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242)

‘별거 아닌데, 수가 너무 많은 게 문제네.’

제대로 된 드래곤이었다면 타격은커녕 가까이 오지도 못할 녀석들이건만, 던전에 스민 어둠과 저주의 기운을 먹고 강해진 놈들은 생각보다 질기고 거슬렸다.

‘이런 때야말로 아멜리아가 활약할 때지.’

룬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멜리아에게 던졌다.

“아멜리아.”

휙.

“어……어?”

룬이 던진 걸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쥔 아멜리아가 의문스럽게 손을 펴 보았다.

포근하고 밝은 데이지 무늬가 그려진 사탕과 호박색 아기 곰 젤리였다.

“먹어봐.”

다시 덤벼들려는 희멀건 한 워터 데몬 무리가 귀곡성을 울리자, 인어는 손에 있던 젤리와 사탕을 한 입에 전부 삼켰다.

“합!”

달콤한 크림과 꿀이 부드럽게 엉키는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잠시 후 인어의 몸 주변이 투명하게 반짝이며 쫀득쫀득한 막이 생성되었다.

“와아……!”

“그건 골드 드래곤 장로의 축복이 깃든 보호막이야.”

룬이 손으로 허공을 슥 그었다.

“전부 정화해버려.”

“……응!”

두 손으로 창을 든 아멜리아의 주변에 거대한 물보라가 일었다.

마치 바다가 그녀를 축복하는 듯 기쁘게 움직이는 모양새였다.

조금 버거운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의연하게 창을 한 손에 쥐고 적들을 향해 뻗었다.

“정화하라!”

쿠르르. 쏴아아!

축복이 깃든 묵직한 파도가 순식간에 워터 데몬 무리를 휩쓸었다.

-오오오! 오오오오!

어둡고 음침한 동굴에서 울리는 하울링이 터져나왔다.

유령들이 물살에 닿아 부서졌다.

아멜리아가 희미하게 웃고, 룬은 유령들이 부서지자 그 안의 저주와 어둠의 힘을 흡수했다.

“됐어.”

룬이 어둠을 걷어내자 바다색이 맑은 물빛으로 점차 환해지기 시작했다.

광증에 빠진 몬스터들이 저주에서 벗어나 평범한 몬스터나 시체로 변했다.

너무 진한 어둠에 물든 녀석들은 룬의 의지에 따라 그 자리에서 힘을 잃고 무력하게 쓰러졌다.

일행들은 던전이 제 세상인 양 남은 몬스터들을 밀어붙였고, 전부 사라지자 살아있는 몬스터는 이제 없었다.

“수고 많았어.”

“징그러운 놈들이었군.”

“하아……. 끄, 끝났어?”

“룬 님 멋져요! 언니랑 페르디키온 님. 라한이두요!”

흑미가 일행들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그 사이 룬은 제법 가치가 나갈 만한 부산물들은 모두 챙겨 넣었다.

저주받은 던전은 이번에 정화하면 다신 볼 수 없다.

그러니 이 던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재료들은 최대한 수급해 두어야 했다.

우우웅!

그 순간, 사위를 울리는 진동음에 일행들은 모두 주변을 둘러보았다.

페르디키온은 검을 세웠고, 흑미는 귀를 쫑긋거렸다.

날개를 두어 번 파닥거린 백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이더니 룬의 머리 위에 앉았다.

“삐. 삐루루.”

우웅! 후우웅…….

“삐룻.”

짧고 간결한 울음소리 후, 새는 어딘가 안타까운 소리로 진동음과 호응했다.

이게 팀이라고?

“백야야. 왜 그래?”

“삐이. 삐이이.”

질문을 던진 흑미가 백야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놀란 눈을 했다.

“정말? 던전이 아프다고 울어?”

“삐약! 삐이. 삐삐.”

“응. 응응.”

다른 일행들이 의문을 표하자, 백야가 더욱 파닥이며 흑미에게 무어라 말했다.

응, 응. 하고 백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흑미가 룬을 바라보았다.

“룬 님, 던전이 도와달라고 한대요. 힘들게 하는 게 너무 많다구요.”

“……그래?”

의사를 가진 던전이라는 말은 처음 들은 아멜리아가 놀란 눈을 했다.

페르디키온은 무표정하게 상황을 지켜보았지만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흑미에게서 시선을 뗀 룬은 흥미로워했다.

‘설마 던전이 직접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나. 아니, 오히려 잘된 건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룬을 듀라한이 물끄러미 바라봐왔다.

둘은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빠르게 눈짓과 의견을 교환했다.

진동음이 사라지자 룬이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우선 정비 좀 하다가 가자.”

“으……응. 좋아.”

전투로 인해, 주변은 난장판이었다. 자리를 고르려는데 페르디키온이 검을 들고 일어났다.

“난 됐다. 보초라도 서 주마.”

자리를 뜨려던 페르디키온에게 눈을 동그랗게 뜬 룬이 만류했다.

“무슨 소리야, 형. 물의 기운이 가득한 곳에서 최전방에서 싸웠으면서. 만약을 위해서라도 컨디션 관리는 제대로 하고 가는 게 안전해.”

“맞아요! 무모한 거랑 용감한 건 다르다고 했어요!”

“삐약!”

흑미와 백야까지 거들자, 페르디키온은 마지못해 몸을 다시 돌렸다.

“……쳇.”

솔직히 좀 더 고집 부릴 줄 알았건만, 꽤나 순순했다.

이 틈을 타 룬은 빠르게 주머니에서 피크닉 매트를 꺼내 깔고 여러 가지 음식과 마실 것을 꺼냈다.

“사과 주스다! 마침 먹고 싶었어요!”

흑미가 눈을 빛냈다.

던전에서 보기 힘든 신선한 야채와 과일.

샌드위치를 보자 다들 허기를 느꼈다.

자리를 잡은 일행들이 음식을 먹을 때, 룬이 카스테라와 우유를 대충 베어 물곤 먼저 일어났다.

“난 제드에게 줄 전리품 좀 줍고 있을게. 듀라한. 너도 따라와.”

철컹!

“둘만 간다는 것이냐?”

의심이 담긴 페르디키온의 시선이 끈질기게 쫒았다. 룬은 태연히 대꾸했다.

“형님에게 아이템 줍는 일을 시킬 순 없지. 내 권속 녀석의 부탁이기도 하고. 대신 백야랑 듀라한과 같이 갈게.”

“룬…… 나도 도……울 테니, 가, 같이 가.”

볼을 부풀리며 빵을 입 안에 얼른 밀어 넣은 흑미가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손을 탁탁 털었다.

“흑미도 준비됐어요!”

“…….”

식사들 편하게 하라고 두려 했더니, 도무지 그를 혼자 두지 않았다.

특히 페르디키온의 시선은 좀 전에 만류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도 되는 양 집요했다.

룬은 피식 웃었고, 일이 끝나면 한 턱 먹여야겠다 생각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급히 입 안에 우겨넣느라 볼을 햄스터처럼 부풀렸던 흑미가 그제야 오물거리며 음식을 삼켰다.

페르디키온은 좀 전의 만류당한 걸 고스란히 되돌려 준 게 마음에 들었는지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내가 말렸으니 고스란히 돌아온 셈이군.’

모두의 시선이 룬을 주시했다.

결국 룬은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쿠키를 들어 입에 넣었다.

그제야 다른 일행들도 시선을 거두며 모두 슬그머니 과자에 손을 댔다.

충분한 식사를 마치고 훈훈하게 자리를 정리 할 즈음, 주위를 살핀 룬은 슬쩍 듀라한 근처로 다가가 요정을 불렀다.

“야. 내가 말하는 대로 길 만들어 봐.”

[길? 왜. 내가.]

“몬스터가 아까 그 방에 있던 것보다 많이 있다고 했지?”

룬의 이야기를 들은 요정은 눈을 반짝이며 키득거렸다.

[사라질걸. 너.]

어리석은 자에 대한 비웃음 섞인 충고였다.

룬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구슬 더 흔들까.”

까드득!

구슬 속에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그 순간, 흑미의 귀가 쫑긋거리며 구슬이 있는 쪽을 휙 돌아보았다.

“저 구슬 이상해요!”

어느 새 붉은 살라만다들이 흑미의 몸 여기저기에 나타나 흑진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힉!]

순수한 불의 정령들이 다섯이나 나타나자, 겁먹고 조용해진 구슬 요정을 확인하고 룬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드러냈다.

‘오. 정령을 두려워하는군.’

부정하고 삿된 존재로 태어난 녀석이다.

순수한 자연 속에서 태어난 정령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룬은 확인차 은근한 목소리로 떠보았다.

“길 제대로 안 만들면 듀라한이 말고 흑미에게 넘긴다?”

[흐으으, 하지 마!]

씩씩거리던 정령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목소리였다.

고작 불의 하급 정령을 이렇게까지 피하려 든다는 건 태생부터 정령들을 힘들어 한다는 방증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빛을 다루는 골드 드래곤 장로 크리스티나와 빛의 정령 라이와 마주친다면?’

룬은 눈을 빛냈다.

괜한 원한이라도 가지면 귀찮아질 거라 여겼지만 성불시켜줄 적합한 자가 있었다.

‘좋아. 레어에 데려가면 나머지는 크리스티나의 몫이겠어.’

흐뭇해진 그는 꿍꿍이를 숨기고 다른 이들과 재료들을 주워 담았다.

다른 일행들과 함께하니 온갖 재료들은 물론, 호기심에 주워온 것들까지 죄다 주머니에 들어갔다.

정리가 끝나고, 그들은 외길을 따라 걸어 나갔다.

“두 갈래 길이네.”

“문제될 건 없지 않나. 어차피 하나를 골라 다 같이 가면 될 일이다. 틀리면 돌아오면 되고.”

페르디키온의 말에 룬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좋겠지만 여기 길잡이 요정 녀석이, 두 길 모두 나눠서 가야한대.”

물론 이건 룬이 요정에게 시킨 대로였다.

하지만 그는 시치미를 떼고 말을 이었다.

“양 쪽 길에 나오는 몬스터를 다 정리해야 하는데, 한 쪽 통로만 정리하고 빠져나가면 다른 쪽 통로에 있는 몬스터가 다시 생성되는 종류래.”

“어, 그럼 한 쪽 길을 다 정리해도, 다른 길에 있는 몬스터를 혼내주러 다들 가면…….”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시 몬스터가 생성된다는 말이로군.”

흑미와 페르디키온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아. 그러니 양 쪽으로 각각 들어가 몬스터를 사냥해야 해. 어느 쪽 길이든 끝에 다다르면 다른 쪽 팀과 만날 수 있다고 하기도 하고.”

“그 이상한 요정인가 하는 녀석 이야기냐?”

“응.”

불만스러운 콧방귀를 뀐 페르디키온은 듀라한을, 정확히는 요정이 있을 법한 방향을 노려보았다.

시선만으로 이미 ‘죽여버리겠다.’고 염불을 외는 수준이었다.

결국 일행은 팀을 나누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룬이 팀 구성을 제안하자 시작부터 불만이 튀어나왔다.

“진심이냐. 이게 팀이라고?”

“다, 다른 방법은…… 없을, 까?”

아멜리아와 한 팀이 된 페르디키온이 탐탁지 않은 눈으로 팔짱을 끼었고, 아멜리아도 드물게 거부감을 드러냈다.

각 대장이 페르디키온과 룬으로 결정된 것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함께 할 팀원이었는데, 바로 페르디키온, 아멜리아, 흑미가 한 팀이 되었던 것이다.

영 불편해 보이는 아멜리아와 페르디키온을 보며 룬은 태연히 이유를 말했다.

“제일 좋은 조합이라 생각하는데? 던전에 대한 경험이 제일 많은 형이 대장. 이 던전에서 가장 물을 잘 다루는데다, 돌고래 정령이 따르는 라멜이 있고 지원에 용이한 아멜리아. 그리고 형과 합이 좋은 흑미.”

‘무엇보다 흑미없이 저 둘만 보냈다간 괜한 갈등이 생길수도 있으니까.’

차마 험한 말은 못하고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구겼다.

길잡이 요정은 듀라한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했는데, 요정을 제어할 수 있는 건 룬뿐이었다.

게다가 던전을 이루는 주된 속성인 물과 어둠을 수족처럼 다루니 자연스럽게 룬과 듀라한, 백야가 같이 팀을 구성하는 것이 맞았다.

게다가 그의 권속인 흑미는 페르디키온이 싸울 곳에서도 룬의 기여도를 쌓을 수 있었다.

목적에 맞는 효율적인 구성이었다.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흑미를 내 쪽에 소환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부탁할게.”

‘물론 할 생각은 없지만.’

이건 룬의 안전에 대한 염려를 덜어주려는 핑계일 뿐이다.

페르디키온은 애꿎은 요정 쪽을 한 번 더 노려보았다.

“……알았다.”

우여곡절 끝에 두 팀은 갈림길 앞에 섰다.

사뭇 비장한 눈으로 페르디키온과 아멜리아가 당부했다.

“최대한 빨리 깨고 널 도우러 가마. 몸 조심해라, 룬.”

“무, 무리하지 말……아요.”

“이따 봐요, 룬 님. 라한아, 힘내!”

해맑은 인사를 끝으로 그들은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룬은 손을 슬슬 흔들어 주고는, 그가 가야하는 길로 가벼운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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