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던 그이건만, 이 작은 요정의 말은 무척 또렷하게 들려왔다.
침착함을 되찾고 파시야스를 본 페르디키온은 흠칫 놀랐다.
룬의 말이 맞았다.
순수한 불의 기운을 품은 불의 인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의 파시야스는 난잡하게 얽히고설킨 검보랏빛의 괴물이었다.
“정말로, 아버지가 아니었어.”
[감히, 아비에게 불경한 생각을 품다니!]
룬은 페르디키온이 쥔 흑진주의 마력을 발동시켰다.
일시적으로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 페르디키온은 파시야스의 정체를 보았다.
그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은 페르디키온이 파시야스에게 품었던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가장 증오하는 모습이었다.
“그래. 아버지가 아니란 말이지.”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기억은 새까만 편린들이 되어 스쳐지나갔다.
어지러운 혼란 속에서 과거와 감정이 뒤섞였다.
파시야스의 형태가 조금씩 흐트러지다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적잖은 충격의 방증이었다.
“하하.”
아버지에 대한 환상에 금이 간 페르디키온이 웃었다.
그러나 이내,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피어올랐다.
“……저것이 내 아버지 행세를 하며 나를 조종했군.”
새까맣게 감겨드는 낮고 찐득한 목소리였다.
수치와 악감정들이 치솟아 오르고,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룬이 그를 불렀다.
“페르디키온.”
“죽여버리겠어.”
페르디키온이 벽에 장식용으로 걸려있던 레이피어 손잡이를 쥐었다.
파시야스의 모습을 한 어둠이 킬킬 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버르장머리 없이 아비에게 검을 들이밀 셈이냐? 아둔한 것아. 그렇게 감정에 휩쓸리지 말라하였건만, 네 놈의 하등 쓸모없는 머리는 어디에 쓸 셈인지 모르겠구나. 둔해 터진 놈 같으니.]
그 모습을 보고 시선이 떨리더니, 의외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나라고…… 너 같이 더러운 놈 자식이고 싶었던 줄 알아!”
이제까지 썩을 대로 썩어 곪은 마음이 아비의 형태를 한 것을 향해 불쑥불쑥 독을 토했다.
부지깽이로 맞을 때도.
죽을지도 모르는 던전에 시험이라며 던져졌을 때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추억할 만한 모든 것들을 강제로 소각 당했을 때 역시.
페르디키온은 파시야스가 원하지 않는 모습들을 스스로 잘라내 숨겨야만 했다.
파시야스가 원치 않는 부분도 페르디키온의 한 부분이건만,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도록 죽여 놔야했다.
그에 대한 화풀이라 해도, 멈출 수 없었다.
[머저리 같은 녀석! 자식으로서 기대한 적도 없다. 넌 어차피 불량품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듣기 싫어!”
목에 핏대가 선 페르디키온이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마음 구석에 끝끝내 묵혀두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버렸다.
한편, 룬은 생각보다 과하게 반응하는 페르디키온을 보며 당혹감을 느꼈다.
‘이거, 향기 상자 탓인가?’
어둠의 마력에 취할 확률이 높아지는 상자.
원래 의도는 환각인 것만 깨닫게 해 파시야스라고 믿는 커다란 어둠의 실체를 알아채게 하여 환각임을 깨닫게 할 셈이었다.
그러면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에라도 환각에 당하지 않게 될 터.
더 이상 페르디키온의 기억에 기생할 수 없게 된 어둠을 룬이 흡수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진실을 설명해 주면 끝날 일이었다.
한데, 향기 상자를 종종 접했던 탓에 어둠에 대한 친화력이 높아져 환상에 과하게 몰입하고 있었다.
‘거기에, 원래 제 아비에게 품고 있던 증오까지 터졌어.’
살심이 치솟은 눈이 흉흉했다.
검을 쥔 그가 파시야스와 같은 흑염으로 물들고, 눈에는 짐승의 동공이 세로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손에 쥐고 있는 검은 날이 무딘 편이라 하나, 드워프 장인의 제작품인 이상 무구로 쓰이기에 충분해 보였다.
룬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진정해.”
룬이 페르디키온의 눈앞에 날아왔다.
분노에 몸을 맡기고 이성을 잃게 되면 이 어둠에 완전히 사로잡혀,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비켜!”
“네가 저 녀석을 베어봐야 화풀이밖에 되지 않아. 진짜 아버지도 아니니까.”
“그럼 죽여도 상관없겠지.”
굳은 표정으로 검을 쥔 모습에서 살의가 느껴졌다.
차분한 암흑이 페르디키온과 룬의 주위에 깔렸다.
다행히 어투는 거칠어도, 끝내 룬을 무시하지는 못했다.
‘나에 대한 기억은 없어도, 내 지배력과 친화력은 상승한 상태라면.’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는 생각 이상으로 굉장한 효과를 보였다.
그 때문에 분노를 제어할 수 없다면, 상자의 주인인 룬의 영향력은 더 막대할 터.
툭.
룬은 손을 뻗어 페르디키온의 이마에 가볍게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