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을 듣고도 그럴 마음이 들면 나도 제지하지 않을게.”
룬은 증오를 드러내고 자신과 타인을 살라 먹으려드는 페르디키온을 제지했다.
분노로 당장이라도 칼을 휘두를 기세인 붉은 눈을 주시하며 룬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룬의 말을 막으려는 듯 파시야스가 괴성을 지르며 거대한 불을 연속으로 쏘았다.
하지만 룬이 두른 어둠을 뚫어내지는 못했다.
“주는 대로 받는다는 말이 있지. 네가 지금 하는 행동이 미래에 반드시 돌아 와.”
“요정인지 뭔지, 넌 고작 그런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냐? 그런 말은 나라도 할 수 있어.”
“그럼, 네 미래를 알려줄게.”
페르디키온의 시선이 룬을 향했다.
미간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이야기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너는 무사히 불의 일족 장로가 될 거야. 하지만 살해자인 아버지에게 배운 폭력과 분노를 통해 권속들을 다스리게 되겠지. 네 휘하의 드워프들은 분노를 쌓을 것이고, 그들은 굴종하고 엎드리겠지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널 증오하게 될 거다.”
“그런 걸 내가 두려워 할 거라 생각……!”
“지금 내가 말한 모습. 마치 네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아?”
“……!”
페르디키온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가장 증오하는 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며 피 묻히기를 주저하지 않는 모습.
목 뒤로 경멸로 인한 소름이 돋았다.
불기운이 넘실거리고, 그를 막고 있는 얇은 검은 막 안에서 룬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잘못된 자가 쓰는 방법을 그대로 쓰지 마. 그자와 똑같은 결과를 맞이하게 될 뿐이니까.”
“그럼, 이 분노를 그저 참고만 있으라는 거냐?”
룬은 고개를 저었다. 피 대신 분노의 불길이 흐르는 아이에게 룬은 한층 잔잔한 목소리로 일렀다.
“네가 쓰려는 방법은 불합리한 폭력과 인성모독, 살해자인 아버지 밑에서 배운 것이지. 그러니 다른 걸 알려줄게.”
반복된 폭언과 손찌검. 자연스럽게 행해지던 폭압.
잘못된 방식으로 자라온 결과는 이미 아는 대로였다.
드워프들을 향한 폭정, 이후 페르디키온은 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룬은 페르디키온이 지닌 분노가 마땅히 향해야 할 곳을 일러주었다.
“어린아이라도 정의를 말할 수 있도록 해 봐. 아이라 해도 바른 말이라면 부모에게든, 어른에게든. 언제라도 이야기할 수 있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도록.”
어른이라 해도 잘못은 하게 되어있다.
부모라도 완벽할 수 없다.
사실 완벽하길 바라는 건 바람일 뿐. 모든 생명체는 실수를 하고 산다.
적어도 그걸 알고 옳은 소리를 받아들일 용기가 있다면.
그리고 아이에게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후대에게 똑같이 행동해 갈 터였다.
“조금 시끄러워질 수는 있겠지만 말야.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인정받아 갈 수 있도록. 네 아버지 같은 자는 발도 못 붙일 레어를 만들어 봐.”
주변이 조금씩 무너졌다.
현실과 환각의 경계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페르디키온이 살심이 진정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점차 고요해지고, 주변의 허상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페르디키온이 나직이 물어왔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당연하지.”
룬의 손바닥으로 전해진 울림은 분노의 열기에 휩쓸리지 않고 페르디키온에게 온전히 전달되었다.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그에게 그의 진짜 미래이자, 지금의 페르디키온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는 미래에 굉장히 좋은 인연들을 만났어. 고난은 있겠지만, 장로가 되기도 전에 너를 불의 일족 지배자로 인정하는 드워프들도 많이 생기게 되고 그들의 마음을 샀지.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주고, 그들의 자긍심을 지켜주는 좋은 군주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어.”
페르디키온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억들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가끔은 네 어머니의 노래와 실뜨기를 해 보면서, 좋은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게 되었지.”
룬은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마주 본 페르디키온의 눈빛이 이체를 띠었다.
확신이 들었다. 본 적 없는 모습인데도,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이자를 페르디키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룬?”
씨익.
미소 지은 룬을 오묘한 시선으로 보던 페르디키온이 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발악하듯 어둠 속에서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 검고 찐득거리기 시작한 형체.
파시야스라 생각했던 모습이 일그러지더니 어른이 된 페르디키온이 살육에 취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내 무너졌다.
“맞아, 형. 나는 룬 이클립스(Lune Eclipse). 바로 형의 동생이지.”
명암이 선명한 붉은 눈을 가진 까만 해츨링.
진명을 입에 올리며, 룬의 본 모습이 드러났다.
쉽게 가나 했더니
이마에 닿아있던 손이 해츨링의 도톰한 앞발로 변했다.
페르디키온은 다시 룬을 바라보았다.
순수한 어둠 속에서 진실을 보여준, 그의 아우.
드워프들의 마음에 귀 기울이게 해 준, 상냥한 그의 동생이 거기 있었다.
모든 것을 불사르고 싶었던.
증오로 탁했던 페르디키온의 시선이 맑고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다 바꿔 보이마. 아버지의 잘못된 치세 아래에 고통스러워 할 이들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옅게 미소 지은 룬이 천천히 손을 떼며 말을 맺었다.
“뀨.”
[맞아. 드디어 내가 아는 형님답네.]
페르디키온의 눈이 살짝 커지며 파문이 일었다.
온전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 존재.
믿음을 주는 자.
편안함을 느낀 페르디키온이 슬며시 웃음을 띄웠다.
“내가, 언제는 네 형 아닌 적이 있더냐?”
“?”
룬을 보는 페르디키온의 얼굴은 한층 여유롭고 따뜻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니 무어라 할 마음도 없어진 룬이 피식 웃어보였다.
[아니. 형은 늘 형님이었지.]
힘을 잃은 환각이 완전히 무너졌다.
쓰러진 드워프들과 피, 파시야스의 모습들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져갔다.
‘자식. 성장했네.’
천천히 몸을 돌린 룬은 파시야스였던 것이 흩어지려는 순간 놓치지 않고 흡수했다.
페르디키온이 완전한 불의 지배자가 되는 날.
원하는 것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자는 발도 못 붙일 세상이 오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
환각을 빠져나온 페르디키온이 눈을 떴을 때는 물빛이 은은하게 번지고 있었다.
가벼운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 누르자 룬이 상태를 살펴왔다.
“형, 괜찮아?”
“캬욱.”
해츨링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인 페르디키온은 문득 룬의 소년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환상 속에서처럼, 좀 더 어른스러운 얼굴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페르디키온이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룬이 벌써 어른이라니. 환각 때문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게 틀림없어.’
머리를 터는 페르디키온을 보며 룬은 염려 섞인 시선을 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캬우.”
붉은 해츨링은 조금 어지러웠지만 숨을 고르게 쉬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폴리모프를 하여 평소에 취하는 인간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부족한 모습을 보였군. 다른 녀석들은 왜 안보이는거냐.”
그 모습은 룬이 보기에 퍽 기특한 면이 있었다.
정신이 어둠과 환각으로 잔뜩 헤집어져 있을 텐데, 제법 의연하게 구는 모습이 제법 대견했다.
‘회복이 빠른 편이라 다행이네.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룬이 오른 손을 내밀자 페르디키온이 손을 응시하곤 마주잡았다.
“이쪽이야.”
룬이 요정이 들어간 흑진주를 띄웠다.
골이 흔들리는 기분이었을 페르디키온을 위해 룬은 걸음이 너무 빠르지 않도록 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흑미와 백야, 아멜리아가 이쪽으로 오는 모습이 보였다.
“룬 님!”
“삐이! 삐삐삐약!”
흑미와 백야가 다소 피로해 보이는 아멜리아와 함께 이쪽으로 열심히 뛰어왔다.
룬은 흑미가 바로 앞에 오자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이상한 환각 같은 거 보지 않았어?”
“웅! 이상하진 않았어요. 그냥 예쁘고 꼬리가 아홉 개 달려있구, 머리가 하얀 어른 흑미 봤을 뿐이에요. 저더러 막, 그쪽으로 오라고 했는데…… 흑미는, 룬 님 있는 곳에 가야한다고 말 해주고 얼른 나왔어요.”
“뺘아!”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을 흑미는 그 환상이 백미의 모습임을 알지 못했다.
비록 우연이라해도, 과거에 대한 미련보다 지금이 더 소중하기에 환상을 벗어나 무사히 룬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타고난 순수함이 거짓된 환각을 이겼군.’
백야는 태생이 불사조이기에 환각에 걸리지 않았던 모양이고, 아멜리아는 어딘가 수척해 보였다.
룬의 시선이 닿자, 아멜리아가 살풋 웃더니 한 손을 들어 인사하듯 흔들었다.
“아멜리아. 넌 어땠어?”
“나, 나는……. 오, 오랜……만에, 어……어둠 속에 혼자……였던 예전 내 모습을 봤어. 하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이, 이상하다고…… 느꼈더니. 사, 사라졌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 환각에서 벗어나 여기까지 올 정도라면 꽤 선전한 편이었다.
그때, 아멜리아는 어쩐지 시선이 박혀오는 기분이 들었다.
“……?”
돌아본 방향에는 페르디키온이 있었다. 제법 눈초리가 뾰족했다.
“뭐.”
페르디키온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머뭇거리던 아멜리아가 용기를 내 마주보았다.
그러자, 대번에 심기가 불편해진 듯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깜짝 놀란 아멜리아는 고개를 휙 돌려버리며 생각했다.
‘왜, 왜 저러는 거야!’
쭈뼛하게 긴장한 아멜리아와 진득하게 노려보는 페르디키온을 본 룬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다행히 룬에 대한 충성…… 아니, 존재감이 커서 아비의 그늘에서 잘 벗어날 수 있었지만, 자력으로 환상에서 빠져나온 아멜리아를 보니 진 기분을 느낀 게 틀림없었다.
‘아직 애들이니까.’
결과적으로 다들 무사했다. 룬은 목소리를 살짝 내어 둘의 시선을 모았다.
“다들 고생했어. 그 환각은 가장 힘들었던 시절, 고통스럽고 빠져나오기 어려운 환상을 보여줘. 분명 힘들었을 텐데. 잘 빠져나온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아…… 그, 그……렇구나.”
“……크흠.”
룬의 말에 수줍게 기뻐하는 아멜리아와 달리, 페르디키온의 입꼬리는 살짝 힘이 빠져 내려가 있었다.
철컥! 철그럭!
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니 멀리서 듀라한이 그들을 찾아 뛰어왔다.
타격 받은 기색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그는 태연히 룬의 옆에 섰다.
기억을 잃은 그가 어떤 환각을 봤을지 궁금했으나, 물어볼 틈은 없었다.
[당신. 누구?]
페르디키온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이 놀란 표정으로 듀라한 앞까지 날아가 떠 있는 흑진주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흑진주에 담긴 요정은 감탄을 연발하며 듀라한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이런 존재가. 있어? 어떻게?]
“듀라한 말이야?”
[듀라한. 그게. 얘?]
여태껏 다른 일행에게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요정은, 죽음에서 태어난 정령기사인 듀라한을 신기하게 여겼다.
냄새를 맡듯 듀라한 주변을 맴돌던 요정이 알아 듣기 어려운 빠른 어조로 중얼거렸다.
[죽음의 냄새. 어둠. 망자이나 정령. 어째서?]
요정의 지대한 관심을 받은 듀라한은 기분이 영 좋지 않아 보였다.
[나 줘. 가지고 싶어. 이거.]
룬의 눈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짐짓 태연하게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었다.
“관심이 가나 본데, 저 녀석은 내 기사야. 너한테는 못 줘.”
[안 돼? 어떻게든?]
“글쎄 뭐, 잠깐 어울리게 허락해 주는 정도라면…… 네가 쓸모가 있다면 고민정도는 해 보겠지만.”
요정은 흑진주 안에서 눈을 깜빡이더니, 검지를 입술 근처에 두고 말했다.
[나. 잘 해. 안내. 요정의 길.]
‘요정의 길이라.’
이동이 편해지면 클리어를 훨씬 더 빠르게 할 수 있을 터.
룬은 턱을 문지르며 고민하다 수락했다.
“좋아. 대신 사고치지 않는 게 조건이야.”
가늘게 눈을 뜬 요정이 그를 바라보다간 요염하게 키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 수락.]
“좋아. 보스방 앞 까지 최단 루트로 안내해 줘.”
[불가능. 가능. 그 전까지.]
‘쳇. 역시인가.’
보스방까지는 어렵고, 그 전 일반적인 몬스터 출현하는 장소까지만 줄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다소 아쉬웠지만,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요정을 품은 흑진주가 냉큼 날아가 듀라한의 갑옷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자, 검은 투구 안의 녹빛 번뜩임이 부르르 떨며 두어 번 깜빡였다.
묘하게 끙끙거리는 대형견 같은 모습에 룬이 듀라한에게만 들리도록 전음을 보냈다.
[그 녀석, 이 던전만 나가면 성불시킬 생각이야. 흑진주를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걱정 말고, 방해가 되지 않게 던전 클리어할 때까지만 네가 잘 보고 있어.]
……철컥.
룬의 전음에 듀라한은 어딘지 난감한 기색을 보였지만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신경 쓰이던 녀석이 말도 잘 듣는데다 관심을 온통 듀라한에게만 두니 꽤나 편했다.
“아! 흑미 이거 뭔지 알아요! 집착 변태!”
“지, 집착…… 벼, 변태?가 뭐……야?”
아멜리아가 의문을 표했다.
한쪽 눈썹을 꿈틀한 페르디키온은 대충이나마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관심 있는 사람을 병적으로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변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