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와아……. 흑미 똑…똑해…….”
룬 역시 크리스티나의 지식 덕에 무슨 의미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흑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쓰다듬었다.
“그거 이럴 때 쓰는 단어가 아니야. 앞으로는 쓰지 마라. 어디서 들었어?”
“제드 아저씨가 말 해줬어요!”
‘이 새끼가.’
아무래도 제드 때문에 물이 잘못 든 게 틀림없었다.
‘요즘 제드 심부름 때문에 인간계를 오가더니 이상한 걸 배워왔군. 나중에 보면 가만두지 않겠어.’
제드가 알면 무척 억울해 할 일이었다.
그는 활발하고 순진한 어린 흑미를 걱정해 ‘혼자 다니시다가 이상한 녀석에게 걸리면 피곤해지니까 조심하세요! 세상엔 집착변태 같은 놈이나 무차별 살인자처럼 이상하고 무서운 자들도 많다구요!’라고 말해주려던 것뿐이었으니까.
“던전부터 마저 깨자.”
룬은 흥미를 드러내는 이들의 관심을 던전 클리어로 돌려 대화를 적절히 마무리했다.
***
“……너 일부러 여기로 데려왔지.”
[원한 곳. 최단거리.]
룬은 모른 척 하는 요정을 노려보았다.
요정의 길을 통해 움직이니 걸리적거리는 거 없이 빠르기는 했다.
덕분에 보스방 바로 앞까지 도달한 점도 좋았다.
하지만, 그들은 어둠을 빠져나오자마자 와르르 몰려나온 몬스터들에게 포위되었다.
‘최종 보스방과 가장 가까운 곳 까지 옮겨 달랬더니 몬스터가 한꺼번에 있냐.’
공헌도에 따라 보상을 받는 던전이다.
일행들이 강하기도 했고, 어느 정도는 몬스터를 토벌해야 좋은 보상을 받을 테니 우르르 몰려나온 거야 괜찮았다.
다만, 이렇게 되리라는 걸 이야기하지 않은 요정의 심보가 그의 심기를 슬쩍 건드렸을 뿐.
[얼마. 없는걸. 여기.]
“?”
[더 많은. 몬스터. 가득.]
“!”
뭔가를 깨달은 룬이 구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마나를 연주했다.
퍼엉!
룬은 빠르게 얼굴만 한 새까만 공 여섯을 만들어 가장 앞 열을 차지한 몬스터들에게 날렸다.
공에 맞아 쓰러지는 기괴한 몬스터들과, 움찔 몸을 물린 놈들이 눈에 괴이한 빛을 담았다.
룬의 빠른 대처에 맞춰 일행들 역시 다른 몬스터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물대포와 불길을 날렸다.
쾅! 쾅! 화륵!
룬은 적당히 발 디딜 터가 생기자 어둠으로 방어막을 만들었다.
이어, 즉시 적들의 그림자에 어둠의 힘을 심어 자리에 속박했다.
이어 능숙하게 새까만 장창을 만들어 무차별로 쏴버렸다.
연계가 무척 매끄러웠다. 몬스터들이 주춤거리며 장창을 피하려다 다른 몬스터와 부딪히거나, 피하지 못하고 꽂혀죽었다.
혼비백산이 되어 우왕좌왕하는 무리들을 보며 룬이 외쳤다.
“지금이야!”
일행들은 순식간에 달려들어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캬르르르!
키엑! 샤아악!
변질되어 눈이 수십 개 달린 바다뱀 같이 생긴 몬스터.
썩은 피 내음을 흘리는 거대 메갈로돈.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스켈레톤 떼와 살점을 물어뜯으러 온 눈 먼 검은 바다생물들이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괴성을 질렀다.
괜찮아
“히익! 룬 님, 얘들 너무 징그러워요!”
“삐이!”
흑미는 지지야, 지지! 라며 백야와 함께 매혹을 걸고, 강력한 발도장을 찍어댔다.
그런 흑미를 보며 백야도 날아올라 몬스터의 얼굴에 새 발자국을 마구 찍고 다녔다.
한편으로는 날쌔게 날아오는 촉수들의 채찍을 피해 다니며, 둘은 은근히 호흡을 잘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적 출현에 놀랐던 다른 일행들은 그 사이 제대로 자릴 잡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라멜!”
끼르륵!
아멜리아의 위로 치켜든 손끝에 인어보다 큰 거대한 물이 둥글게 모여들었다.
“여기야!”
촤악!
물공이 전방을 향해 던져졌다.
끼릇!
물공 뒤로 돌고래 정령 라멜이 날아들었다.
돌고래는 공을 머리로 치며 더욱 속도를 키우고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며 몬스터들을 초토화 시켰다.
콰르르르!
끼릇! 끼르릇!
그림자에 묶여있던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거대한 물공과 굴리는 돌고래의 몸통과 꼬리에 치여 죽었다.
자잘한 녀석들을 아멜리아와 라멜에게 맡기고, 룬은 몬스터들과 싸우게 될 전장을 가늠했다.
‘공헌도야 내가 가장 높아야겠지만, 다른 녀석들도 챙겨줘야지.’
당황하여 혼비백산 흩어지는 놈들에게 룬은 어둠을 통해 지배력을 행사했다.
키약! ……캬르륵.
정신없이 날뛰던 놈들이 룬에게 복종하며 전투태세를 해제했다.
하지만 이미 광기에 물든 몬스터들은 정신을 찾지 못하고 좀비처럼 움찔거렸다.
주변의 물과 어둠, 마력을 확인한 룬이 눈을 들어 몬스터 무리 쪽을 바라보았다.
“가자.”
룬의 말에 다들 긴장된 표정으로 무구를 쥐고 달렸다.
탁한 어둠이 군데군데 있지만, 물빛이 드러나기 시작한 던전.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몬스터들을 뱉어내기 시작했지만 일행들은 일당백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조심해. 형님도 흑미도 너무 가까이 붙지 마!”
“캬항!”
“알겠다!”
쿠르르!
그때였다.
갑자기 해저 절벽이 부서지며 거대한 불가사리 모양의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놈은 페르디키온과 듀라한을 노려 붉은 발을 들어 내리찍었다.
쾅!
궤도가 단순했기에 당한 이들은 없었지만, 일행들의 공격도 잠시 수그러들었다.
불가사리 주변에는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고스트가 주변을 수호하듯 맴돌고 있어 움직임을 제한시켰고, 내리치는 검이나 파편이 유령을 통과하거나 휘게 만들었다.
룬이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둔화시키고 어둠을 흡수해 힘을 빼앗고 있지만, 광증에 지독하게 걸린 놈들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후오오! 후오오!
쿠우우!
거대 불사가리가 다시 빨판 발을 들자, 별 모양 중심에 거대한 입이 쩍 벌어지고 삼중으로 겹겹이 박힌 징그러운 이빨이 드러났다.
콰우웅!
불가사리의 거대한 다리가 또 한번 내리쳐졌다.
지진이라도 난 듯 뒤흔들리는 와중에, 불가사리의 몸에서는 끈적거리는 녹색 침 수백 개가 쏘아졌다.
표푯!
“비켜라!”
앞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간 페르디키온과, 그에 맞춰 물로 방어막을 만든 아멜리아.
촉수 같은 다리가 페르디키온의 검에 그어져 녹았다.
불의 검은 또 다른 다리를 잘라내려 했으나, 연체동물 특유의 재생 능력이 발동하며 녹은 다리가 다시 돋았다.
“칫!”
기껏 잘라낸 다리가 재생될까 페르디키온이 급히 달려들었지만, 저주받은 불가사리가 뱉어내는 독에 뒤로 급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끼릇!
돌고래 정령이 몬스터들을 죄다 쓸어버린 거대한 물공을 머리로 굴려와 불가사리에게 던졌다.
퍼엉! 촤악!
시익! 키이익!
물공이 터지자 불가사리의 외피가 상하고, 충격을 받은 녀석은 버르적거리며 몸부림치더니 슬슬 몸을 물렸다.
화륵!
“겁화의 불이여. 내 부름에 응하라.”
틈을 놓치지 않고 페르디키온이 검에 불꽃을 둘렀다.
그리곤 순식간에 불가사리 위로 뛰어올랐다.
“핫!”
촤악!
페르디키온의 검에 불가사리의 몸통을 정확히 반으로 갈렸다.
물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파란 불꽃이 붙어, 불가사리의 살집이 지글지글 익는 소리가 났다.
키이이익! 시이익!
반으로 갈린 거대한 몸뚱이가 살고 싶다는 듯 몸을 마구 뒤틀었고, 거기에 휩쓸린 주변 몬스터들이 버티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전열이 무너진 곳을 노려 아멜리아가 창을 긋자 물보라가 일며 몬스터들이 갈라지거나, 몇 미터 밀렸다.
끼윳!
돌고래 정령은 죽어가는 불가사리가 뿌리는 독액에서부터 아멜리아를 보호하거나 튕겨냈다.
덕분에 몬스터 주변으로 독이 흩뿌려졌고, 몸부림치는 불가사리를 겨우 피한 바다 몬스터들에게 튀어 고통스러운 단말마가 울려퍼졌다.
그때였다.
쿠르르륵.
콰웅!
낡은 해적기가 달린 으스스한 배.
초반에 나온 스켈레톤들은 물론, 긴 로브자락을 날리는 거대한 해골이 커틀러스를 들고 등장했다.
“내가 간다.”
눈에 예기가 어린 페르디키온이 검을 고쳐들었다.
그는 말릴 새도 없이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어? 페르디키온 님, 혼자 가시면 위험해요!”
흑미가 외쳤지만 룬은 어둠 속에 외눈박이 식인 물고기들을 가둬넣으며 말했다.
“괜찮으니 놔둬. 상대 역시 검을 쓴다면 질 리 없으니까.”
살라만다와 함께 어둠 섞인 여우불을 쏘며 견제하던 흑미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룬 님이 기여 제일 많이 해야 하는 던전이라 했었는데.”
싸움에 임하면서도 목적을 잊지 않는 훌륭한 모습이었다.
룬은 흑미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응. 괜찮아.”
‘내가 활약할 곳은 다른 장소니까.’
룬은 묵묵히 쓰러진 몬스터에게서 어둠을 흡수했다.
“형님을 지원해줘, 아멜리아.”
고개를 끄덕인 아멜리아가 페르디키온이 움직이기 편하게 도왔다.
눈동자만 굴려 아멜리아를 잠깐 본 페르디키온은 갑판 위에 뛰어올랐다.
그리곤 화염이 둘러진 검으로 순식간에 몬스터 무리의 허리를 단칼에 도륙 냈다.
이어 룬이 준 흑진주로 물의 힘을 사용해 검 주변의 물길을 순식간에 열었다.
‘물의 힘을 쓰는 건 익숙하지 않을텐데도, 거침없군.’
속으로 감탄하며 보고 있자, 페르디키온의 검을 감싸고 타오르는 불길이 더 커졌다.
여기가 물의 던전만 아니었다면, 주변 모든 것을 태우고 불바다로 만들었을 터였다.
해적선장은 자잘한 스켈리톤의 희생을 발판삼아 페르디키온을 노리기 시작했다.
쿠웅!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갑판위로 올라온 듀라한이 해적 선장 앞에 섰다.
콰앙!
누가 뭐라 할 거 없이 듀라한과 해적 선장이 두 손을 맞잡고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페르디키온이 듀라한과 연계하려 했지만, 잡몹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대신 최대한 민첩하게 주변을 돌며 빈틈을 찾았다.
“칫. 이 자식들 너무 많아!”
불만스레 중얼거린 페르디키온은 죽어가면서도 움직임을 막기 위해 달려드는 선원 스켈레톤을 또 베었다.
쿠구구!
조금씩 밀고 밀리며 힘겨루기를 하던 듀라한이 일순 녹안을 번뜩였다.
우지직. 콰득!
-크아악!
해적 선장의 비명과 함께 손아귀 뼈가 으스러지고, 단숨에 밀려버렸다.
선장의 비명에 선원 스켈레톤이 타깃을 바꾸어 듀라한에게 커틀러스를 휘둘렀다.
-그으아아아!
듀라한의 외침이 물을 진동시키며 터져 나왔다.
이제 듀라한의 울부짖음에 적응된 일행들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일찌감치 귀를 막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울부짖음을 들은 스켈레톤들은 파동에 뼈다귀를 다각거리며 진동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듀라한이 주먹을 뻗었다.
콰각!
단숨에 갈비뼈와 몸이 부서지고, 또 다른 사각에서는 페르디키온의 검이 마력을 싣고 압박해 들어왔다.
쾅! 쾅!
-키야아악!
망자들의 단말마가 여기저기서 터져나갔다.
흑진주 안에 있는 요정이 뺨을 한 손으로 감싸고는 눈을 반짝이며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멋져. 비명 소리.]
구슬 속 요정의 말에 소름이 끼쳤는지 듀라한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선장 스켈레톤이 부서진 뼈들을 다시 모여 조립되려 했으나, 아멜리아의 정화 언령을 받고 잠잠해졌다.
하지만 아멜리아 역시, 제 주변의 적들 때문에 더 돕지는 못했다.
“후, 후우…… 지, 지독해…….”
수살귀. 속칭 물귀신.
여기서는 ‘워터 데몬(water demon)’이라 불리는, 눈과 입의 자취만 검게 남아있는 물 덩어리들은 새파란 한기를 흘리며 아멜리아의 주변을 맴돌았다.
상대의 온기와 기력을 빼앗아가는 고스트계열 몬스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